제1부 미제스 핵심정리

정치와 이데올로기에서, 우리는 종종 이미 두 가지 틀 중에서만 그것도 준비된 틀 안에서만 택일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히곤 한다. 1930년대에 좌파들은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지가 공산주의와 파시즘 뿐이니 이 중에서만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지금의 경제학계에서도 우리는 ‘자유시장’ 통화주의자들과 케인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으며, 정부가 화폐공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상황에서 단지 어느 정도의 규모로 공급해야 하는지, 또 재정적자를 당연시하면서 어느 정도로 적자를 보아야 하는지만이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정부의 ‘혼합된’ 통화·재정정책에 대한 사소한 언쟁을 훨씬 능가하는, 셋째 경로는 사실상 잊혀졌다. 화폐공급 혹은 경제체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일체의 정부 영향력과 통제를 정말로 근절해야 한다는 제3의 대안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온전한 자유시장이라는 잊혀진 길이 있다. 이 길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라는 한 명의 외로운, 산전수전을 다 겪은, 걸출한, 그리고 감탄이 나올 정도로 창조적인 경제학자가 그의 일생을 다 바쳐 밝혀내고 싸워왔던 길이다. 만일 세계가 국가주의라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혹은 정말이지 경제학계가 건전하고 정확한 경제 분석을 발전시키는 길로 되돌아오게 된다면, 두 경우 모두 그들이 지금 수렁으로 가는 길을 포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우리를 위해 발전시켰던 언덕지대 위로의 길로 옮겨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제스 이전의 오스트리아학파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1881년 9월 29일에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렘베르크(현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투어 에들러 폰 미제스(Arthur Edler von Mises)는 오스트리아 철도국에서 부설 임무를 맡은 출중한 건설 기사였는데, 당시에 렘베르크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비엔나에서 성장하여 1900년대가 시작될 무렵 비엔나 대학교에 들어가서 법과 경제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73년 10월 10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미제스는 위대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와중에 태어나서 자랐다. 미제스라는 인물도 경제사상에 대한 그의 핵심적 기여도, 그가 배우고 흡수하였던 오스트리아학파의 전통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800년대 후반, 리카도(David Ricardo)와 밀(John Stuart Mill) 등에 의해 정점을 찍은 영국의 ‘고전학파 경제학’(classical economics)은, 몇 가지 기초적인 결함에 잘못 근거하여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 심각한 결함이란 고전학파 경제학이 경제를 개인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집합’(classes)을 통해서 분석하려고 해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재화(goods)와 서비스의 가치 그리고 가격을 결정하는 잠재적인 원인들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경제에서 생산자들이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중대한 원인인 소비자의 행동도 분석할 수 없었다. 예컨대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재화의 ‘집합’을 살펴보면서, 빵이 극히 유용하고 ‘생명을 지탱하는 것’ 임에도 시장에서 낮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반면, 사치품이며 인간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는 허식에 불과한 다이아몬드가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가치의 역설’(paradox of value)을 풀어낼 수 없었다. 만일 다이아몬드보다 빵이 명백히 더 쓸모있는 것이라면, 왜 빵이 시장에서 훨씬 더 싸게 팔리는가?

이 역설을 설명하는 데 좌절하면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불행하게도 가치가 근본적으로 나뉘어있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즉 ‘사용가치’면에서 빵은 다이아몬드보다 높게 평가되지만 ‘교환가치’면에서는 어떤 이유에선가 낮게 평가된다고.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이후 세대의 경제학자들이 시장경제를 평가절하하는 일이 일어났다. 즉, 시장경제가 비극적이게도 훨씬 은혜로운 ‘사용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정반대인 ‘이윤을 위한 생산’으로 자원을 잘못을 끌어가는 경제라는 평가절하를 한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 이전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소비자들의 행동을 분석해내지 못함으로써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만족스럽게 설명해내는 데 실패하였다.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불행하게도 그들은 (a) 가치는 상품에 내재한 어떤 것이고, (b) 가치는 생산공정에서 이 재화에 삽입된 것임에 틀림없으며, (c) 가치의 궁극적 원천은 생산‘비용’ 즉, 그것의 생산에 걸린 노동시간의 양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리카도주의 분석이 형성한 고전학파 패러다임에서 마르크스(Karl Marx)의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왔는데, 이는 리카도주의의 완벽하게 논리적인 결론이었다. 즉, 모든 가치가 노동시간의 양의 산물이라면, 자본가나 고용주가 획득하는 모든 이자와 이윤은 노동계급의 진정한 수확으로부터 부당하게 빼내어 간 ‘잉여 가치’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 리카도주의자들은 자본 설비가 생산적이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그 자본 설비의 몫을 마땅히 이윤으로 취해야 한다는 항변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자본도 ‘형태를 갖추게 된’(embodied) 혹은 ‘동결된’(frozen, 응결된) 노동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산에서 나온 전체 수익은 전부 다 노동자의 임금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정정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었다.

이렇듯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이윤을 만족스럽게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못했다. 생산에서 얻은 수익의 지분을 순전히 ‘집합’을 통해서만 다루었기에, 리카도주의자들은 ‘임금’(wages), ‘이윤’(profits) 그리고 ‘지대’(rents)의 지분을 놓고 일어나는,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지주들 간의 끊임없고 영원한 ‘계급적(집합적) 투쟁’외에는 볼 수 없었다. 오로지 총합(aggregates)을 통해서만 생각함에 따라, 비극적이게도 리카도주의자들은 ‘생산’과 ‘유통(distribution, 분배)’의 문제를 서로 투쟁하는 계급갈등의 쟁점인 분배와 분리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노동자의 임금은 오로지 자본가와 지주의 이윤과 지대를 더 낮은 수준으로 희생시켜야만 오를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리카도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체제에 다시 볼모로 잡히고 말았다.

개인이 아니라 집합을 통해서 경제학을 이해하면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소비에 대해 결코 분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치와 가격을 설명할 때에도 잘못된 길로 빠졌다. 그들은 생산의 개별적 요소들, 즉 노동, 토지, 혹은 자본재의 구체적 단위의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설명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180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리카도주의 경제학의 결함과 오류는 더욱 분명해졌다. 경제학 자체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인간의 발명사에서는, 유사한 발견이, 공간적으로 또 조건적으로 완전하게 다른 곳에 사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례가 흔히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역설들에 대한 해결책이, 영국에서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에 의해서, 스위스의 로잔에서 발라(Léon Walras)에 의해서, 그리고 비엔나에서 멩거(Carl Menger)에 의해서 1871년 같은 해에 순전히 독립적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그 해에 현대 경제학 혹은 ‘신고전학파’(neo-classical) 경제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제본스의 해결책과 경제학에 대한 그의 새로운 전망은 파편적이었고 불완전했다. 더욱이 그는 영국이라는 빡빡한 지적 세계에서 리카도주의 경제학이 쌓아올려왔던 거대한 위신과 맞서 싸워야만 했다. 결국 제본스는 미미한 영향만 끼쳤을 뿐이고 추종자도 거의 모으지 못했다. 발라의 체계도 역시 당시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나중에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발라의 입장은 몇 년 후 불행하게도 현재의 ‘미시경제학’이 가진 오류의 토대를 형성하면서 재탄생했다. 신고전학파 셋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전망과 해결책을 내놓은 이는 비엔나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였던 멩거였다. 또 ‘오스트리아학파’(Austrian School)의 기초를 다진 것도 멩거였다.1

멩거의 선구적 작업은 그의 영특한 제자이자 비엔나 대학교에서 그의 교수직을 계승한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의 매우 체계적인 저작에서 제대로 된 결실을 맺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숙성된 산출물은, 1880년대에 쓰여져 세 권 분량으로 출판된, 뵘바베르크를 정점에 오르게 한 기념비적 저작인 《자본과 이자》(Capital and Interest)였다.2 1800년대 마지막 20년간 오스트리아학파에 기여했던 다른 위대한 창조적인 경제학자들도 언급해야할 것이다. 뵘바베르크의 처남으로 유명한 비저(Friedrich von Wieser) 그리고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클라크(John Bates Clark)가 그들이다. 그러나 뵘바베르크가 그 중 가장 우뚝 솟아올랐다.

경제학의 딜레마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즉 멩거와 뵘바베르크의 해결책은 리카도주의자들의 해결책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학파의 해결책은 완전히 대조적인 인식론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그들의 분석의 중점은 개인에게 두었다. 즉, 자신의 선호 그리고 가치를 기초로하여 선택을 하는, 현실세계의 행동하는 개인에게 중점을 두었다. 개인에게서 시작함에 따라, 오스트리아학파는 경제적 활동과 생산에 대한 분석을 개별 소비자의 가치와 ‘수요’(demands) 위에 올바르게 위치지울 수 있었다. 각각의 소비자는 그 자신이 선택한 선호 그리고 가치척도에 입각하여 행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소비자의 가치가, 모든 생산적 활동에 기초와 방향을 마련해주는 동시에, 그러한 생산적 활동이 소비자의 수요를 형성하도록 상호작용하고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현실세계를 직시하며 경제학적 분석을 개인에게 근거지음에 따라, 오스트리아학파는 생산적 활동이 소비자의 수요에 봉사하려는 기대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학파에 있어, 재화나 서비스에 가치를 부여하는 원인이, 노동이나 어떤 다른 생산요소 등 생산적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님이 명백해졌다. 가치는 개별 소비자들의 주관적 가치판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간단히 말해서, 저자가 거대한 삼륜 증기자동차를 완성하는 일을 하는 데 30년의 노동시간과 다른 자원을 지출하였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만일 이 삼륜차를 내놓았을 때 사려고 하는 소비자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내가 지출했던 잘못된 노고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는 무가치한 것이다. 가치는 소비자의 가치판단에서 비롯되고, 재화와 서비스의 상대적 가격들은 생산물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가치판단과 수요의 정도 그리고 강도에 의해서 결정된다.3

오스트리아학파가 큰 ‘집합’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명확히 개인을 통해서 보게 되면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을 난처하게 했던 ‘가치의 역설’을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어떠한 개인도 집합으로서의 ‘빵’과 집합으로서의 ‘다이아몬드’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의 문제에 부딪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화의 양이 더 커지면 (단위들의 수가 더 많아지면) 그가 어떤 주어진 단위에 가치를 덜 부여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었다. 물이 없는 사막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사람은 한 컵의 물에 아주 높은 ‘효용’가치를 부여할 것이나, 반면 주위에 물이 풍부한 비엔나 혹은 뉴욕과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은 어떤 주어진 컵의 물에 아주 낮은 가치 혹은 ‘효용’을 부여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막에서 한 컵의 물에 지불할 가격은 뉴욕에서 지불할 가격에 비해 대단히 클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행동하는 개인은 집합 전체가 아니라, 그 집합의 특정한 단위 혹은 ‘한계’(margins)에 직면하고 선택한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이 발견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marginal utility)이라고 한다. ‘빵’이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싼 이유는, 우리가 모든 빵과 모든 다이아몬드 중에서 선택하기 때문이 아니라, 빵 덩어리의 양이 다이아몬드 캐럿의 양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빵 덩어리의 가치와 가격은 각각의 다이아몬드 캐럿의 가치와 가격보다 훨씬 작은 것이다. ‘사용가치’ 그리고 ‘교환가치’간의 충돌은 없다. 이용가능한 빵 덩어리들이 많기 때문에, 각각의 빵 덩어리들은 개인들에게 각각의 다이아몬드 캐럿보다 덜 ‘유용’한 것이다.

