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학파와 자유주의의 수호자, 론 폴 (Ron Paul)

로널드 어니스트 폴(Ronald Ernest Paul)은 1976-1977년과 1979-1985년에 텍사스 제22 하원 선거구에서, 그리고 1997-2013년에 텍사스 제14 하원 선거구에서 미국 연방 하원의원으로 재직한 정치인·저술가·의사이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으며, 2008년과 2012년에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하면서 총 3차례 대선후보로 나섰다. 론 폴은 연방정부의 재정정책, 특히 연방준비제도, 조세 정책, 군산복합체, 그리고 마약과의 전쟁의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해왔으며, 애국법(PATRIOT Act)과 NSA 감시 프로그램을 비롯한 정부의 대규모 감시 및 도청 정책을 비난하였다.

론 폴은 1963-1968년 기간 동안 미국 공군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했다. 2010년에 켄터키 주에서 아들 랜드 폴(Rand Paul)이 미국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폴 부자는 상원과 하원에서 동시에 일하는 역사상 최초의 가족이 되었다. 그는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이고,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Rothbard)와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대표하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홍보하기 위해 많은 책을 저술했다.


초기 삶

론 폴은 1935년 8월 20일 피츠버그에서 작은 낙농회사를 운영하던 하워드 캐스퍼 폴(Howard Caspar Paul, 1904-1997)과 마거릿 폴(Magaret Paul, 1908-2001)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는 독일에서 이민을 왔고, 친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둘 다 독일계 미국인 1세대였다.

론 폴은 1957년에 게티스버그 대학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년도에 캐롤 웰스(Carol Wells)와 결혼했다. 듀크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1961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3-1965년까지 미국 공군 군의관으로 근무한 후, 1965-1968년에는 미국 공군 주방위군으로 옮겼다. 전역 후 폴과 그의 아내는 텍사스로 이주했고, 산부인과 의원을 개업했다.


초기 의회 경력 (1976-1985)

레지던트로 일하던 1960년대에, 론 폴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쓴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1994. 번역판: 김이석 역, 2006/2018)에 영향을 받아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아인 랜드(Ayn Rand)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스 센홀츠(Hans Sennholz) 및 머레이 라스바드와 아는 사이가 되었고, 그들의 경제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이 1971년 8월 15일에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를 끝내면서 금본위제를 폐지하자, 론 폴은 정치에 입문하기를 결심하고, 공화당 후보로서 미국 하원의회 선거에 출마하였다.

선거

1974년, 텍사스 제22 하원 선거구에 출마한 론 폴은 현직인 로버트 케이시(Robert R. Casey)에게 패배했다. 이후 제럴드 포드(Gerald Ford) 대통령이 케이시를 연방 해양 위원회에 임명했고, 공석이 된 제22 선거구를 위한 1976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론 폴은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는 고작 300표(0.2%) 차이로 민주당 소속의 로버트 개머지(Robert Gammage)에게 패배했다. 1978년의 재대결에서 개머지를 누르고 다시 당선되었으며, 1980년과 82년에도 재선되었다. 론 폴이 브라조리아 카운티(Brazoria County)에서 태어난 아기의 절반을 담당하였다는 점이 선거 운동에서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 해당 카운티에는 산부인과 의사가 두 명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다른 한 명의 의사도 론 폴의 동료였다.

임기

론 폴은 1976-1977, 1979-1985, 그리고 1997-2013 총 세 기간 동안 하원에서 근무했다.

임기 초기에 론 폴은 하원 은행 위원회에서 일했는데, 연방준비은행이 인플레이션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으며, 저출과 대출 위기를 초래한 은행의 부실경영에 반대했다. 1873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에서 유지된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1980년에는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과 공화당 대다수가 지지했던 징병 등록제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첫 임기 동안, 론 폴은 제한된 정부와 자유시장 경제학의 원칙을 홍보하기 위한 비영리 연구기관인 합리적 경제 및 교육 재단(the foundation for rational economics and education)을 설립했다. 1984년에는 코크 형제(Charles and David Koch)가 “더 적은 정부, 세금, 규제”(to fight for less government, lower taxes, and less regulation)를 위하여 설립한 보수주의 정치단체인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회의(citizens for a sound economy)의 초대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1984년에, 론 폴은 하원 송별연설에서 “일반적 복지에 대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헌신은 사라졌고, 특수한 이익관계만이 남아있다. … 진정으로 자유를 사랑하고 국가의 힘을 전적으로 혐오하는 사람이 워싱턴에서 일하게 된다면, 냉소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pecial interests have replaced the concern that the Founders had for general welfare… It’s difficult for one who loves true liberty and utterly detests the power of the state to come to Washington for a period of time and not leave a true cynic.)라고 불만을 표하며,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하원의원직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론 폴은 1년 전에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옮긴 필 그램(Phil Gramm)에게 경선에서 패배했다.


