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과 급진적 탈중앙화는 같은 것이다
Anarchism and Radical Decentralization Are the Same Thing

Ryan McMaken 1
번역: 한창헌 연구원 (미제스 코리아)

어떤 사람들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를 훨씬 급진적인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와 비교하면서, 미제스가 보다 온건한 인물이었으며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음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미제스가 자신의 저서 『자유주의』에서 급진적 탈중앙화(radical decentralization)에 대하여 언급한 점을 고려해본다면 큰 곤란을 마주하게 된다:

국가의 구성원이 되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결권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그것이 단일마을이든 한 지역전체든, 혹은 몇개의 연결 된 지역이든 간에 특정지역의 주민들이 자유롭게 실시된 국민투표에 의해 현재 속해있는 국가에 더 이상 속하기를 원치 않으며 그대신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고자 한다거나, 또는 다른 국가에 소속되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면, 그들의 희망은 존중되어져야 하며 그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혁명과 내란,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을 방지하는 단 하나의 현실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와 같은 자결권을 ‘국가의 자결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이 소속되기를 희망하는 국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미 경계를 정한 국가적 단위가 지니는 자결권이 아니라 각 지역주민이 지니는 자결권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자결권이란 국가의 자결권이 아니라 독립된 행정단위를 이룰 수 있을 만큼 큰 모든 지역주민들의 자결권이다. 만일 이와 같은 자결권을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당면한 기술적 고려사항들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한데, 기술적으로 보아 한 지역은 단일한 정부 단위로 통치되어야 하며 자결권의 행사 역시 국가를 다스리는 데 하나의 지역단위로 간주할 수 있을 만큼 큰 지역주민의 다수의사에 국한되어야 할 것이다.2

이에 대해서 안티-아나키스트들은 “잠깐 기다려봐, 미제스는 개개인에게 완전한 자결권을 부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얘기하잖아”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물론 간결하다: “그래서 뭐?”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미제스는 개인 수준의 분리독립(secession)을 이론적으로는 인정한다고 명확히 진술하고 있다. 단지 특정한 기술적 난점 때문에, 이것이 현실에 적용하기 힘들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누가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스스로 (미제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국가적 단위(national unit)가 되는 데에는 물론 실질적인 한계가 있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 독자적인 국가적 단위가 되기를 원한다는 생각에도 무리가 있다. 심지어 자유방임적인 사람들조차도 (탈퇴가 실질적인 옵션으로 계속 유지되는 한) 선출직 혹은 임명직 지도자들이 관리하는 도시, 협회, 연합 및 동맹 내에서 편안한 삶을 추구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러한 조직들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신뢰성있고 예측가능한 법률을 제공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고 상거래를 촉진할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레이 라스바드조차 이러한 주장을 부정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결국, 라스바드는 사람들이 항상 사회적 이유, 그리고 방위의 규모와 경제 생산의 비용을 절약하는 이점을 누리기 위해 서로 뭉쳐왔다는 것을 이해하였고, 역사와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점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아나키스트들이 늘상 가져왔던 문제의식은, 개별적인 인간이 자기만의 국가로서 존립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실질적 옵션이 제공되는 사회가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완전히 자발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체제를 선택하는 상황이 가능한가? 이것이 바로 아나키스트들이 제기하는 의문점이다.

우리는 더 많은 국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재의 선택권 부족(즉, 자결권의 결여)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은 모든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가 아니라, 기존의 국가를 점점 더 작은 국가로 분해하는 것이다. (모든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아무도 설득력 있게 설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것은 형식적인 분리독립 운동으로 대표되는 법을 준수하는(de jure) 방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무효화(nullification, 국가의 법을 따르는 것을 거부) 혹은 지역적 자율성(localized autonomy)을 요구하는 (법적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사실상의(de facto) 방식을 통해서 행해질 수도 있다.3

위에서 미제스가 설명한 것은 형식적인 투표와 선언을 통한 독립이지만, 실제로는 한스-헤르만 호페(Hans-Hermann Hoppe)가 자신의 저서 『자유주의자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수록된 연설문 “현대 국가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가”(How to Fight the Modern State)에서 제시한 바처럼 지역적인 무효화에 입각한 분리독립의 방법을 통해서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다른 기술적 조건 하에서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이 선호될 수 있다.