시장에서 소득의 ‘분배’ 문제도 개인들의 행동에 마찬가지로 ‘한계분석’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일 때 해결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노동, 토지, 혹은 자본설비 등 유형이 다르더라도 자유시장에서는 각각의 생산요소 단위가 각자의 ‘한계생산성’에 기초하여 자유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노동, 토지, 혹은 자본 설비는, 그것이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최종 생산물의 가치에 실제로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기초하여 가격이 책정된다. 어떤 주어진 생산요소 단위의 공급이 더 커지면, 그것의 단위당 한계생산성과 단위당 가격은 더 작아질 것이다. 단위당 공급이 작아지면 단위당 가격은 더 높아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스트리아학파는 서로 다른 생산요소 집합들 간의 부질없고 자의적인 집합적 투쟁이나 갈등 따위는 없고, 각각의 유형의 생산요소가 조화롭게 최종생산물에 기여하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즉 가장 자원을 싸게 이용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의 가장 강력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각각의 생산요소의 단위는 생산적 결과에 대한 그 자신의 고유한 기여, 즉 한계생산을 한다. 만약 어떤 이해관계 갈등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생산요소들간에, 즉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 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 갈등은 오로지 같은 생산요소를 공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만약 어떤 사람이 새로운 구리 광산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증대된 구리 공급은 구리의 가격을 낮추게 될 것이고, 이것은 소비자들의, 그리고 노동과 자본요소들간의 협동의 편익과 소득을 증진시키는 데만 작용한다. 유일하게 불행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기네들이 생산하는 구리 가격이 하락함을 알게 되는 기존 구리 광산 소유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학파는 자유시장에서는 ‘생산’과 ‘분배’ 사이에 어떤 분리도 전혀 없음을 보여주었다. 소비자의 가치와 수요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소비자의 가치와 수요는 소비자가 어떤 소비재를 구매할 것이고, 그 소비재의 최종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생산활동의 방향이 결정되며, 이어서 임금률, 지대, 자본설비 등 협동적인 생산요소들의 단위당 가격을 결정한다. 소득의 ‘분배’는 단지 각 생산요소 가격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서 만일 구리 가격이 파운드 당 20센트이고 구리 소유자가 10만 파운드의 구리를 팔게 된다면, 구리 소유자는 ‘분배’로 2만 달러를 받게 될 것이고, 만일 누군가의 임금이 시간당 4달러이고 그리고 그가 1주일에 40시간을 일한다면 그도 ‘분배’로 1주일에 160달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한 이윤과 ‘동결된 노동’(기계류로 형태를 갖추게 된 노동)의 문제는 무엇인가? 뵘바베르크는 다시 또 개인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바램과 목표를 가능한 한 빨리 성취하려고 소망하는 것이 인간행동의 기본 법칙임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행위자는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현재재’(present goods)를,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만 사용할 수 있는 ‘미래재’(future goods)보다 항상 선호한다. 예컨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새가 숲속을 날아다니는 새보다 항상 더 가치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생산될 재화의 양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자본설비에 그들의 현재 수입 전부를 투자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시간 선호’(time preference)이다. 행위자들은 반드시 현재재로서의 소비재를 먼저 간직해야만 한다. 물론 서로 다른 조건과 문화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 선호의 비율, 즉, 미래재보다 현재재를 얼마나 선호하는지의 비율은 서로 다르다. 만약 시간 선호율이 더 낮으면 더 많이 저축하고, 미래의 생산에 투자할 것이다. 시간 선호가 이자율과 이윤의 원인이다. 이자율이나 이윤이 얼마나 높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 선호의 정도(degree)와 강도(intensity)이다.

예컨대 대출이자율을 들어보자. 중세시대와 근대 초기의 스콜라학파 철학자들은 나름대로는 훌륭한 경제학자이자 시장 분석가였다. 그러나 그들이 설명할 수 없었고 정당화할 수 없었던 하나는 대출에 이자를 부과시킨다는 문제였다. 그들은 위험한 투자에서 이윤을 얻는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화폐 그 자체는 자가 증식도 못하고 생산적이지도 않다는 점을 배워왔다. 그렇기 때문에 파산 위험이 없다고 가정하면 순수한 대출 이자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와 학자들은, 대출에 대한 모든 이자를 죄많은 ‘고리대금업’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세속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접근법까지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마침내 시간 선호의 개념으로 대출이자 문제의 해답을 발견한 이가 바로 뵘바베르크였다. 뵘바베르크에 따르면,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1년 후에 106달러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지금 당장 100달러를 빌려줄 때, 두 사람은 같은 것을 교환한 것이 아니다.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지금 당장 원하면 사용할 수 있는 ‘현재재’인 100달러를 양도하였다. 반면에 채무자는 지금으로부터 1년 후 화폐를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부채증서(IOU)를 조건으로 걸었다. 간단히 말해서,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현재재’를 주는 반면,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사용하기 위해서 1년을 기다려야 하는 ‘미래재’를 주고 있다. 시간 선호라는 보편적 사실이 현재재를 미래재보다 더 가치있게 만들기 때문에, 채권자가 가진 현재재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미래재를 채무자가 지불할 의향이 있어야만 거래가 성사된다. 이러한 웃돈(premium)이 바로 이자율이다. 그 웃돈이 얼마나 큰지의 여부는, 시장에 있는 각각의 사람들의 시간 선호율에 달려있다.

그러나 뵘바베르크가 보여준 것이 이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시간 선호가 어떻게 사업 이윤율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결정하는지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정상적인’(normal) 사업이윤율은 이자율과 일치한다. 노동과 토지가 생산과정에서 고용되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은, 생산물이 생산되어 최종적으로 소비자에게 팔릴 때 까지, 그들은 자기 몫의 대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점 (만약 자본가인 고용주가 없다면 기다려야 하겠지만) 역시 뵘바베르크가 보여주었다. 만약 자본가인 고용주가 없었다면, 자동차, 빵, 혹은 세탁기등의 최종 생산물이 소비자에게 팔릴 때 까지, 노동자나 토지소유자는 자기 몫을 지불받지 못한 채 여러 달 혹은 여러 해 동안 기다리며 고생해야만 할 것이다. 자본가들이 위대한 점은, 소득에서 돈을 미리 저축한 다음, 노동자와 토지소유자들이 아직 한참 생산하는 동안 임금을 미리 지불해주고, 최종 생산물이 소비자에게 팔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는 자기 몫을 취하는 서비스를 수행한다는 점이다. 자본가들이 수행하는 바로 이러한 서비스 덕분에, 노동자와 토지소유자들은 자신들의 이윤 혹은 이자를 자본가들에게 ‘지불’할 용의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서, 자본가들은 일종의 ‘채권자’와 같다. 그들은 지금 당장 노동자와 토지소유자에게 그들의 몫을 지불하고, 최종 생산물이 팔려 궁극적으로 지출이 회수될 때까지 인내심있게 기다린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노동자와 토지소유자들은 미래에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하고 지금 당장 이득을 취하는 ‘채무자’에 해당한다. 이렇듯, 정상적인 사업이윤율은 다양한 시간 선호율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뵘바베르크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했다: 자본재는 단순히 ‘동결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동결된 시간(그리고 토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시간 선호율에 차이가 있다는 중대한 점 덕분에 이윤과 이자를 설명할 수 있다. 또 뵘바베르크는 자본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 역시 엄청나게 진전시켰다. 리카도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오늘날의 많은 경제학자와도 대조적으로, 그는 ‘자본’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동질적인 덩어리거나4 양적인 무언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자본은 시간적 차원도 포함되어있는 복잡한 씨줄 날줄이 있는 ‘직물’과 같은 것이다. 경제성장과 생산성의 증가는 단순히 자본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시간적 구조가 더해짐에 따라 ‘더 길고 긴 생산과정’을 구축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간 선호율이 낮을수록, 그들은 현재의 소비를 더 많이 희생하여 저축하고, 미래에 어느 날엔가 훨씬 더 큰 양의 소비재를 수확할 이러한 긴 생산과정에 투자할 용의를 가질 것이다.

미제스와 오스트리아학파:《화폐와 신용의 이론》

청년 미제스는 1900년에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1906년 법과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정기적으로 열리는 뵘바베르크 세미나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의 하나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접근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미제스는 뵘바베르크 그리고 구오스트리아학파들이 많은 진전을 보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오스트리아학파의 분석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한까지 밀고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도 중요한 허점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물론 이는 어떤 학문 분야라도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학문의 발전은 학생과 추종자들이 그들의 위대한 스승의 어깨 위에 서게 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모든 경우에 흔히 그러하듯이, 스승들은 그들의 후계자들이 이룬 진보의 가치를 부인하거나 보지 못하곤 한다.

특히 미제스가 포착했던 주요 허점화폐에 대한 분석이었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생산요소들뿐만 아니라 소비재에 대해서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분석해냈음은 맞다. 그러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시대에서부터, 화폐는 별도의 범주로 받아들여졌고, 경제체제의 나머지가 총체적으로 분석되는 와중에도, 당시까지의 구오스트리아학파,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다른 신고전학파 모두에게 화폐이론과 나머지 경제이론에 대한 고전학파의 분리는 계속 유지되었다. 즉, 화폐와 ‘가격수준’(price level)이 나머지 시장경제와 전체적으로 괴리된 채 분석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 유감스러운 구분의 불행한 결과물을 ‘거시’경제학과 ‘미시’ 경제학의 분리에서 볼 수 있다. ‘미시경제학’은 최소한 대략적이나마 개별 소비자와 생산자의 행동에 기반하고 있으나, 주류 경제학자들이 화폐를 논할 때가 되면, 그들은 갑자기 비현실적인 복합체, 즉 화폐적인 ‘가격수준’, ‘국민 총생산’, 그리고 ‘총지출’이라는 가공의 세상으로 빠지게 된다. 경제학이 개인의 행동에 견고하게 기초해야 한다는 점에서 벗어났기에 ‘거시경제학’은 고전학파가 저지른 오류들에서 새로운 오류들로 뛰어 올라갔다. 미제스가 첫번째 학문적 전성기를 맞은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미시와 거시 사이의 이러한 분리가 피셔를 오도하였다. 미국의 경제학자 피셔(Irving Fischer)는 개인의 행동에 전혀 근거하지 않은 채, 또 더 건전한 몸체인 신고전학파의 ‘미시’경제학 분석에 화폐와 다른 주제들을 통합시키려고 하지도 않은 채, ‘가격수준’과 ‘유통속도’(velocity of circulation)라는 정교한 이론을 세우는 쪽으로 급격하게 치달았다.