자유당 시절과 사업

1985–1997

198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실패를 경험한 후, 론 폴은 산부인과 의사로 복귀했고, 여러 사업을 시작했다. 론 폴은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류 락웰(Lew Rockwell)과 함께, 자신을 사장으로, 락웰을 부사장으로, 부인 캐롤을 비서로, 그리고 딸 로리 페이엇(Lori Pyeartt)을 회계사로 하여 영리기업인 론 폴 & 어소시에이트 주식회사(on Paul & Associates, In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론 폴 프리덤 리포트(Ron Paul Freedom Repeort)와 론 폴 서바이벌 리포트(Ron Paul Survival Report) 등 정치와 투자에 관한 소식지(newletters)를 발행했으며, 1993년까지 9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창출하였다.

1988년 대통령 선거

론 폴은 자유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1987년에 공화당을 떠났다. 그는 낙태에 반대했지만 자유당은 전통적으로 찬성해왔기 때문에, 그의 입후보를 두고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여하튼 1988년 대선에서, 론 폴은 자유당 소속으로 46개 주에서 43만 2179표(0.5%)를 받으며 3위를 차지했다.

론 폴에 따르면, 그의 1988년 대선 운동은 당선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투표 자격을 상관하지 않고, 학교와 각종 대학 단체에서 그의 자유주의(libertarianism) 사상을 전파하고자 했다: “우리는 이번 선거 못지않게 미래 세대에 관심이 많다. 이 아이들은 결국 투표를 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집에서 부모님께 자유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될지도 모른다.”(We’re just as interested in the future generation as this election. These kids will vote eventually, and maybe, just maybe, they’ll go home and talk to their parents.)

1992년 대선 출마도 검토했으나, 대신에 팻 뷰캐넌(Pat Buchanan)을 지지했으며, 현직인 조지 H.W.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에 맞서기 위한 뷰캐넌의 공화당 대선 캠프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후기 의회 경력 (1997-2013)

1996년 선거

1996년, 론 폴은 힘든 선거 운동 끝에 하원의회로 복귀했다. 그가 소식지를 발행할 시절과 관련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야구선수인 놀란 라이언(Nolan Ryan), 조세 운동가 겸 출판업자 스티브 포브스(Steve Forbes), 그리고 보수 논객 팻 뷰캐넌의 도움을 받아 민주당 소속의 변호사 찰스 모리스(Charles Morris)를 상대로 근소하게 승리했다.

2011년 7월 12일, 론 폴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위하여 하원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입법

론 폴이 2011년 12월까지, 22년 동안 의회에서 발의한 620개의 법안 중 단 한 개만이 통과되었는데, 이는 0.3%의 성공률이었다. 론 폴에 의해 유일하게 재정된 법률은, 연방 세관을 지역의 역사 보존 지구(a local historic preservation society)에 매각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였다. (H.R. 2121 in 2009)

위원회 활동

론 폴은 다음과 같은 위원회와 분과위원회에서 활동한 바 있다:

금융제도 위원회 (Committee on Financial Services)

    • 국내 화폐정책 및 기술 분과위원회 (Subcommittee on Domestic Monetary Policy and Technology), 112대 하원에서, 공화당 다수의 지지를 받아 2011년 1월부터 의장으로 재임함
    • 국제 화폐 및 무역 분과위원회 (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Monetary Policy and Trade)

국제관계 위원회 (Committee on Foreign Affairs)

    • 감시 및 조사 분과위원회 (Subcommittee on Oversight and Investigations)

론 폴의 하원 경력은 2013년 1월 3일, 113대 하원이 들어서면서 끝났다.