교조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아나키스트들은 종종 분리독립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지구의 지리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지나치게 일차원적인 견해일 뿐이다. 공해(international waters)나 남극, 혹은 지구 밖 우주에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지 않는 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은 언제나 기존의 국가를 희생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 예컨대 사르데냐섬의 독립 신생국가 사르디니아(Sardinia)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탈리아’라고 알려진 기존의 국가를 희생시켜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르디니아라는 새로운 국가가 ‘이탈리아’라고 알려진 기존 국가의 희생으로 창조된다면, 군사적인 면에서 이탈리아의 세금 수입과 영토가 줄어들게 되므로, 이탈리아의 국력은 필연적으로 약화될 것이다.

분리독립에는 국가가 약화되는 것 외에도 추가적인 이점이 있다. 개인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이전엔 오직 하나만 존재했던 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었지만, 이제 두 개의 국가를 가지게 되었다. 개인은 이제 생활방식, 이데올로기, 종교 및 인종 그리고 그 외에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더 많은 옵션을 보유하고 있다. 추가적인 분리독립이 계속 성취될수록, 각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점점 더 넓어질 것이다.

▲ 국가의 개수와 선택의 자유는 정비례한다.

국가가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아무런 선택지도 갖지 못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이 경우 독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선택지는 0과 같다. 즉, 전 지구적으로 단일한 국가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가장 강력한 국가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가장 완전하게 형성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는 전체 인구를 완전하고 전면적으로 독점한다. 국민들은 국가를 벗어날 수 없고, 심지어 이주를 통해서도 불가능하다. 그들이 이주할 수 있는 다른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반면에 수백, 수천, 심지어 수만개의 국가(혹은 다양한 정치체제)로 이루어진 세상은, 자신의 삶의 공간을 바꾸길 원하는 거주자들에게 수많은 선택지가 제공되는 것이다.

게다가, 더 작은 국가가 생겨나는 것은 더 많은 실질적 이주지를 의미한다. 근접성과 거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1000마일을 이주해야 탈출할 수 있는 국가는 50마일만 이주해도 탈출할 수 있는 국가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 거리, 이동의 현실적 제약은, 먼 지역으로 이주한다면 고향에 살고 있는 가족, 친구, 사랑하는 지인들과 더 이상 가까이 지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반나절 운전 거리에 있는 장소로 이주하는 것은 생활방식의 훨씬 더 적은 변화만을 필요로 한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보다 작은 영토보다 큰 영토를 선호한다. 큰 국가는 친구나 가족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주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만약 이주가 극단적으로 다른 문화와 언어로의 적응을 요구한다면, 유창하게 다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주는 더더욱 비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많은 국가는 언어를 강제적으로 독점하면서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스웨덴어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스웨덴에서 계속 살아야하며, 그리스어만 할 수 있다면 그리스에만 갇혀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제적인 공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영어의 경우에도, 영어 원어민들의 80퍼센트가 단 하나의 국가, 즉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어가 잠재적인 이민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명백하다.

문화와 언어 영역에 대한 국가의 독점을 제한적으로나마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민의 많은 현실적 제약을 감소시키거나 극복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이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하여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다면, 이는 다른 체제에서 살기를 원하는 잠재적인 미국인 이민자들에게 즉시 추가적인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그들이 언어와 문화가 극도로 유사한 새로운 정치적 관할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당연히, 미국이 더 작은 조각들로 더 많이 분해될수록 선택지의 숫자는 그만큼 늘어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에 계속 거주한다는 사실이 미국의 체제에서 살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증거가 되긴 어렵다. 미국의 규모와 범위를 고려할 때, 개인이 이주에 부담해야 하는 실질적 비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크다.)

다른 나라들이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지는 경우에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멕시코가 북멕시코와 남멕시코로 분리된다면, 멕시코인들은 멕시코 문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두 가지 정치적 선택지를 갖게될 것이다.

“유럽의 기적”(The European Miracle)이라는 칼럼에서, 랄프 라이코(Ralph Raico)는 문화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서로 다른 정치체제를 가진 지역들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한번 미제스가 『자유주의』에서 묘사한 세계를 상상해보자. 정치체제가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어 개인의 선택과 분리가 보다 잘 보장되어 있는 역동적인 세계를 상상해보자. 이러한 세계는 근본적으로 독점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체제를 함의한다. 오늘날의 거대국가 체제와 다르게 말이다.