이러한 균열을 보수하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미제스였다. 미제스는 화폐와 (‘가격수준’이라고 잘못 불리우는) 화폐구매력에 대한 경제이론들을, 개인과 시장경제라는 오스트리아학파의 분석 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경제체제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게 될, 대단히 체계적인 경제학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미제스는 이 기념비적 성취를 그의 첫 대작인 《화폐와 신용의 이론》(The Theory of Money and Credit, Theorie des Geldes und der Umlaufsmittel, 1912)5에 담았다. 이는 뵘바베르크의 창조적인 통찰력에 비견할 만한 눈부신 성취였다. 마침내 미제스를 통하여, 경제학은 개인의 행동에 기반한 경제현상의 전반적인, 또 체계적인 분석이 되었다. 이제 화폐와 상대적인 가격 사이에, 그리고 미시와 거시 사이에 결코 균열이 있어서는 안되게 되었다. 화폐량과 가격수준 사이에는 어떤 자동적인 관계가 있고, 이를 ‘유통속도’와 ‘교환방정식’(equation of exchange)과 같이 기계적이고 역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피셔의 관점은, 화폐 자체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도 한계효용이론을 체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미제스의 주장에 의해 확실하게 제거되었다.

특히, 미제스는 다른 모든 재화의 가격이 그것의 이용가능한 양과 (소비자의 한계효용에 기초한) 그 재화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의 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처럼, 화폐단위의 ‘가격’과 구매력이 똑같은 방식으로 시장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화폐에 대한 수요는, 어떤 사람의 현금 잔고로 (조만간 유용한 재화나 서비스로 그것을 지출하기 위해서 지갑이나 은행에) 보유하려는 수요이다. 화폐단위(달러, 프랑, 혹은 골드 온스)의 한계효용이 현금 잔고에 대한 수요의 강도를 결정한다. 그리고 이용가능한 화폐량과 그에 대한 수요 사이의 상호작용이, 달러의 ‘가격’, 즉 달러로 얼마나 많은 재화를 교환하여 살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미제스는 달러나 골드 온스의 공급증대가 그것의 가치 혹은 ‘가격’의 하락(즉, 다른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의 상대적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고전학파의 ‘화폐수량설’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화폐수량설의 거친 면을 엄청나게 다듬었고, 그것을 일반적인 경제분석으로 통합하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미제스는 이러한 움직임은 거의 비례적이지 않다는 것, 화폐의 공급증대가 그 가치를 하락시키기는 하지만, 화폐수량설 자체만으로 현실에서 얼마나 하락시킬 것인가, 심지어 과연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는 할 것인가의 여부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예컨대 대중이 그 화폐를 현금잔고로 유지하려는 수요에 달려 있다. [즉, 이러한 분석은 화폐수량설 자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고, 경제이론의 더 넓은 측면을 고려해야만 한다.] 또한, 미제스는 ‘화폐량’이 총합으로, 즉 똑같이 증가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새로 유입되는 화폐는 경제체제에 한 지점에 먼저 투입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 전반에 걸쳐 새로운 화폐가 점점 퍼져나가며 가격을 상승시킨다. 가령, 만약 정부가 새로운 화폐를 찍어내고 그것을 종이집게산업에 지출한다면, 비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이 말하듯이 ‘가격수준’의 단순한 증대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종이집게’(paper clips) 산업 종사자들의 소득을 먼저 증진시키고, 종이집게의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고, 종이집게산업에 대한 공급자들의 가격 등등 역시 상승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화폐공급의 증가는 최소한 상대적인 가격들을 일시적으로 변화시키고, 상대적인 소득에 영구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미제스는 리카도와 19세기 전반의 영국 통화학파에 있었지만 오랫동안 잊혀졌던 화폐에 대한 주요 통찰력을 부흥시켰다. 그 통찰력이란 것이, 금을 산업적으로나 소비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논외로 한다면, 화폐 공급 증대 자체는 아무런 사회적 편익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6

토지, 노동, 자본과 같은 생산요소들의 증대는 더 많은 생산과 더 높은 생활수준을 가져오지만, 화폐의 증대는 그 구매력만 희석시킬 뿐이고 생산을 증대시키지는 못한다. 만일 마치 마술처럼 어제밤 모든 사람의 지갑이나 은행계좌의 화폐량이 세배로 뛰었다면 사회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제스는 ‘인플레이션’(화폐량의 증가)이 엄밀하게 말해서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화폐공급이 증대되는 경우, 모든 사람이 새로운 화폐를 동시에 똑같은 수준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정부, 혹은 보조금이나 정부매입 등으로 정부와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화폐를 받을 첫 수령자이다. 그들의 소득은 새로운 화폐로 인해 가격이 오르기 전에 먼저 증대된다. 반면에, 새로운 화폐를 가장 마지막으로 받는 (혹은 그러한 화폐를 전혀 수령하지 못하는) 불운한 사회구성원들은, 새로운 화폐를 통해 증대된 소득을 미처 누리기도 전에, 이미 물가수준이 광범위하게 상승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다. 간단히 말해서, 인플레이션은 정부나 정부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경제집단이,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은밀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편익을 얻을 수 있다는, 어찌보면 매력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리하여 미제스는 인플레이션(화폐공급의 팽창)이 세금부과이고 부의 재분배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정부에 의한 화폐공급의 증대라는 인위적인 방해없이 발전하는 자유시장경제에서, 물가는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이 팽창됨에 따라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가격과 비용의 하락은, 19세기의 대부분의 기간에서 보여졌듯이, 산업발전의 정말이지 환영할 만한 특징이다.

한계효용을 화폐에 적용하면서 미제스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정복할 수 없다고 보았던 문제, 소위 ‘오스트리아학파의 순환’(Austrian circle)을 극복했다. 경제학자들은 달걀과 밀과 빵의 가격이, 이 품목들의 각각의 한계효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소비되기 위하여 수요되는 이 재화들과는 달리, 화폐는 재화를 구입하는 데 지출하기 위해서 수요되고 현금 잔고로 보유된다. 따라서, 화폐는 시장에서의 가격과 구매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미리 존재하고 있어야만 사람들에 의해 수요될 수 있다(또 그런 경우에만 화폐는 단위당 한계효용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화폐가 수요되기 위해서 사전에 가격(가치)이 미리 존재해야 한다면, 도대체 화폐가 최초로 등장한 가상의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최초의 화폐는 어떻게 단위당 한계효용을 가지고 화폐가격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전까지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제스는 그의 ‘회귀정리’(regression theorem)에서 ‘오스트리아학파의 순환’을 벗어던지고 그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성취 중 하나를 이뤄냈다. 그는 화폐에 대한 수요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미제스는 종이화폐가 아니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던 아주 옛적으로까지 논리적으로 추적하고, 단순히 교환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도 유용한 가치를 가졌던 상품(예컨대 금과 은)만이 최초의 화폐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미제스는 화폐가 오로지 한 방식으로만 기원할 수 있었음을, 즉 유용한 재화로서 시장에서의 직접적인 수요를 가지고 있는 재화에서만 기원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화폐의 가격이나 구매력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완수하였다. 이것은, 어떤 사물을 단순히 화폐라고 선언하는 정부나 일종의 사회계약에 의해서 한번에 화폐가 탄생할 수 없다는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화폐는 오로지 일반적으로 유용하고 가치있는 상품으로부터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멩거 역시 이전에 화폐가 이런 방식으로 출현했을 것이라고 유추하였다. 그러나 화폐가 시장에서 이런 원리로 기원하는 것이 반드시 필연적이라고 확정지은 이는 미제스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미제스의 설명은, 당시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관점과 달리 ‘화폐’가 단순히 ‘달러’, ‘파운드’, ‘프랑’처럼 정부가 정의한 자의적인 단위나 혹은 종이조각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화폐는 금, 은, 기타 등등과 같이 유용한 상품으로서 기원되어야만 한다. 본래의 화폐단위, 즉 회계와 교환의 단위는 ‘프랑’이나 ‘마르크’가 아니라 금의 무게(gold gram) 혹은 은의 무게(silver ounce)이었다. 즉, 본질적으로 화폐단위는 특정한 가치있는 시장생산 상품(금과 은 등)의 무게단위였다. 실제로, 오늘날의 거의 모든 화폐의 이름이 금이나 은의 무게단위를 의미했던 달러, 파운드, 프랑 등등인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심지어 오늘날과 같은 화폐적 혼돈 속에서도 미국의 법전은 여전히 달러를 금 1온스의 1/35(지금은 1/40 상당)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이, 정부가 자의적으로 생산한 달러나 프랑의 공급증대가 사회적 해악들을 유발한다는 미제스의 또 다른 입증과 결합함에 따라, 미제스는 정부가 화폐체제에서 완전히 분리될 방안도 제시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화폐의 본질이 금이나 은의 무게라면, 그러한 무게들이 다시금 화폐와 화폐적 교환의 매개단위로 자리잡는 세계가 복원되는 것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본위제는 수구적인 집착이 아니며 정부의 임의적인 장치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것은 순전히 시장에서만 생산되는 화폐를 제공할 수 있고, 강압적인 정부의 고유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재분배 경향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건전하며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화폐는, 생산성의 증대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그에 상응하여 가격과 비용이 하락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미제스의 기념비적인 《화폐와 신용의 이론》의 업적은 상기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제스는 화폐공급에서 은행의 역할 역시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즉, 미제스는 정부통제와 명령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유은행체제만이, 화폐의 인플레이션적 팽창으로 귀결되지 않고, 지불수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태환화폐’(hard money)라는 건전하고 비인플레이션적 정책을 취할 은행체제로 귀결됨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처럼 정부은행이 은행을 통제하는 것)이 민간은행들의 인플레이션적 경향을 제한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며 옹호해왔다. 그러나 미제스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엄밀하게 말해서 그 반대이었음을, 즉, 자유시장이 은행의 활동에 가하는 엄중한 제약들로부터 은행을 해방시켜주고, 은행들이 대출이나 예금을 인플레이션적으로 팽창하도록 자극하고 유도하는 것이 바로 중앙은행임을 증명하였다. 중앙은행의 반대론자들이 익히 잘 알고 있다시피, 그것은 언제나 은행을 시장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주는 인플레이션적 장치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하여, 《화폐와 신용의 이론》의 또 다른 중요한 성취는, 오스트리아학파의 한계효용 개념을 불구로 만든 비개인주의로의 일탈도 일소시켰다는 것이다. 그 당시까지의 오스트리아학파 학자들은, 개인의 실제 행동에 집중해야 하는 오스트리아학파의 기본적 방법론과 모순되게도, 한계효용을 측정가능한 수학적 양으로 개조하고자 노력했던 제본스-발라의 견해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경제학 교과서들은 덧셈이나 곱셈 등의 수학적 계산을 통해 산출할 수 있는 ‘효용’(utils)단위라는 말을 사용하며 한계효용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학생이 “버터 한 파운드에 4 효용단위의 가치를 둔다”는 말이 터무니 없음을 느낀다면, 그 학생은 정확한 것이다. 미제스는, 뵘바베르크 세미나에서 동료 학생이었던 체코인 쿠엘(Franz Cuhel)의 통찰에 근거해서, 한계효용이 측정가능하다는 생각을 격렬하게 반박하였고, 한계효용에는 어떠한 신비로운 단위나 양이 가정될 수 없고, 오직 개인들이 자신의 가치를 선호 서열(“나는 B보다 A를 선호하고, C보다 B를 선호한다.”)에 따라 열거하는, 엄격히 말해서 서수적 서열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일 한 사람의 효용이 ‘측정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사회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효용들을 비교하려는 것도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주의자들과 평등주의자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이런 방식으로 효용 이론을 정립하려고 노력해왔다. 우리는 각각의 사람이 화폐를 더 많이 가질수록, 화폐의 단위당 한계효용이 떨어질 것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정부가 화폐의 단위당 가치를 비교적 낮게 보는 부자에게서 돈을 빼앗아 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사회적 효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가? 바로 미제스가 효용이 측정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국가에 의해 시행되는 평등주의 정책이 옹호될 가능성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경제학자들은 말로는 개인들 간에 효용이 비교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적 편익들’과 ‘사회적 비용들’을 과감하게 비교하고 합산하려고 꾸준히 시도한다.