200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론 폴은 2007년 3월 12일 C-SPAN에서 200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를 지지하는 주요 정치인은 사실상 없었고, 그의 선거운동은 주류 언론매체에 의해 무시당했다. 하지만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해 교류하며, 론 폴은 맹렬히 충실하는 풀뿌리 조직을 양성할 수 있었다. 첫 번째 TV 경선 토론 직후에는 인터넷에서 가장 자주 검색되는 사람이 되었고, 모든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많은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했으며, 아이오와 코커스 직전인 2007년 4분기에는 그 어떤 공화당 후보 보다 더 많은 모금액을 기록하였다.

주류 거대 집단이 아닌 개인 기부자로부터의 막대한 선거 모금액, 최신 기술에 정통한(tech-savvy) 지지자들의 노력, 인터넷에서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론 폴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기 위한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론 폴은 1월 4일 아이오와 코커스(10%)와 1월 8일 뉴 햄프셔 예선(8%)에서 모두 5위를 차지했다. 롬니(Mitt Rommey, 51%)에 이어 2위(14%)를 차지한 네바다 코커스를 제외하면, 미시건 4위(6%), 사우스캐롤라이나 5위(4%), 플로리다 5위(3위) 등 1월 내내 그는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소위 ‘슈퍼 화요일’인 2월 5일에 접어들어도, 비록 북부인 노스다코타(21%, 3위)와 몬태나(25%, 2위)에서는 선전했지만, 대체로 3~6%의 득표율을 보이며 거의 모든 주에서 4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3월에 들자, 선두주자인 존 매케인(John McCain)은 경선에서 승리가 보장되는 수의 대의원을 확보했으며, 롬니와 허커비(Mike Huckabbe)는 공식적으로 사퇴했다. 매케인이 1,191명 이상의 대의원을 확보했던 것에 비해, 론 폴은 20-4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론 폴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퇴하지 않았고, 매케인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론 폴 지지자들은 주 당규에 대한 주 당대회, 정당 강령(the party platforms), 그리고 전당대회를 위한 대의원 선정을 놓고 기성 공화당원과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극적인 순간 중 하나는, 네바다의 주 지명대회에서 론 폴 지지자들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자, 네바다주 공화당 지도부가 이례적으로 대의원이 지명되기 전에 당대회를 조기 폐회시키고, 추후에 재소집한다고 발표한 사건이었다.

2008년 6월 12일, 론 폴은 마침내 공화당 경선을 포기했다. 이후 그는 제3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는데, 특정 주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 경선 과정 중 패배해도 제3당 선거운동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400만 달러의 선거기부금 중 일부는, 론 폴의 자유를 위한 운동(Ron Paul’s campaign’s for liberty)라는 새로운 정치운동 단체에 투자되었다.

공화당 후보에 대한 지지 거부

2008년 9월 10일 기자 회견에서, 론 폴은 4명의 제3당 후보에 대한 보편적 지지를 선언했다. 녹색당의 신시아 맥키니(Cynthia McKinney), 자유당의 밥 버(Bob Barr), 헌법당의 척 발드윈(Chuck Baldwin), 그리고 무소속인 랄프 네이더(Ralph Nader)가 그 대상이었다. 론 폴은 그들 모두가 균형예산을 표방하고, 해외 주둔 미군을 복귀시키고, 사생활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연방준비제도를 전면 검토하는 정책을 약속한 것이 그 이유라고 밝혔다. 또 론 폴은 두 주요 정당의 후보자인 매케인과 오바마(Barack Obama)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둘 중 누가 당선된다고 한들 지배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유권자가 양당 선거체제의 속임수에 기여하기 보다는, 그에 항의하고 제3당 후보를 지지하며 미국 선거에 변화를 가져오기를 촉구했다.

2주 뒤, 자유당의 밥 버는 론 폴이 대선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며 그를 비난했다. 이에 대해 론 폴은 헌법당의 척 발드윈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회답했는데, 발드윈은 미국 연방 소득세의 폐지, 금본위제로의 복귀, 해외 주둔 미군의 전면적 철수를 공약했으며, 반시온주의(anti-zionism)의 지지자였다.


201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론 폴은 201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에 관한 몇 개의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고, 2011년 4월에 공식적인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2011년 5월 5일 제1차 공화당 경선 토론회에 참여했으며, 2011년 5월 13일 ABC와의 인터뷰에서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2011년 에임스 여론조사(Ames straww poll)에서는 0.9% 차이로 1위를 놓치며 2위를 차지했다.