국가 없는 세상에서도 선택은 제한적이다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무한한 수의 사회와 정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현존하는 거대국가들을 단계적으로 쪼개나가자는 우리의 주장마저도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사안에서도 무제한적 선택이 보장된 적은 없었다. 만약 우리가 살아갈 정부에 대한 무한한 선택지를 가지게된다면,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무제한적 선택의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항상 선택에 제한이 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있고, 시간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도 있으며, 타인의 자발적인 의지마저도 우리의 선택을 제한한다. 완전한 자유시장조차도, 나에게 (정확하게 원하는 가격에 정확하게 원하는 맛을 공급해주는) ‘완벽한’ 햄버거 가게를 제공하진 못한다. 비록 기업가들이 엄청나게 다양한 햄버거 메뉴를 제공해주겠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주어진 조건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논리가 어떤 체제에서 살 것인가를 선택할 때에도 적용된다. 설령 자신만의 개인적인 국가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희소성이라는 현실과 마주할 것이다. 규모의 경제, 노동의 분업, 그리고 계약 집행의 문제들이 자급자족적(autarkic)인 노력에 내재한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이 가능한 여러가지 옵션을 고려한 뒤, 어떤 유형의 국가 혹은 민간정부(civil government)의 일원으로 가입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국가(state)와 ‘민간정부’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나의 다른 글, Feudalism: A System of Private Law을 참조하라.)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때, 특정 유형의 체제는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최소한 대부분의 인구가 납득할 만한 비용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간섭받지 않는 시장(unhampered market)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비디오 가게에서 베타맥스(Betamax) 규격의 영화테이프를 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시장경제에서 자원은 가장 큰 수요를 가진 상품과 서비스에 투입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시장실패가 아니다. 희소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기업가들의 노력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미제스가 ‘완전한’ 아나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점은 옳다. 분리독립이라는 옵션이 항상 존재하는 미제스의 시나리오에서는 특정한 정치적 집단에 가입하는데 필요한 비용(stake)이 훨씬 더 적을 것이다. 미제스의 사례에서는 세금이 일종의 요금(fee)이 된다. 납세가 사실상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바라는 완벽한 법적 기관(jurisdiction)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도 세금은 자발적인 것이 된다. 소비자가 비록 자신이 상상했던 이상적인 상품을 찾을 수 없어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이 자발적인 구매라고 판단한다.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방위의 문제

미제스의 저서를 많이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외교 정책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중앙집권이 잘 이루어진 국가가 강력하고, 외교적으로도 영향력있다는 상식에 맞서, 미제스는 탈중앙화된 자유국가들이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보유할 수 있으며, 국제 사회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보다 효과적인 자주국방을 추구한다면, 국가의 체제를 자유롭게 하고 탈중앙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미제스의 견해를 어떤 맥락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자결권과 분리독립에 대해서, 분리독립을 원하는 어떤 지역들의 경우 “다른 국가에 속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미제스가 인지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에 소속되기를 원하는가? 강력한 정치적 연합의 구성원이 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국방 측면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국가 내에서는 대체로 같은 세율이 적용되거나 자유로운 거래가 보장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독립혁명 당시의 미국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계획된 국가였다. 즉, 초창기의 미국은 일종의 관세동맹이자 방위 연합체였으며, 특히 자발적인 가입국 유치를 통한 새로운 영토의 확장을 염두하였다. 실제로 1860년대 이전의 미국은 정치력 및 군사력이 연방의 회원국들(주)에게 크게 분산되어 있던, 매우 약한 국가였다.

회원권에 기초한 국가는 가능한가?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에 대한 국제관계학자 헨드릭 스프루이트(Hendrik Spruyt)의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한자동맹이 주권국가(sovereign state)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적 정치조직의 사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고 설명한다. 한자동맹은 “군대를 양성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사회적인 규제를 실시하며,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와 유사했지만, 기본적으로 회원권에 기초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국가와는 달리, 한자동맹은 구성원이 되기를 강요할 권한이 없었고(다만 가맹도시들을 추방할 수는 있었음), 수도를 설치하거나 관할 가맹도시들의 납세자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가맹도시 및 마을들은 종종 회의를 개최해 각각 한 표씩 나눠갖고 동맹의 정책과 목표에 대해 투표를 했다.