경기변동이론

《화폐와 신용의 이론》은 미제스의 또다른 거대한 성취, (신비롭고 골치 아픈 경제 현상인) 경기변동에 대한 설명의 기초적 토대를 포함한다. 1700년대 후반부터 이루어진 산업과 선진 시장경제의 발전 이래, 경제현상의 관찰자들은 시장경제가 외관상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련의 ’호황’(boom)과 ‘파국’(bust), 때로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의 고양 혹은 심각한 공황과 침체를 벗어날 수 없다고 기록해왔다.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심지어 그들 중 최고의 인물조차도 하나의 근본적인 결함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아무도 경기변동에 대한 설명을 경제학체계의 일반 분석에 통합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가격과 생산이라는 ‘미시’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제분석은 시장경제가 완전고용과 예측오류의 최소화를 달성하는 ‘균형’(equilibrium)을 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경기변동을 경제학의 다른 이론과 통합시키는 것이 무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일련의 호황과 파국이 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지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았던 것이다.

미제스는 호황과 파국의 반복이 시장경제 그 자체의 내재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부의 간섭에 의해 생겨난다는 설명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전에는 연결성이 없었던 세 가지 요소를 통합함에 따라 그의 위대한 경기변동이론을 수립했다. 첫째는 정부와 은행체제가 습관적으로 화폐와 신용을 팽창시키며 가격이 상승하도록 유도하고(호황), 금을 유출시키며 화폐와 가격들의 지속적인 충돌을 야기한다는 것(파국)을 보여준 리카도주의였다. 미제스는 리카도주의자들의 생각이 예비 모델로서는 훌륭하다고 평했지만, 그것 자체로는 호황이 어떻게 생산체계가 고무되도록 깊은 영향을 주고, 왜 호황 이후에는 파국이 불가피한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둘째 요소는 자본과 생산구조에 대한 뵘바베르크의 분석이었다. 7

마지막 셋째는 스웨덴인 ‘오스트리아학파’ 빅셀(Knut Wicksell)의 두 위대한 증명, 즉 생산체제의 중요성 입증과, ‘자연’이자율(은행의 신용팽창이라는 간섭이 없는 이자율)과 실제로 은행대출에서 행해지는 이자율 사이의 간격에 따라 가격에 차이가 난다는 점의 입증이었다. 8

중요하지만 흩어져 있었던 이 세 개의 이론들로부터, 미제스는 그의 위대한 경기변동이론을 구축해냈다. 정부와 중앙은행에 의해 고무받아 은행신용과 은행화폐가 팽창하고, 원활하게 기능하고 조화로운 시장경제에 유입된다. 은행들이 화폐(은행권 혹은 예금)의 공급을 팽창시키고 경제에 새로운 화폐를 대출함에 따라 이자율은 ‘자연’ 혹은 시간 선호 비율 아래로, 즉 대중의 자발적인 소비 그리고 투자 비율을 반영한 자유시장 비율 아래로 이자율이 떨어지게 된다. 이자율이 인위적으로 낮추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화폐를 받아들인 기업가들은, 특히 장기 기획들, 기계류, 산업원료 등등 “멀리 떨어져 있는” 생산공정에 자본투자를 추가하는 식으로 생산구조를 팽창시킨다. 새로운 화폐는 임금을 비롯한 여러 생산비용을 부담하는 데 사용되고 자원들을 초기 자본재 투자 혹은 ‘높은’ 차수에 해당하는 산업에의 투자로 전달한다. 노동자들과 다른 생산자들이 새로운 화폐를 받아들었을 때에는, 그들의 시간 선호가 아직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에 그들은 옛날의 비율대로 화폐를 지출한다. 그러나 이는 대중이 새로운 투자를 감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저축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 확장된 사업과 투자들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후퇴(recession) 혹은 침체(depression)는, 시장이 인플레이션적 호황의 불건전한 ‘과잉투자’를 청산하고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소비/투자 비율로 되돌아가는, 생산체제의 불가피한 재조정이다.

그리하여 미제스는 최초로 일반적인 ‘미시경제학’분석과 경기변동이론을 통합시켰다. 정부 주도의 은행체제에 의한 화폐의 인플레이션적 팽창은, 자본재 산업에 과잉투자를 창출하고 소비재에는 과소투자를 창출한다. ‘경기후퇴’ 혹은 ‘침체’는 호황이 야기한 왜곡을 청산하고 소비자들에 봉사하도록 조직된 자유시장 생산체제로 시장이 되돌아가는 필수적 과정이다. 이 조정과정이 완수되면 경기회복(recovery)에 도달한다.

미제스 이론의 정책적 결론은 ‘케인스주의’이건 ‘후기 케인스주의’(post-Keynesian)이건 현재 유행하는 대책들과는 정반대이다. 만일 정부와 은행이 신용을 팽창시킨다면, 미제스주의 처방은 (a)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을 최대한 빨리 중단하고 (b) 필연적인 청산과정이 가능한 신속하고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 경기후퇴의 조정에 간섭하지 말고, 임금률, 가격, 소비 혹은 불건전한 투자를 부양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경제가 이미 경기후퇴기에 들어섰다고 해도 엄밀하게 말해서 처방은 마찬가지이다.

양차 대전 사이의 미제스

《화폐와 신용의 이론》은 청년 미제스로 하여금 유럽 경제학계의 선두 반열에 서도록 만들었다. 다음 해인 1913년 그는 비엔나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비엔나 대학교에서 개최된 미제스의 세미나는 유럽 전역에 있는 똑똑한 젊은 경제학자들의 등불이 되었다. 1926년 미제스는 유명한 오스트리아 경기변동연구소(Austrian Institute for Business Cycle Research)를 설립했다. 1928년 그는 그가 발전시킨 경기변동이론인 《화폐가치 안정과 이자정책》을 출판하였다.9그러나 이 책의 명성과 비엔나 대학교에서의 그의 세미나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미제스의 돋보이는 성취물이었던 《화폐와 신용의 이론》은 경제학 교수진들에 의해서는 실제로 인정받지 못했고 수용되지도 못했다. 이 거부가 상징적으로 보여진 것은 비엔나에서 미제스가 항상 ‘원외강사’(privatdozent), 즉 대학교에서 그의 위치가 훌륭했음에도 학교로부터 정식으로 보수는 받지 못하는 강사로 머물렀던 사실이다.10 그의 수입은 오스트리아 상공회의소에서의 경제 고문역으로 충당되었는데, 그는 1909년부터 그가 오스트리아를 떠날 때인 1934년까지 이 직책을 가지게 된다. 미제스의 성취가 일반적으로 무시된 이유는 그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다는 문제로 포장되고 있었지만, 더 깊게는 경제학 교수진들이 [독일어권의 동맹국과 영어권의 연합국처럼 진영 별로 나뉘는] 제1차 세계대전을 닮아가기 시작했던 과정에 있다. 영국과 미국의 학계와 같이 섬으로 분리된 별세계에서는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어떠한 저작도 아무런 영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화폐와 신용의 이론》은, 우리가 보게 되듯이 트렌드를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늦은 시기인, 1934년까지 영어로 발간된 적이 없다. 독일은 신고전학파의 전통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오스트리아 자체로만 보자면, 오스트리아학파도 하락세를 겪기 시작했는데,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1914년 뵘바베르크의 죽음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이 거의 없었던) 1921년 멩거의 죽음이다. 정통 뵘바베르크주의자들은 미제스가 진척시킨 것 그리고 미제스가 오스트리아학파적 분석에 화폐와 경기변동을 통합시킨 행위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그래서 미제스로서는 그 자신의 ‘신오스트리아학파’ 학생들과 추종자들을 새로이 창출하여야만 했다.

언어가 영국과 미국에서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신리카도주의자인 마셜(Alfred Marshall)의 방어력있고 위풍당당한 영향 하에서, 영국은 오스트리아학파적 사고에 우호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학파주의가 더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미국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해 동안 경제이론을 구성하는 수준에서는 비참한 하락세를 보였다. 미국에서 두 명의 지도적인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였던 코넬 대학교의 대번포트(Herbert J. Davenport)와 프린스턴 대학교의 페터(Frank A. Fetter) 모두 제1차 세계대전 쯤에는 경제이론에 대한 기여를 하지 못했다. 1920년대의 이 이론적 진공상태 속에서, 불건전하고 결정적으로 비오스트리아학파인 두 명의 경제학자들이 발을 들여놓았다. 양자 모두 ‘시카고학파’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한 사람은 역학적인 수량이론(mechanistic quantity theory)을 견지하고, 가격수준을 올리고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화폐와 신용에 대한 정부 조작이 바람직하다는 데 강조점을 둔 예일 대학교의 피셔 교수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공의 나라인 ‘완전경쟁’(perfect competition) 모델이 바람직하다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자본분석에서 시간의 중요성을 부정하거나 이자율 결정에서 시간 선호를 부정한 시카고 대학교의 나이트(Frank H. Knight) 교수였다.