아이오와

론 폴은 2012년 1월 3일에 열린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총 12만 1503표 중 2만 6036표(21%)를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릭 샌토럼(Rick Santorum)과 밋 롬니가 각각 25%를 얻으며 공동 1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론 폴은 22명의 대의원의 지지를 확보하며 아이오와에서 승리했고, 밋 롬니는 5위에 머물렀다. 이어서 1월 10일에 열린 뉴 햄프셔 예선에서는 23%의 지지를 받으며 39%를 얻은 롬니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네바다

미셸 배크먼(Michele Bachman), 존 헌츠먼(Jon Huntsman), 그리고 릭 페리(Rick Perry)가 사퇴했음에도, 론 폴의 지지는 하락하였다. 1월 21일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13%를, 그리고 1월 31일 플로리다에서 7%를 받으며 그는 4위를 차지했다.

2월 4일, 네바다에서 18.8%의 득표율로 3위를 차지했다. 2월 7일에 콜로라도, 미주리, 그리고 미네소타에서 열린, 구속력 없는 세 개의 예선에서, 론 폴은 각각 13%와 12%를 차지하며 3위를, 그리고 27%를 차지하며 릭 샌토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5월 14일, 론 폴은 금융가 피터 틸(Peter Thiel)과 마크 스피츠나겔(Mark Spitznagel)의 재정 지원에도 불구하고, 자금 부족에 직면했고, 아직 투표를 하지 않은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등 11개의 주에서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미 투표한 주에서는 전당대회 대의원 확보를 위해 계속 노력하리라 발표했다.

론 폴을 방해하기 위한 부정행위 의혹

6월에 들어서, 론 폴을 지지하는 132명의 대의원이 미국 지방법원에 공화당 전국위원회와 전국 55개의 공화당 조직을 상대로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은 론 폴에게 표를 던지고 싶었으나, 롬니에게 투표하도록 강요받았고, 투표기와 투표용지 조작 및 위조 등을 통한 조직적인 부정선거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행해졌으며, 각 주별 당대회에서는 론 폴 지지자들의 참여 및 투표를 막기 위한 폭력 행사와 절차 관련 규정의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론 폴 캠프의 고문인 더그 위드(Doug Wead)는 이 소송에 지지를 표명했고, 론 폴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소송은 선거운동 전략의 일환이 아니며, 지지자들에게 소송을 제기하라고 조언한 적은 없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공화당 전당대회

전당대회 관계자들은, 론 폴의 정책 주장이 롬니에 의해 검토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론 폴에게 롬니에 대한 전폭적 지지선언을 요구했으나, 그는 전당대회에서의 발언을 거부했다. 론 폴에 따르면: “나는 그런 연설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지난 30년 동안 해왔던 모든 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나는 롬니를 대통령으로서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It wouldn’t be my speech… That would undo everything I’ve done in the last 30 years. I don’t fully endorse him for president.) 론 폴 지지자 및 대의원의 상당수는, 대의원 수를 줄이기 위해 새로이 채택된 규칙이 비주류 후보에게 불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항의 차원에서 전당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공화당 후보에 대한 지지 거부

2008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2012년에도 론 폴은 공화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정책에 있어서 롬니와 오바마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정치에 오랫동안 투신해왔는데, 공화당 행정부와 민주당 행정부 모두 근본적 차이는 없다고 믿는다. … 외교정책과 통화정책은 유지될 것이고, 실질적인 예산 삭감도 없을 것이다. 양대 정당 모두 이를 지지하기 때문이다.”(I’ve been in this business a long time and believe me there is essentially no difference from one administration to another no matter what the platforms… The foreign policy stays the same, the monetary policy stays the same, there’s no proposal for any real cuts and both parties support it.)


정당 정체성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는 내내 론 폴은 공화당원으로서 지역을 대표해왔다. 그러나 매우 많은 경우에 있어 공화당 지도부 및 다른 의원들에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거나,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곤 했다.