스프루이트가 설명한 바처럼, 도시와 마을들은 외세와 해적으로부터의 방위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자동맹의 이점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회원으로서 가입하고자 하였다. 또 한자동맹의 회원이 됨에 따라, 동맹 내의 다른 가맹도시들, 혹은 동맹 본부에서 외교적 수단을 활용해 무역을 할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해둔 동맹 밖의 도시들과도 교류를 더 원할하게 할 수 있었다.

요컨대, 한자동맹은 관할 가맹도시들의 내부 구조에 대한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고 국가적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동맹이 전면적으로 나서서 간섭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이 있었고, 그런 문제들은 가맹도시 차원에서 혹은 순수하게 지역적 수준에서 처리되었다.

외세 혹은 해적에 직접 대응하는 비용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는, 다른 정치적 조직의 회원으로 가맹하는 것이 명백한 이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자동맹의 경우, 동맹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더 많이 필요한 도시일수록 회원으로서 보다 활동적이었던 반면, 동맹의 서비스에 비교적 적은 필요성을 가진 도시들은 동맹의 일에 큰 관여를 하지 않았다. 한자동맹의 회원권 제도는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자발적이었으며, 각 지역의 자결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집단 방위와 교역의 촉진이라는 이점을 제공하는데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한자동맹이 이런 유형의 조직으로서 유일한 역사적 사례는 아니었지만, 분명 가장 영향력있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스프루이트 교수는 다른 도시 동맹(city-leagues)과 마찬가지로 한자동맹 역시 “명확하게 계층화된 지배구조와 형식적 영토 경계가 없었다.”

한자동맹이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적인 면에서 한자동맹은 주변의 구태적인 독점적 국가들과도 경쟁할 수 있었다. 한자동맹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존립할 수 있었고, 여러 경쟁 체제들을 능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선술했듯이 이런 유형의 정치체제로 한자동맹이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프루이트 교수는 스리랑카의 버거인(burghers)들이 결성한 도시 동맹, 1385년의 슈바벤-라인 동맹(Swabian-Rhenisch League) 등의 다른 예시도 제시한다.

물론 상호방위(mutual defense)라는 개념을 도시동맹이 고안한 것은 아니다. 정치가 처음 생겨났던 옛날 옛적부터 이 개념도 존재해왔다. 그러나 19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러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승리함에 따라, 한자동맹과 같은 자발적인 상호방위 비국가(voluntary mutual-defense non-states) 조직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도시 동맹들의 상호방위가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호방위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나키즘과 급진적 탈중앙화의 본질은 ‘선택’이다

법률 및 방위 서비스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제공되는 세상에서도, 무한한 선택지가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장을 국가보다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발적이고, 역동적이고, 융통성있으며,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협력에 부응해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제도가 바로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자발적인 사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능할 것이다. 미제스의 제안처럼 자유로운 결속과 분리독립을 통해서 형성될 수도 있고, 호페의 구상처럼 지역적인 무효화와 시민 불복종을 통해서 촉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우리는 국가의 강제에서 벗어나 협상, 타협, 중재, 합의를 통한 갈등 해결의 체제로 전환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을 경우 여전히 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강제적인 폭력이 전제되고, 합법적으로 여겨지며, 빈번하게 사용되는 국가의 통치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하다.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고, 사유재산을 더 철저히 존중하며, 더 많은 자결권을 제공하는 체제가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국가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독점력, 특권, 그리고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어떤 조직적 구조, 자료, 역사적 사건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를 의심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이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 성공적인 자결권 행사를 위한 조건을 형성할 수는 없다.4


  1. 라이언 맥메이큰은 미제스 연구소의 편집장이다. 콜로라도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였고, 콜로라도 주정부에서 10년 동안 주택 문제를 담당하는 경제학자로 근무하였다.↩︎

  2. 편집자주: 번역본 p.175-176↩︎

  3. 편집자주: 무효화에 입각한 분리독립 시도로는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간디의 불복종 운동을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법적으로는 독립 상태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독립의 지위를 누리는 사실상의 분리독립으로는 예전의 팔레스타인, 코소보, 혹은 현재의 서사하라, 소말릴랜드,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4. 편집자주: 국가가 아니라 시장과 민간사회의 힘이 더 뛰어남을 방증하는 조직적 구조(자유기업), 자료(경제학), 역사적 사건(정부실패와 시장의 기적을 보여주는 역사)이 있는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제도 개선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을 계몽하는 교육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