더욱이 경제학의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경제의 세계도 미제스주의적 관점에 점점 더 비우호적으로 되어갔다. 미제스는 그의 대작 《화폐와 신용의 이론》을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대적으로 반간섭주의/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적이고 금본위제를 채택한 세계가 저물고 있을 때 썼다. 곧바로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오늘날 익히 잘 알고 있는 국가주의, 정부계획, 간섭, 정부 불환지폐, 인플레이션과 초인플레이션, 통화파산, 그리고 관세와 외환 통제의 세계가 경제체제에 들어왔다.

미제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암울해지는 경제 세계에 일생동안 고도의 용기와 개인적인 고결함으로 맞섰다. 미제스는 불운하고 재앙처럼 보이는 변화의 바람에 결코 굽히지 않았고, 현실의 정치경제와 경제학계에서의 변화에서도, 진리의 추구와 진리의 응용이라고 간주된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제스에 대한 헌사로,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유명한 금본위제 옹호자인 뤼프(Jacques Rueff)는 미제스의 ‘열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썼다: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그리고 불굴의 용기와 신념으로, 미제스는 잘못된 추론들과 우리 시대의 새 제도들 대부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된, 진실이 아닌 것들을 공격하였다. 그는 그 제도들이, 비록 사람들의 후생에 기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을 말로는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곤경과 고통의 직접적인 원천이며 궁극적으로는 갈등과 전쟁, 노예화의 원인이라는 점을 입증해왔다.

어떠한 고려조차도 그를 그의 냉철한 이성이 인도하는 곧고 가파른 길로부터 조금도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우리 시대와 같은 비합리주의 속에서 그는 순수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 남아있다.

미제스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전에는 인간적인 소심함 때문에 감히 갈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으로, 오직 그의 추론이 가지는 설득력에만 이끌려 가곤 한다는 점에 경악하기도 했다.11

경제계산문제와 《사회주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항상 암묵적으로 자유시장정책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1800년대 후반에는 세계가 평화롭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학파는 자유나 정부간섭에 대한 명시적 분석을 발전시키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다. 반면에 미제스는, 그의 경기변동이론을 계속 발전시키는 동시에, 가속화되는 국가주의와 사회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정부간섭과 계획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강력하게 집중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1920년에 저널에 실린 그의 논문 「사회주의체제에서의 경제 계산」(Economic Calculation in Socialist Commonwealth)12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산업경제로서 생존할 수 없는 체제라는 점을 처음으로 입증하였다. 미제스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유시장 가격체제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비용들을 계산할 수도 없고 생산요소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과제에 효율적으로 할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비록 1934년까지는 여전히 영어로 번역되지 못했지만, 미제스의 입증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십 년간 미제스를 논박하려고 했고, 그리고 작동 가능한 사회주의 계획경제 모델을 수립하려고 했다. 미제스는 그의 통찰을 포괄적인 사회주의 비판서인 《사회주의》(Die Gemeinwirtschaft, Socialism, 1922)13에 담았다. 미제스의 치명적인 사회주의 비판이 영어로 번역되기까지는, 미국 경제학계에는 폴란드 사회주의자 랑게(Oskar Lange)가 미제스를 ‘논파했던’ 것으로,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미제스의 논문을 읽으며 고생하는 대신에 편히 쉴 수 있다고 잘못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와 동구의 점차 산업화되는 경제의 공산주의 경제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잘 알려진 사례들은, 미제스의 통찰을 극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비록 편리하게도 미제스 자신이 이미 그 실패를 입증했었다는 점은 잊혀진 채였지만.

만일 사회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면, 그 경우 미제스가 간섭주의라고 이름붙인 시장에 대한 정부간섭이라는 특정한 행동도 작동할 수 없다.

《간섭주의 비판》(A Critique of Interventionism, Kritik des Interventionismus, 1929)14으로 모아져 출판된 1920년대 일련의 논문들 속에서 미제스는 국가주의 경제 조치들을 비판하였다. 만일 사회주의도 간섭주의도 모두 성장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반간섭주의’적 자유주의 혹은 자유시장경제를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미제스는 유명한 책 《자유주의》(Liberalismus, Liberalism, 1927)15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의 장점을 분석하는 것으로 확장해 나아갔다. 《자유주의》에서 미제스는 국제평화, 시민적 자유, 그리고 자유시장경제가 밀접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제학 방법론

이처럼 1920년대에 미제스는 국가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뛰어난 비판자이자 반간섭주의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대단히 창조적이고 창의력이 풍부했던 그의 정신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미제스는 경제학 그 자체가, 심지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조차도 충분히 체계화되지 못하였고, 경제학 자신만의 방법론적 기초도 완성하지 못했음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경제학이 점점 더 새롭고 불건전한 방법론들에 현혹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기본적으로 경제학을 아예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제도주의’(institutionalism), 그리고 그릇되게도 경제학을 자연과학에서와 똑같은 토대 위에 구축하려고 점차 시도하는 ‘실증주의’(positivism)가 그러했다. 고전학파와 옛 오스트리아학파도 경제학을 고유의 방법론 위에 구축해왔으나, 그들의 방법론이 가진 통찰력은 사실 그저 그런 것이었고 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실증주의나 제도주의의 새로운 공습을 견뎌낼 정도로 충분한 명시적이고도 자명한 방법론을 수립하지 못했다. 미제스는 철학적 기반을 다지고 경제학을 위한 방법론을 담금질하여 오스트리아학파의 방법을 채우고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들》(Grundprobleme der Nationalökonomie, Epistemological Problems of Economics, 1933)16에서 처음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제도주의는 사라져갔지만 불행하게도 실증주의가 경제학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미제스는 그의 방법론을 더 발전시켰고 《과학이론과 역사학》(Theory and History, 1957)17과 《경제과학의 궁극적 기초》(The Ultimate Foundation of Economic Science, 1962)18에서 실증주의를 논파하였다. 미제스에 따르면 실증주의적 방법은 물리학이 돌과 원자를 다루는 방식을 경제학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방법에 맞서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경제학 고유의 방법론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실증주의자들에게, 경제이론의 기능은 인간 행태의 수량적이고 통계적인 패턴을 관찰하는 것이고, 그래서 ‘예측할 수 있고’(predict) 추가된 통계적 증거에 의해 ‘검증받아야 하는’(tested) 경제학 법칙을 고안하고자 하였다. 실증주의적 방법은 인간을 마치 무생물인 물리적 대상인 것처럼 다루는, ‘사회공학자들’(social engineers)에 의해 지배되고 계획되는 경제라는 사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이다. 미제스가 《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들》 서문에서 쓰고 있듯이, 실증주의의 ‘과학적’ 접근법은:

… 질량과 운동을 연구하는 뉴턴 물리학의 방법에 따라서 인간존재의 행태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소위 인간 문제에 대한 ‘실증적인’ 접근법에 토대를 두고, 그들은 미래를 계획하려는 사회의 ‘경제 총괄관리자’가, 과학기술이 엔지니어로 하여금 무생물을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다루게 만들 수 있는 ‘사회공학’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계획한다. (p. v)

미제스는 ‘인간행동학’(praxeology), 즉 인간행동의 일반이론이라고 부른 그의 대조적인 방법론을 두 가지 원천으로부터 발전시켰다. 하나는 고전학파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의 연역적이고, 논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리케르트(Heinrich Rickert), 딜타이(Wilhelm Dilthey),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미제스의 친구인 베버(Max Weber) 등 ‘남서독일학파’(Southwest German School)의 역사철학이다. 본질적으로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은 그 기초를 행동하는 인간(acting man)에, 즉 수량적으로 결정된 물리적 법칙에 맞추어 ‘움직이는’ 돌이나 원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내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을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존재에 두었다. 간단히 말해서 미제스는 실증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의식성이라는 기본적인 사실, 즉 목적을 채택하고 행동으로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한 행동의 존재는, 인간존재가 반드시 행동한다는 것을 파악함으로써, 또 내적 성찰을 함으로써 발견된다. 인간이 세상에서 행동하기 위하여 그들의 의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현되는 그들의 행태는 수량적인 역사적 ‘법칙들’로 성문화될 수 없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통계적 법칙과 인간행동의 상관관계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헛된 짓이고 잘못 짚은 것이다. 각각의 사건, 각각의 행동은 인간역사에서 서로 다르고 고유한 것이고 자유로이 행동하고 상호작용하는 인격들의 결과이다. 그래서 경제이론의 통계적 예언 혹은 ‘검증’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인간행동학이 인간의 행동들이 수량적 법칙으로 분류되어 정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경우 어떻게 과학적 경제학이 존립할 수 있는가? 미제스는 인간행동의 과학으로서 경제과학은 물리학과 같은 실증주의 모델과는 전혀 다른 과학에 속한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고전학파 그리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이 보여주었듯이, 경제학은 진리이고 자명한 극소수의 공리들(axioms), 즉 인간행동의 본성(nature) 그리고 본질(essense)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도달한 공리들 위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 공리들로부터 우리는 그 공리들이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의미들, 즉 진실된 경제학을 연역할 수 있다. 예컨대 인간행동 그 자체에 존재하는 기초적인 공리는, 개인들이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 반드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행동한다는 것, 서수적 선호척도를 채택한다는 것 등등이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번역되지 못했지만, 방법론에 대한 미제스의 생각은 당시 그의 학생이자 추종자인 영국의 젊은 경제학자 로빈스(Lionel Robbins)에 의해 대단히 묽게 희석된 형태로 영어권 세계에 소개되었다. 로빈스는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지닌 속성과 중요성》(Essay on the Nature and Significance of Economic Science, 1932)19에서 미제스에게 ‘특별한 빚’을 졌다는 점을 인정했는데, 이 책은 여러 해동안 영국과 미국에서 경제학의 방법론에 관한 걸출한 저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로빈스는 이 책에서 경제학이 본질적으로 여러 대안적인 목적들 사이에서 희소한 수단의 분배에 대한 학문이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인간행동학의 너무나 단순화되고 희석된 형태였다. 로빈스의 생각은 연역적 방법의 본성에 대한, 그리고 경제이론과 인간역사의 본성 간의 차이점에 대한, 미제스의 심오한 통찰력을 빠뜨리고 있었다. 그 결과, 또 그와 함께 방법론에 대한 미제스 자신의 저작이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로빈스의 저작으로는 점증하는 실증주의의 파고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인간행동》

경제과학의 정확한 방법론을 만들어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였지만, 그 기반 위에서, 즉 그 방법론을 사용하여 경제분석의 전체로서의 경제학을 실제로 구축하는 것은 또 다른 임무이자, 훨씬 중요한 과제였다. 한 사람이 이 두 가지 과제, 즉 방법론을 만들어내고, 그 방법론적 기반 위에서 경제학의 완전한 체계를 발전시킨다는 거대한 임무를 모두 이뤄낼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보통은 불가능하다. 미제스의 저작과 성취에 대한 여러 기록을 쭉 본다면, 이 극도로 어렵고 험난한 과제를 미제스 자신이 완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모든 이상과 방법 그리고 원리들을 세상과 학계가 내팽개친 가운데 파시스트가 장악한 오스트리아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자, 심지어 그의 모든 추종자에게마저 사실상 버림받아 고립되고 외톨이가 된 상황에서도, 미제스는 그 엄청난 일을 스스로 해내었다. 1940년 미제스는 그의 최고봉이자 기념비적 성취물인 《경제학》(Nationalökonomie)을 독일어로 발간하였으나, 전쟁으로 찢겨진 유럽의 관심사로부터 곧바로 잊혀졌다. 천만다행으로 《경제학》이 1949년에 《인간행동》(Human Action)20이라는 이름의 증보 영역판으로 나왔다. 미제스가 《인간행동》의 출판 계약을 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특기할 만한 성취였다. 그처럼 극도로 비우호적인 환경 하에서 출판을 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성취가 더욱 고무적인 것이고 놀랄 만한 것이다.