론 폴은 그가 21세였던 1956년 대선 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에 투표했으며, 1970년대 중반에 정치를 시작할 때 까지 공화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왔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의 대선 운동을 지지한 전국 최초의 선출직 공무원 중 한 명이었고, 1976년과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을 위해 열렬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막상 1980년에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론 폴은 머지 않아 레이건 정부의 정책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레이건 정부의 1981년 예산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공화당원이었다. 론 폴의 회고에 따르면,

1977년에 지미 카터는 380억 달러의 적자를 내는 예산안을 제안했고, 하원의 모든 공화당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리고 1981년, 레이건은 450억 달러의 적자예산을 제출했고, 공화당은 마치 디즈니랜드에서 살게 된 어린아이 마냥 환호했다.(in 1977, Jimmy Carter proposed a budget with a $38 billion deficit, and every Republican in the House voted against it. In 1981, Reagan proposed a budget with a $45 billion deficit – which turned out to be $113 billion – and Republicans were cheering his great victory. They were living in a storybook land.)

1984년 상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하원의원직을 사퇴하며 행한 연설에서, 론 폴은 양당의 정치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고, 그의 자유주의자 친구들에게 레이건을 지지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1987년에, 그의 탈당 선언문에서 매우 비판적으로 표현했듯, 론 폴은 공화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자 했었다:

1981년 이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공화당은 우리에게 급증하는 재정적자를 선사했고, 놀랍게도 국가 부채는 두 배로 늘었다. 균형예산을 수호한다는 정당이 통제하는 백악관과 상원이, 어떻게 이전까지의 모든 행정부의 기록을 합친 것 보다 더 큰 적자를 기록할 수 있겠는가? … 더 이상 공화당을 정부 규모를 줄이기 위한 세력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것이 레이건 시대의 메세지이다.(Since [1981] Ronald Reagan and the Republican Party have given us skyrocketing deficits, and astoundingly a doubled national debt. How is it that the party of balanced budgets, with control of the White House and Senate, accumulated red ink greater than all previous administrations put together? … There is no credibility left for the Republican Party as a force to reduce the size of government. That is the message of the Reagan years.)

한달 후, 론 폴은 1988년 대선의 자유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자유당 대선 운동에서, 론 폴은 레이건을 ‘극적인 실패’로 불렀으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레이건의 기록은 수치스럽다. 그는 전쟁을 시작했고, 법을 파괴했으며,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무기를 테러리스트에게 지원했으며, 미국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Reagan’s record is disgraceful. He starts wars, breaks the law, supplies terrorists with guns made at taxpayers’ expense and lies about it to the American people.)

2012년 대선 당시, 론 폴은 자신이 공화당에 속한 이유가 오로지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고 밝혔고, 공화당 주류의 입장을 따르기 보다는, 그들이 자신에게 동의하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론 폴은 만약 다른 경쟁자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될 경우, 지지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공화당 정책이 민주당과 다를 바가 없다면, 즉 외교정책의 변화, 예산 삭감, 연준 감시, 그리고 통화정책의 재검토 등 실질적인 정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을 지지할 수 없다.(If the policies of the Republican Party are the same as the Democrat Party and they don’t want to change anything on foreign policy, they don’t want to cut anything, they don’t want to audit the Fed and find out about monetary policy, they don’t want to have actual change in government, that is a problem for me.)


정치적 입장

론 폴은 보수주의자(conservative) 혹은 자유주의자(libertarian 로 불리곤 한다. 그의 정치철학은 “미국 정부의 적합한 역할은 국토 방위, 민사분쟁 해결을 위한 법원제도, 그리고 무력 혹은 사기에 맞선 형사제도 뿐이고, 그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제공해선 안된다“는 확신에 기초한다. 그의 대표적인 별멍은 Dr. 아니오(Dr. No) 인데, 이는 그의 의학 학위와 “헌법에 의해 승인될 수 없는 그 어떤 입법에도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는 개인적 신념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국방

론 폴은 비간섭주의자(noninterventionist) 외교정책을 옹호해왔다. 그는 국가 주권의 수호를 위하여 국제연합(UN)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부터의 탈퇴를 지지한다. 1997년과 2009년에 제출한 미국 주권회복법(American sovereignty restoration act)에서, 론 폴은 국제연합으로부터의 미국의 탈퇴와 모든 활동의 중지를 제안했다. 외교정책에 대한 론 폴의 입장은 곧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다른 나라와의 동맹을 포함하여 모든 간섭을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한국, 일본, 그리고 유럽 등에 주둔한 미군의 전면적 철수 및 해외 원조의 완전한 중단을 지지한다.

론 폴은 9.11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서 대테러 군사력 사용권 법안(the Authorization for Use of Military Force Against Terrorists)에 찬성표를 던졌으나. 특정 테러리스트를 대상으로 한 사략 허가증(Letters of Marque and Reprisal) 발행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대안책을 제시하였다. 이라크 전쟁 및 잠재적인 이란 전쟁에 반대한 론 폴은, 신보수주의/네오콘(neo-conservatism)에 근거한 미국 외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전쟁이 결국 9.11 테러와 유사한 보복조치를 유발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국내 정책

론 폴은 무기를 소지하고 보유할 권리와 정치적 억류자를 위한 인신보호의 권리 등의 헌법적 권리를 지지한다. 따라서 그는 애국법, 연방정부의 고문, 대통령의 절대적인 행정 집행권(presidential autonomy, unitary executive theory), 주민등록증, 영장없는 국내 감청, 그리고 징병제에 반대한다. 또한 그는 종교와 국가의 분리 원칙이 현행 법원 제도에 의해 심각하게 악용되고 있다고 믿는다:

대법원은 교회와 국가를 구별하겠다는 명목 하에, 연방정부가 시민들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고 박탈할 수 있도록 하가하였다.(In case after case, the Supreme Court has used the infamous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metaphor to uphold court decisions that allow the federal government to intrude upon and deprive citizens of their religious liberty.)

그는 연방의 마약과의 전쟁 역시 반대한다. 의학용 마리화나를 포함한 마약 물질의 규제 여부는 주정부의 권한이다.

경제

론 폴은 소득제와 연방준비제도를 폐지하고자 많은 법률을 하원에 제안해왔다.

1999년, 2000년, 2001년, 그리고 2007년에, 론 폴은 제16차 수정헌법 개정을 취소하여 소득세, 재산세, 증여세를 폐지하고, 미국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오직 헌법상에서 허가된 사업 분야만 관여할 수 있다. (H.J.Res. 23)

1983년에는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1999년과 2009년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중앙은행을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H.R. 833, H.R. 1148)

1999년에 제출된 시장과정 복원법(Market process restoration act of 1999)은 미국의 독점금지법(anti-trust law)의 폐지를 주장한다. (H.R. 1789)

론 폴은 자유무역을 지지한다. 그러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와 세계무역기구(WTO)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관리무역(managed trade)에 불과하며, 미국이 이로부터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9년에, 론 폴은 하원에서 WTO로부터의 탈퇴를 제안했다. 2010년에는 한미 FTA가 자유무역을 위반한다면서 반대 운동을 벌였다.

론 폴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지지자로서, 이를 주제로 하여 6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머레이 라스바드, 그리고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초상화를 하원의원 사무실에 걸어두었다. 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론 폴은 거의 모든 새로운 정부지출, 법안 발의(initiatives), 그리고 세금에 반대해왔다. 1995-97년 동안 하원에서 발의된 법안의 3분의 2에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는 세금을 절대로 인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적자예산에 결코 찬성투표를 한 적이 없다. 2003년에, 론 폴은 연방정부의 지출이 2000년 회계년도 수준으로 축소된다면 개인 소득세를 폐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정부의 재정 조달은 주로 소비세와 비보호적(non-protectionist) 관세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연방정부 기관이 불필요한 관료제도에 불과하며,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1년 10월, 론 폴은 미국 복원계획(plan to restore america)이라는 이름의 2013년 연방 예산안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론 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 될 경우, 첫해에 1조 달러 규모의 연방예산 삭감을 시작으로 하여, 3년 이내로 균형예산에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산 삭감:

    • 미국 연방정부의 5개 기관, 즉 교육부, 내무부, 상업부, 에너지부, 그리고 주택 및 도시개발부의 폐지
    • 연방항공국(FAA)과 교통안전국(TSA)의 민영화
    • 연방 공무원 10% 감축
    • 2006년 수준으로의 예산 삭감
    • 식품의약품안전청 예산 40% 삭감
    • 질병관리센터 예산 20% 삭감
    • 국토안보부 예산 20% 삭감
    • 국립보건원 예산 20% 삭감
    • 환경보호국 예산 30% 삭감
    • 약물남용 및 정신건광관리국 예산 20% 삭감
    • 국방부 예산 15% 삭감 및 모든 해외 전쟁 예산 제거
    • 그외 2006년 수준으로 모든 연방기관 예산 동결
    • 외국 원조 전면적 폐지
    • 국제 마약 방지 프로그램 폐지
    • 연방 여행 예산의 대폭 삭감
    • 국제기구 및 위원회에서의 탈퇴
    • 의료보험 및 그외 연방-주 공동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주정부 권한으로 전환