《인간행동》은 전체가 건전한 인간행동학적 공리로부터 발전되었고 (현실세계에서 행동하는 목적의식적인 개인인) 행동하는 사람의 분석에 당당히 기초한 경제학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인간행동의 논리적 함의로부터 자아낸 것으로, 연역적 학문으로서 발전된 경제학이다. 그 책이 출판되자마자 읽을 특전을 가졌던 필자에게 《인간행동》은 내 인생과 사상의 경로를 바꾼 성취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중 일부가 꿈꾸었지만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던 경제사상의 체계가, 즉 마땅히 있어야 했지만 존재하지 못했던,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합리적인 경제과학이 이 책을 통해 마침내 달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행동》에 의해 [제대로 된] 경제학이 제시되었다.

미제스의 업적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간행동》이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오스트리아학파의 전통 속에서 쓰여진 경제학에 관한 최초의 전반적인 이론서였다는 데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행동》은 사실상 모든 경제학 전통에 있어서 최초의 전반적 이론서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학은 점차 통합되지 않은 분석의 조각들로 파편화되고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즉, 전쟁 전의 페터, 클라크, 타우시그(Frank Taussig), 그리고 뵘바베르크 같은 걸출한 사람들의 이전 저작들 이래로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을 일관성있고 연역적인 체계적 전체로서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경제학 분야의 전반적 그림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유일한 저자들은 경제학 입문서의 저자들인데, 그들도 일관성의 결여로 인해 주류 경제학이 도달한 불행한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인간행동》은 일관성의 결여라는 수렁에서 경제학이 헤쳐 나올 길을 가리키고 있다.

경제학의 위대한 집대성인 《인간행동》이 이룩한 많은 상세한 기여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역자 문단 바꿈]

[첫째] 이자의 기초로서의 시간선호에 대한 뵘바베르크의 발견과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 기반 위에서 뵘바베르크 자신은 그의 이론을 완전하게 구축하지 못했으며, 선호 문제를 혼란스럽게 남겨놓았다. 페터는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고 세련되게 가공하였는데, 1920년대에 저술한 유명하지만 무시된 저작에서, 페터는 이자에 대한 순수한 시간 선호 설명을 입증하였다. 경제학에 대한 페터의 전망은, 본질적으로 소비자 효용과 수요가 소비재 가격을 정한다는 것이었고, 개별 요소들은 자신의 한계생산성을 스스로 창출한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수확이 이자율 혹은 시간 선호율에 의해 할인(discounted)되며, 신용공여자 혹은 자본가가 이 할인을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미제스는 잊혀졌던 페터의 업적을 부활시켰고, 시간 선호가 인간행동에 반드시 있는 인간행동학적 범주임을 훨씬 폭넓게 보여주었고, 페터의 이자이론을 뵘바베르크의 자본이론, 그리고 미제스 자신의 경기변동이론과 통합시켰다

[둘째] 미제스는 또한 경제학에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수학적 통계적 방법에 대해서, 즉 스위스의 신고전학파 발라으로부터 기인하여, 경제이론에서 언어적 그리고 구두적 논리를 추방했던 그 방법론에 대하여, 몹시 필요했던 비판을 제공한다. 고전학파 경제학 그리고 오스트리아학파(그들 중 다수도 수학으로 철저히 훈련되었다)의 명백히 수학에 반대하는 전통을 이어받아, 미제스는 수학적 방정식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정태적이고, 따라서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일반 균형’(general equilibrium)의 세계에서만 유용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러한 가공의 열반(nirvana)에서 벗어난다면, 그리하여 시간이 존재하고, 기대가 존재하고, 희망과 실수가 존재하는 현실세계에서 행동하는 개인들을 분석하게 된다면, 그 때 수학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그릇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미제스는 경제학에서 수학의 사용 자체가 인간을 돌처럼 다루는 실증주의적 오류의 일부이며, 그에 따라 인간의 행동을 마치 물리학에서처럼 공중을 날아가는 미사일의 경로를 구상하는 수학적 정밀성으로 도해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행위자는 오로지 [개인의 입장에서 평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차이점만을 보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평가할 수 없는] 무한히 작은 양적 변화를 가정하는 미분계산의 사용이 인간행동의 과학에서는 대단히 부적절한 것이다.

수학 ‘함수’의 사용은 시장에서의 모든 사건이 ‘상호결정된다는 것’(mutually determined)을 또한 의미한다. 왜냐하면, 수학에서는 만일 x가 y의 함수이면 그러면 그 말과 동일한 의미에서 y는 x의 함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상호적 결정’ 방법론은, 아마도 고유한 인과적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 물리학의 영역에서는 완전히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행동의 영역에서는 인과적 행위자가 있는데, 개인들의 목적의식적인 행동이 단 하나의 원인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학파는 예컨대 소비자의 수요로부터 생산의 가격요소에게로 영향을 줄 수 있을지언정 결코 그 역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통계학적 사건을 수학과 통합하려고 시도하는, 마찬가지로 유행되고 있는 ‘계량경제학’의 방법은 이중의 오류를 저지를 뿐이다. 왜냐하면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에 도달하기 위해서 통계를 사용하는 것은, 개인의 행동을 분석하는 데 있어, 확인가능한 상수들 또는 불변의 수량적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마치 물리학처럼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제스가 강조하듯이, 아무도 인간행동에서 단일한 수량적 상수를 발견했던 적이 없고, 각각의 개인에게 내재한 의지의 자유라는 조건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도 아무도 발견할 것 같지는 않다. 21

이 오류에 열광하며 ‘과학적인’ 경제예측을 열망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미제스는 이 오래된, 그러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망한 열망이 가진 근본적인 오류를 신랄하게 보여주었다. 슈퍼컴퓨터와 복잡한 계량경제학 ‘모델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년간 계량경제학적 예측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기록은 미제스가 제시해왔던 여러 가지 통찰들의 하나를 확인해주는 것일 뿐이다.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에, 비극적이게도 미제스의 방법론과는 별개로 경기변동이라는 그의 경제학의 한 측면만이 영어권 세계로 분리된 채 영어권 세계로 유입되었다. 1920년대 ‘새로운 시대’(New Era)에 피셔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중앙은행 조작이 번영할 미래를 보증한다고 막연하게 선언하고 있었는데, 미제스는 그의 경기변동이론에 기초하여 침체를 예측했던 바가 있다. 대공황이 닥치자, 특히 영국에서,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에 생생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관심은 미제스의 걸출한 추종자인 하이에크(F.A. Hayek)의 런던 정치경제 대학교(이하 런던 정경대)로의 이주에 의해서 더 촉발되었다.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에 대한 하이에크 자신이 발전시켰던 것은 1930년대에 영어로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이 기간 중에 런던 정경대에서의 하이에크의 세미나는 힉스(John R. Hicks), 러너(Abba P. Lerner), 라흐만(Ludwig M. Lachmann), 칼도어(Nicholas Kaldor) 등을 포함한 많은 오스트리아학파 경기변동이론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로빈스와 벤햄(Frederic Benham)과 같은 미제스의 영어권 추종자들은 영국에서 대공황에 대한 미제스주의적 설명을 출판하였다. 마흐루프(Fritz Machlup)와 하벌러(Gottfried von Haberler) 같은 미제스의 오스트리아학파 학생들의 저작들이 번역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로빈스가 1934년에 미제스의 《화폐와 신용의 이론》의 영어 번역을 감수하였다. 미제스는 침체에 대한 그의 분석을 《경제위기의 원인》(Die Ursachen der Wirtschaftskrise, The Causes of the Economic Crisis, 1931)22에 담아 출판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전반기에는 마치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이 시대를 휩쓰는 것 같았고, 또 만일 그랬다면 미제스주의 경제학의 나머지도 그리 뒷전에 있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오스트리아학파 이론을 채택하는 데 더뎠다. 그러나 영국 경제학이 미국에서 가지는 거대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이 이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퍼질 것이 확실했다. 하벌러가 미국에서 미제스-하이에크 경기변동이론의 첫 요약본을 내었다.23 그리고 떠오르는 경제학자인 한센(Alvin Hansen)이 오스트리아학파의 학설을 채택하는 쪽으로 전향하였다. 경기변동이론 외에도 하이에크, 마흐루프, 그리고 젊은 경제학자 불딩(Kenneth Boulding)이 미국 저널에 실리는 일련의 유명한 글들에 오스트리아학파의 자본과 이자이론을 부활시켰다.