수입구조 개혁:

    • 법인세 최고율을 35%에서 15%로 삭감
    • 기업이 추가 과세 없이 자본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허용
    • 부시 행정부의 감세정책을 영구적 연장
    • 배당세 및 차익세 폐지
    • 재산세 및 증여세 폐지
    • 저축세 폐지
    • 연방토지 및 연방자산 전량 매각

기타 경제규제 개혁:

    • 오바마케어 폐지, 도드-프랭크 및 새번스-옥슬리 금융제도 및 은행규제법 폐지
    • 역대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해 제정된 ‘과중한’ 경제규제 폐지
    • 연방준비은행에 대한 전면적 검토
    • 강한 달러와 인플레이션의 안정화를 위한 경쟁통화법 모색
    • 대통령 연봉을 40만 달러에서 3만 9천 달러 수준(미국 노동자의 중위 소득)으로 삭감하며, 의원의 급여와 특권 역시 삭감됨

인플레이션과 연방준비제도

론 폴은 지속적으로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대해 경고해왔고, 1981년까지 유지되었던 금본위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해왔다. 1999년부터, 론 폴은 연방준비제도를 1년내로 폐지하는 법안을 계속하여 제출하기 시작했다.

론 폴은 부분지급준비금제도(frational-reserve banking)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자유주의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불환화폐(fiat money)와 인플레이션에 반대한다. 론 폴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은 숨겨진 세금,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다. 연방준비제도는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주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는데, 돈이 더 많이 유통된다면 기존에 사람들이 보유한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상품에 대해 더 높은 가격을 부담하게 된다. 그는 “오늘날의 1달러는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된 1913년의 1달러에 비해 고작 4센트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a dollar today is worth 4 cents compared to a dollar in 1913 when the Federal Reserve got in.)라고 말하며, 상품본위(commodity backing)에 근거하지 않고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곧 가짜로 돈을 찍어내는 능력이자 화폐가치 잠식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1982년에, 론 폴은 미국 금 위원회(U.S. Gold Commission) 창설의 주역이었고, 많은 대중 연설에서 현행 은행 제도의 지배적 성격을 우려하며, 금과 은을 화폐로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상품본위화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해왔다. 상품본위화폐는 특정 상품의 가치에 화폐가치를 고정하기 때문에, 불환화폐에 비하여 안정적이다.

론 폴은 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이론을 근거로 하여 연준을 끝내라(End the Fed)고 주장한다. 즉 연방준비제도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유발하는 근본적 원인으로서, 개인 저축의 가치를 잠식하며, 경제에 호황(Boom)과 불황(Dust)의 순환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론 폴은 자유시장이 금리와 통화 공급을 결정할 때 경제의 변동성이 줄어든다고 믿는다. 수 많은 연설에서, 그는 중앙은행이 많은 정부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자금의 원천이기 때문에, 의원들이 이를 폐지하는 걸 꺼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환경

론 폴은 자유시장 환경보호주의자이고, 사유재산권의 확대가 환경보호와 오염방지에 가장 탁월하다고 주장한다. 론 폴은 환경파괴자들이 결코 기소 면책특권을 부여받아선 안되는 침략자로 간주하고, 사유재산권을 철저하게 적용한다면, 환경파괴자 혹은 기업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물을 수 있으며, 오염비용이 증가하게 되기 때문에 환경오염이 줄어든다고 주장한다. 즉 사유재산권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환경보호의 실패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론 폴은 매우 오랫 동안 연방정부가 소유한 토지를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의 ‘미국 복원계획’은, 내무부의 폐쇄 외에도 2013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공원을 포함하여 최소 400억 달러 상당의 연방토지 및 자산의 매각을 제안했다.

건강보험

대부분의 미국인이 믿는 것과 달리, 론 폴은 의료권(access to health care)은 권리가 아니고, 의료가격은 자유시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정부는 건강보험의 제공에 있어 어떤 사업도 해선 안된다. 정부가 간섭하면 비용은 증가하고, 서비스의 질은 하락한다.

론 폴은 메디케어(Meicare, 노인 및 장애인에 대한 연방 의료보험)와 메디케이드(Medicaid,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출자한 저소득층 의료보험)의 궁극적 폐지를 요구하고, 2010년에 제정된 오바마케어 의료보험 개혁법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그는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의료보험이 위헌적이고, 지속불가능한 예산을 필요하기 때문에 정부를 파산으로 몰고간다고 주장했다.

또 론 폴은 정부가 규제를 통해서 의료 비용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의약품 및 식이보조제의 제조·판매에 규제를 부과하고, 의사를 포함한 의료행위를 관리하면서 의료 서비스 시장의 경쟁을 저해한다.

교육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론 폴은 모든 공립학교를 폐교하고자 했으나, 2008년부터는 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론 폴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교육에 있어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이는 대법원의 판결과 무관하게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론 폴에 따르면, 증가하는 교육비용과 중퇴자수, 심각해지는 학교폭력과 마약사용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의 질을 향상하는 최선의 방법은 곧 학교에 대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줄이고, 학교 커리큘럼, 자금, 그리고 행정 등에 대한 통제권을 부모와 지역 공동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2011년 10월에 발표한 그의 ‘미국 복원계획’에 따르면, 그가 집권할 경우 교육부는 즉각적으로 폐지된다. 이 과정에서, 대학교 등록금 보조를 비롯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은 임시로 다른 부서에서 관할하게 되나, 최종적으로는 마찬가지로 완전히 폐지된다.

이민

론 폴은 국경 보안 강화에 찬성하고, 불법 이민자들을 위한 복지계획, 출생지주의 시민권, 그리고 불법이민자에 대한 사면 및 시민권 부여(amnesty)에 반대한다.

탈퇴

론 폴은 미국으로부터의 탈퇴가 ‘매우 중요한 미국의 원칙’이며, 만약 연방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잠식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국에서 독립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넷

론 폴은 인터넷이 정부규제와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총기규제

론 폴은 총기소유에 대한 수정헌법 2조의 목적이, 단순히 사냥권 혹은 자위권의 옹호에 있지 않고, 정부의 횡포를 시민이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점에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시민이 기관총 등 자동화된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포함하여, 그 어떤 총기규제도 반대한다. 총기규제 혹은 금지는, 위험한 범죄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오직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에게만 피해를 줄 뿐이다. 학교의 총기난사와 비행기 납치를 비롯한 관련 사건들이 결국 자위권 박탈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론 폴은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유하고, 은닉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낙태

론 폴은 자신을 강력한 낙태반대주의자로 정의한다. 그는 낙태에 관한 의료적 의사결정에 대한 규제 혹은 금지가 연방정부가 아니라 주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문제

제9차 및 제10차 수정헌법을 인용하며, 론 폴은 헌법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규제는 주정부의 권리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사형제도, 교육, 결혼 등에 대해서 연방정부는 권한이 없다. 동성결혼에 대한 질문에서, 론 폴은 결혼제도의 민영화를 지지했다.

LGBT 권리에 관하여, 론 폴은 ‘게이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LGBT 권리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론 폴은 1964년에 제정된 시민권 법이 노동시장에 대한 연방정부의 위헌적 간섭과 개인의 자유 침해를 허가했을 뿐, 인종차별문제를 개선하는 데 어떤 기여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소수인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에도 반대한다. 2007년 9월 공화당 대선 후보 1차 토론회에서, 15명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체에서 고용주의 성적 성향에 근거한 채용 차별을 금지하는 고용차별금지법에 대통령으로서의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론 폴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민간 부분에 대한 어떠한 차별금지법도 거부하는데, 이는 결사의 자유에 대한 그의 믿음과 일치한다.

2007년에, 론 폴은 1969년에 제정된 연방 증오범죄 방지법이 피해자의 실제적 혹은 인지적 성별(gender), 성적 성향, 성적 정체성, 혹은 장애를 증오하여 발생한 범죄까지 관할할 수 있도록 확대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그는 증오범죄 방지법이 수정헌법 1조와 10조를 위반하고 있으며, 이는 연방정부가 아니라 개별 주정부의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on_Paul

https://en.wikipedia.org/wiki/Political_positions_of_Ron_Paul

 

번역 및 편집 : 김경훈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