점차적으로 미래에 다가올 파고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일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미제스는 오랫동안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었지만 아직 받아내지 못했던 인정을 마침내 받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승리의 순간, 유명한 케인스주의 혁명(Keynesian Revolution)이 비극적으로 들이닥쳤다.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고용, 이자, 그리고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이 출판되면서, 인플레이션과 정부의 적자재정에 대한 혼란스럽고 미완성인, 케인스의 새로운 정당화 그리고 합리화가 요원의 불길처럼 경제학계를 휩쓸었다. 케인스 이전까지의 경제학은, 비록 인기는 없었지만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지출을 막는 방파제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케인스와 함께, 그리고 그의 암울하고 모호하고 수학 비슷한 헛소리로 무장한 채,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과 권력을 확장하려고 노심초사하는 정치인 그리고 정부와 동맹을 맺는 쪽으로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현대적 복지-전쟁 국가(Welfare-Warfare State)를 위한 지적 갑옷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고 강력한 규모의 간섭주의와 국가주의를 위한 지적 갑옷으로 아름답게 재봉되었다.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흔히 일어나듯이, 케인스주의자들은 미제스주의 이론에 의해 논파당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미제스주의 이론은 간단하게 잊혔는데, 그것이 케인스주의 ‘혁명’이라고 이름이 잘 붙여진 것의 돌격에 휩쓸려갔기 때문이다. 다른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뿐만 아니라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도 조지 오웰적인 ‘기억을 먹는 구멍’(memory hole)에 들이부어졌고, 그 시점 이래 경제학자들에게도, 세계에서도 실종되어버렸다. 아마도 이 대중적 망각의 가장 비극적인 현상 하나는 미제스의 유능한 추종자들의 변절일 것이다. 즉, 미제스의 추종자였다가 곧바로 미국의 주도적인 케인스주의자가 된 한센을 비롯하여, 하이에크의 영국 학생들은 물론, 망해가던 오스트리아를 신속하게 떠나서 미국 학계의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미제스를 잘 아는 그의 오스트리아 동료들도, 불행하게도 오스트리아학파를 떠나 케인스주의의 온건한 쪽으로 쇄도하였다. 미제스의 통찰이 잠시 반짝거렸던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에는, 오로지 하이에크와 그리 알려지지 못했던 라흐만 단 두 명만이 진실되고 오염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바로 이러한 고립 가운데서, 즉 인정받을 자격이 있을 만큼 드높았던 [경기변동이론의 확산과 간섭주의의 종식이라는] 미제스의 희망이 산산조각 깨져버린 가운데서, 미제스는 《인간행동》이라는 위대한 구조물을 완수하려고 애썼던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미제스

미제스는 [나치의 침공으로]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박해받자 저명한 유럽 망명객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 제네바로 가서 그곳의 국제문제대학원에서 1934년부터 1940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미제스는 1938년 제네바에서 사랑스러운 마르기트(Margit Sereny-Herzfeld)와 결혼하였다. 194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왔다.24 그러나 수많은 사회주의자 그리고 공산주의자 유럽 망명객들은 미국의 학계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그리고 전에 미제스를 추종했던 사람들도 학계에서 고위직을 차지했지만, 미제스 자신만은 무시받고 잊혀졌다. 미제스는 정치철학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적 방법론에서도 개인주의에 대해 억누를 수 없이 비타협적으로 고수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구속도 받지 않고 진실을 추구한다”고 자부하던 학계에서조차 미제스는 배제되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볼커 재단(William Volker Fund)의 지원을 바탕으로 생활을 하면서, 미제스는 1944년에 두 개의 특기할 만한 저작을 영어로 출판하였다: 《전능한 정부》(Omnipotent Government)25와 《관료제》(Bureaucracy)26가 그것이다. 《전능한 정부》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가 나치정권을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 분석했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며, 대신에 민족사회주의(나치)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관료제》는 기업가적 경영과 관료제적 경영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에 대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분석을 제시했고, 관료제의 심상치 않은 비효율성은 정부활동에 내재적인 것이기에 어떤 정부활동에서도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미제스가 봉급을 받는 대학교 전업 교수직을 얻지 못한 것은 미국 학계의 용서받지 못할 부끄러운 오점이다. 1945년부터 미제스는 뉴욕 대학교의 경영대학원 방문교수(visiting professor)였을 뿐이었다. 위풍당당한 학계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진 채, 대학 당국에서 이류로 천대받았을 뿐 아니라, 시류에 편승할 줄은 알았지만 포괄적이지 못한 회계 그리고 기업 재무 분야의 전공자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해야 했던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미제스는 한때 유명했던 자신의 주례 세미나를 다시 시작했다. 비극적이게도, [학위 지도과정이 아닌]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미제스가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젊은 경제학자들을 배출할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비엔나에서의 세미나와 같은 번뜩이는 성공을 다시 만들어낼 희망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슬프고 불행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미제스는 자부심을 가지고 불평 하나 없이 그의 세미나를 수행했다. 미제스가 뉴욕 대학교에 재직하던 시절에 그를 알게되었던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한 마디 빈정대는 말이나 화내는 말이 새어나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침없이 신사적이고 친절하게, 미제스는 그의 학생들에게서 어떠한 것이건 불씨가 있기만 하다면 그것을 가능한 한 격려하고 자극하려고 하였다. 매주 연구 기획제안이 그로부터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미제스가 행한 모든 강의는, 통찰력이 풍부한 그리고 그의 경제학적 비전의 전체적인 골격을 제시한, 조심스레 가공된 보석이었다. 조용히 그리고 경외심에 휩싸인 채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미제스는, 독특하게 유머러스한 눈빛으로, “발표하는 것을 겁내지마. 이 주제에 대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발표하건, 또 그것이 비록 틀렸다고 해도, 여러분이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대단하다고 하는 일부 경제학자들도 이미 똑같이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는 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미제스가 처했던 궁벽한 상황(cul de sac)에도 불구하고 작은 한 줌밖에 안되는 대학원생들이 그 세미나로부터 배출되어 오스트리아학파의 전통을 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그 세미나는 뉴욕 지역 전체에서 매주 미제스의 세미나를 수강하려고 모여든 미등록 학생들에게도 등대로 작용했다. 세미나를 마치고 지역 레스토랑으로의 자리를 이동해 뒷풀이를 하는 것도 유명했던 미제스 모임(Mises-kreis)이 비엔나 카페에서 개최되곤 했던 때를 최소한 희미하게나마 연상시키는 적지 않은 기쁨이었다. 미제스는 매혹적인 일화들과 통찰들을 끊임없이 쏟아 부었다. 우리는 이 일화들 속에서 그리고 미제스의 끼와 인간성 속에서 훨씬 더 고상하고 더 매력적인 때였던 옛 비엔나시절이 재현되고 있음을 보았다. 뉴욕 대학교에서 그의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는 특전을 얻은 우리들은, 미제스가 왜 단지 위대한 경제학자일 뿐 아니라 위대한 스승(teacher)이었는지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때 그가 처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제스는 자유, 반간섭주의 그리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 우호적이지 않은 세계 속에서 그것들의 외로운 등대 불빛으로서 봉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미 보아왔듯이, 미제스의 엄청난 생산성은 미국이라는 신세계에서도 계속 시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미국에는 미제스의 고전적 저작을 번역해내고 그가 계속 저술하는 저작들을 출판하고자 했던 충분한 수의 호의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미제스는 미국에서 우리 모두를 안내하고 영원한 영감을 부여한, 전후 리버테리언 운동의 초점이자 중심이었다. 학계에서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미제스의 책은 오늘날 사실상 모두 출판되었고, 점차 많은 숫자의 학생들과 추종자들이 그 책들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저항하던 경제학계에서조차, 지난 여러 해 동안 오스트리아학파와 미제스주의 전통을 환영하는 대학원 학생들과 젊은 교수들의 숫자가 점증하였다.

미국에서뿐만이 아니다. 충분하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유럽에서도 미제스는 자신의 예전 학생들과 동료들을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집단주의로부터 회군하고 최소한 부분적이나마 시장경제를 향하게 한 점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독에서는 미제스의 비엔나 시절 학생이었던 뢰프케(Wilhelm Röpke)가 독일이 집단주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장경제로 전환하는데 주요 지적 자극제로 활약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유시장경제분야에서 역전의 용사로서 미제스의 동지였던 에이나우디(Luigi Einaudi) 대통령이 나라를 전후의 사회주의로부터 떼어내는데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미제스 추종자이자 드골 장군의 주요 경제고문이었던 뤼프가 사실상 혼자 힘으로 프랑스가 금본위제로 돌아오게끔 하는 투쟁을 용감하게 해냈다.

마지막으로 찬사를 드릴만한 것은 미제스가 뉴욕 대학교에서 1969년 봄까지 쉼없이 매주 그의 세미나를 계속 수행했다는 점이야 말로 미제스가 억누를 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임을 보여준 사례라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교수 중 최고령으로 그가 은퇴했던 그 때 그의 나이 87세였는데, 그 나이에도 그는 활기차고 정력이 넘쳤다.

탈출구

사실상 미제스가 일생 내내 겪었던 그의 사상과 업적의 고립이, 급속하게 종결되는 듯한 희망적인 신호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최근 사회과학과 정치학에서는 잘못된 전향이 가진 내적 모순과 재앙적 결과들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27 [이 글이 쓰여진 1970년대 초]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정부들이 자신의 경제를 계획할 능력이 없음이 알려짐으로써 자유시장을 향한 움직임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과 서구세계에서는 케인스주의와 인플레이션주의자가 팔았던 만병통치약이 본질적 파산을 드러내는 중이다. ‘후기 케인스주의’적인 미국정부는, 경기후퇴 동안에조차도 지속되는, 그럼으로써 전통적 경제학의 지혜를 조롱하는, 마치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서 헛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케인스주의 이론의 명백한 결함과 함께, 케인스주의 정책의 파산은 케인스주의의 전체 체계를 점차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지출과 관료제 통치의 눈부신 낭비는, 정부가 생산적 일에 자원을 쓰든 혹은 피라미드같이 쓸데없는 일에 쓰든, [혹은 전쟁을 일으키는 데 쓰든, 유효수요만 일으킬 수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케인스의 유명한 격언을 현란하게 조명해준다. 국제통화질서의 무력한 파산으로 인해, 전세계의 케인스주의 정부들은, 불환지폐들에 대한 변동환율제나, 혹은 대외무역과 해외투자까지 불구로 만드는 외환통제에 의해 지탱되는 고정환율제와 같은, 만족스럽지 못한 해결책 사이를 오가며, 하나 이상의 위기를 다른 종류의 위기로 바꾸고 있다.

이론에서도 현실에서도, 국가주의와 간섭주의라는 더 큰 틀 안에 있는 케인스주의에 위기가 온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국가주의적인 현대 ‘리버럴리즘’이,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냈던 위기, 즉 민족국가 진영들 사이의 군사적 갈등에, 공교육의 재정적-교육적-인사적-구조적 갈등에, 그리고 영원해보이는 인플레이션과 심각한 몰수형 세금부과에 맞서 점증하는 대중적 저항사이의 충돌에 결코 대처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현대의 복지지향적 전쟁지향적 국가가 추구하는 복지와 전쟁 모두 도전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론의 영역에서, ‘과학적’ 기술관료 엘리트들이 우리를 자신들의 사회공학의 원료처럼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일도 점증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통해서] 미개발국이건 선진국이건 경제를 인위적으로 또 억지로 밀어붙여 ‘성장’시킬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사상에 대한 공격도 가속화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사상과 행동의 영역들 모두에서, 미제스가 일생을 걸고 싸워왔던 현대 국가주의가 비판받고 각성의 포화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온순하게 자칭 ‘주권자’인 지배자들의 법령이나 명령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가 실행가능하고 일관된 대안을 제대로 찾기 전에는 국가주의의 독소로부터 싸워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제스가 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을, 즉, 현대 세계를 강타해왔던 위기와 딜레마로부터의 탈출구를 미제스가 이미 제시했다는 점을 우리는 아직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92년이라는 대단히 긴 전 생애에 걸쳐, 미제스는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각성의 근거를 예측해왔고, 제시해왔으며, 우리가 따를 건설적인 대안적 길을 개척해왔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 길을 발견하고 환영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영역판 서문(1962)에서 미제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35년 전, 내가 한때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사회철학의 사상과 원리의 요점을 제시하려고 하였을 때, 나는 유럽의 민족들이 채택했던 정책이 명백하게 이끌고 갈 임박한 재앙에 대해 내가 한 설명이 막을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에 빠졌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루길 원했던 것은, 소수의 사려깊은 사람들에게 고전적 자유주의의 지향점에 대해서 알려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다가오는 붕괴 이후 자유의 정신을 부활시킬 길을 닦아주려는 것이 전부였다.28

뤼프는 미제스에 대한 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미제스는 합리적인 경제과학의 기초를 방어해냈다. …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는 인간이 귀를 즐겁게 하는 이론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는 이론을 선호하기 시작하는 순간 결실을 맺게 될, 부활의 씨앗을 뿌려왔다. 그날이 오면, 모든 경제학자는 미제스가 그들의 경탄과 감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29

국가주의의 붕괴와 파산이 정말로 진실의 재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신호, 미제스가 다가가길 희망했던 사려 깊은 그 소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는 신호가 증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자유의 정신이 부활하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 자유의 재탄생이야말로 고귀하고 위대했던 미제스라는 사람의 삶과 사유를 기념하는 금자탑이 될 것이다.


  1. 멩거의 《경제학의 기본원리》(Principles of Economics, (Glencoe, Ill.: The Free Press, 1950)를 보라. 이 책은 딩월(James Dingwall)과 호셀리츠(Bert F. Hoselitz)가 1950년에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2007년에 미제스 연구소에서 재출판하였다.(Auburn, Ala.: Ludwig von Mises Institute) [역주: 한국어판 역시 《국민경제학의 기본원리》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독일어 원본은 Grundsätze der Volkswirtschaftslehre (1871) 를 보라. 또한 멩거의 《경제학과 사회학의 문제들》(Problems of Economics and Sociology,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63)역시 참고하라. 이 책은 1963년에 녹(Francis J. Nock)이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독일어 원본은 Untersuchungen über die Methode der Socialwissenschaften und der Politischen Oekonomie insbesondere (1883) 이다.↩︎

  2. 뵘바베르크의 세 권 분량의 《자본과 이자》의 제1권인 《이자이론의 역사와 그 비판》(History and Critique of Interest Theories), 제2권인 《자본의 실증이론》(Positive Theory of Capital), 그리고 제3권인《자본과 이자에 관한 소고》(Further Essays on Capital and Interest)를 보라. 이 책들은 1959년에 헌케(George D. Huncke)와 센홀츠(Hans F. Sennholz)가 번역하여 출판한, 최초로 완전하게 영역된 뵘바베르크의 《자본과 이자》의 세권 분량 그리고 넷째 추가판이다. (Grove City, Penn.: Libertarian Press, 1959) 뵘바베르크의 명저의 독일어 원본은, Kapital und Kapitalzins (제1권 초판은 1884년, 제2권 초판은 1889년에 출판, 제3권 초판과 제1권의 완전개정판은 1914년 출판, 제2권과 제3권의 개정판은 1909년과 1912년에 출판, 뵘바베르크 사후에 제1권, 제2권, 제3권의 제3판은 1921년에 출판) 이다.↩︎

  3. Böhm-Bawerk, 《뵘바베르크 단편선》(Shorter Classics of Böhm-Bawerk, Grove City, Penn.: Libertarian Press, 1962)에 수록된 “가치의 궁극적 기준”(The Ultimate Standard of Value)을 보라.↩︎

  4. Böhm-Bawerk, 《자본과 이자》 제2권, 《자본의 실증이론》 pp.1–118를 보라.↩︎

  5. 배슨(H.E.Batson)이 1934년에 번역하였다. 《화폐 재건》(Monetary Reconstruction,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53)으로 재출판되었고, 경제교육재단(Foundation for Economics Education)이 1971년에도 제출판하였다. 필자의 서문들 달아 리버티 출판사(Liberty Press/Liberty Classics)에서 1989년에 또 재출판하였다.↩︎

  6. 역주: 다른 조건이 같다면, 소비재의 공급 증가는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사회적 혜택을 준다.↩︎

  7. 역주: 뵘바베르크의 자본이론에 따르면, 시장경제에서 자본구조의 변화는 기업가들에 의해 행해지고, 기업가들은 다양한 자본재들의 상대적인 가격 변화를 추적하면서 가장 큰 이윤을 챙길 수 있다고 (가장 소비자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방향으로 자본을 재배치한다. 미제스는 뵘바베르크의 자본이론을 응용하여, 정부의 인위적인 경제 간섭정책에 의해 야기된 신용조건의 변화는 자본을 소비자에게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성장과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방향으로 잘못 배치한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8. 역주: 미제스의 강연을 모은 책 《가면이 벗겨진 마르크스주의》(Marxism Unmasked, 1952)의 일곱 번째 강연에서, 미제스는 자신이 경기변동이론을 연구하기 전 까지 신용팽창의 문제점을 인정한 경제학자는 빅셀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빅셀은 자신의 1898년 저서 《이자와 가격》(Interest and Prices)에서 모든 경제에는 금융제도가 결정하는 은행이자율과, 실제 경제에서 행해지는 저축과 투자가 일치하는 자연이자율이 있고, 이 두 이자율 사이의 충돌이 호황과 파국의 경기변동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빅셀은 경기변동의 호황단계에서 소비재 생산에 필요한 생산요소가 줄어든다는 점을 지적하며 신용팽창이 생산체제에 미치는 영향력에도 주목하였다.↩︎

  9. 영어로는 베티나 그리브스(Bettina B. Greaves)에 의해 “화폐 안정화와 경기조정정책(Monetary Stablization and Cycilcal Policy)으로 번역되었고, 퍼시 그리브스(Percy L. Greaves, Jr.)가 편집한 Mises, 《화폐와 신용의 조작에 관하여》(On the Manipualtion of Money and Credit, Dobbs Ferry, N.Y.: Free Market Books, 1978)에 포함되었다. Mises, 《경제 위기의 원인: 대공황 전후의 논문들》(The Causes of the Economics Crisis: And other Essays Before and After the Great Depression, Auburn, Ala.: Ludwig von Mises Institute, 2006)에도 포함되어 재출판된 바 있다.↩︎

  10. 학생들은 미제스에게 약간의 세미나 비용을 지불하였다.↩︎

  11. Jacques Rueff, “미제스의 정열”(The Intrasigence of Ludwig von Mises), Mary Sennholz, ed. 《자유와 자유기업: 미제스 기념 논문집》(On Freedome and Free Enterprise: Essays in Honor of Ludwig von Mises, Princeton, N.J.: D. Van Nostrand, 1956), pp.15-16↩︎

  12. “Die Wirtschaftsrechnung im sozialistischen Gemeinwesen,” in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en 47 (1920): 86–121. 아들러(S. Adler)가 번역하고 하이에크의 서문을 포함하여 1935년에 《집단주의 경제계획: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Collectivist Economic Planning: Critical Studies of the Possibilities of Socialism, London: G. Routledge & Sons, 1935)의 일부로 출판되었다.↩︎

  13. (Indianapolis: Liberty Press/Liberty Classics, 1981). 《사회주의》의 독일어판은 1922년과 1932년에 출판되었고, 영어판은 카헤인(J. Kahane)이 번역하고 《계획된 혼돈》(Planned Chaos, Jonathan Cape, 1969.)을 1951년에 첨부하여 출판되었다.↩︎

  14. 《간섭주의 비판》은 센홀츠가 1977년에 번역하였고 ((New Rochelle, N.Y.: Arlington House, 1977) 미제스 연구소가 1996년에 재출판하였다. 독일어 원문은 1976년에 하이에크의 서문을 더하여 1976년에 재출판.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Germany))↩︎

  15. 《자유주의》는 라이코(Ralph Raico)가 고다드(Arthur Goddard)가 미제스의 검수하에 번역하여 1978년에 출판하였다. (Kansas City: Sheed Andrews and McMeel, 1978) 그 전인 1962년에 《자유롭고 번영하는 사회》(The Free and Prosperous Commonwealth)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 (Princeton, N.J.: D. Van Nostrand)↩︎

  16. 라이스만(George Reisman)이 번역하여 1960년에 출판하였다. (Princeton, N.J.: D. Van Nostrand, 1960) 2003년에 미제스 연구소에서 재출판하였다.↩︎

  17. (1957, 1969, 1976; New Rochelle, N.Y.: Arlington House, 1978); 미제스 연구소가 1986년과 2007년에 재출판하였다.↩︎

  18. Princeton, N.J.: D. Van Nostrand, 1962); second edition 1978 (Kansas City: Sheed Andrews and McMeel).↩︎

  19. (London: Macmillan, 1932).↩︎

  20.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49, 1963); 개정판인 제3판은 (Chicago: Henry Regnery, 1966); 학술판은 미제스 연구소에서 1998년과 2008년에 출판하였다.↩︎

  21. 역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이원주의와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한 미제스는, 비록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는 결정론이 옳을지라도 사회과학과 인간과학에서는 목적론이 옳고 자유의지를 마땅히 전제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인간이 실제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와 무관하게,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상적인 인간의 선택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다. 자연과학에서는 결정론이 타당하더라도, 사회과학에서는 자유의지론이 가능하고 또 옳은 것이라는 논증은, 이 책의 저자인 라스바드가 쓴 에세이 “과학의 역할”(The Mantle of Science)를 참고하라. 이 에세이는 미국 미제스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22. 베티나 그리브스가 번역하여 《화폐와 신용의 조작에 관하여》의 일부로 출판되었다. 2006년에 미제스 연구소가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는 이름으로 재출판하였다.↩︎

  23. 이것은 여전히 미제스주의 변동분석에 대한 가장 훌륭한 개요중 하나이다.《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이론》(The Austrian Theory of the Trade Cycle and Other Essays, New York: Center for Libertarian Studies, September 1978)에 출판된 Gottfried von Haberler, “Money and the Business Cycle,”를 보라. 1996년과 2003년에 미제스 연구소가 재출판하였다. [역주: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도 판매되고 있다.]↩︎

  24. Mises, 《기록과 회상》(Notes and Recollection, Grove City, Penn.: Libertarian Press, 1978)을 보라.↩︎

  25.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44); 1985년 재출판 (Grove City, Penn.: Libertarian Press).↩︎

  26.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44); 1983년 재출판 (Grove City, Penn.: Libertarian Press)↩︎

  27. 미제스가 널리 거부당하고 무시당한 데 대한 철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Murray N. Rothbar,d “미제스와 우리 시대의 패러다임”(Ludwig von Mises and the Paradigm for Our Age), 《현대》(Age) (1971년 가을호): pp.370-379를 보라.↩︎

  28. Mises, 《자유롭고 번영하는 사회》 pp.vi–vii.↩︎

  29. Jacques Rueff, “미제스의 정열”은 Mary Sennholz, ed., 《자유와 자유기업》 p. 16에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