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역사 및 주요 인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역사는 15세기 스페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세기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들이 크게 주목받은 관계로 학파의 이름은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 및 발라(Leon Walras)와 함께 소위 경제학의 한계혁명(the marginal revolution)을 일으킨 멩거(Carl Menger)가 1871년작 저서 <경제학의 기본원리>(Principles of Economics, 1987. 번역판: 국민경제학의 기본원리, 민경국 역)에서 주관가치론(the subjective theory of value)을 주창하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학파의 모습이 드러났다고 인정받는다.

오스트리아학파의 다른초기 이론가로는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그리고 프리드리히 폰 비저(Friedrich von Wieser)가 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는 더 이상 오스트리아 출신일 필요가 없으며, 이 용어는 경제학자의 국적이 아니라 특정 경제사상의 지지자들을 일컫는 것으로 완전히 의미가 대체되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선구자들

오레슴의 니콜라오(Nicole Oresme)와 같은 초기 사상가의 뛰어난 공헌을 고려하며 오스트리아학파의 뿌리를 추적한다면,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를 추종하는 스콜라학파(Scholasticism), 특히 스페인의 살라망카 대학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후기 스콜라학자들은 최초의 근대적 경제 이론을 확립하고, 오늘날의 관점과 동일한 자유무역과 재산권을 주장하였다. 몇 세대에 걸쳐 연구를 계속하며 그들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 인플레이션의 원인, 환율의 작동, 그리고 경제적 가치의 주관적 본성을 발견하고 설명했다. 물론 그들은 재산권, 그리고 계약과 거래의 자유를 옹호했다. 외르크 귀도 휠스만이 <화폐생산의 윤리학>(Ethics of Money Production, 2007.)에서 말한 바를 인용해보자면, “오스트리안은 독립변수(autonomous variable) 따위를 다루는 경제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콜라학파의 신념을 계승한다. 경제적 문제는 더 큰 사회적 현상의 한 측면이다. 경제적 문제를 그런 맥락에서 분리하기 보다는, 더 큰 배경을 고려하여 분석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p.12)

경제학에 대한 최초의 일반 이론인 <상업의 본질에 대한 논고>(Essay on the Name of Commerce)는 1730년, 아일랜드 태생의 프랑스인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에 의해 쓰여졌다. 그는 경제학을 독립적인 연구 영역으로 보고, 사고실험을 통하여 가격의 형성을 설명했다. 특히 캉티용은 시장을 기업가적 과정으로 이해했고, 오스트리아학파의 화폐창출이론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화폐는 단계적인 방식으로 경제에 진입하며 가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친시장적인 프랑스 귀족이자 앙시앵 레짐에서 재무장관으로 근무했던, 유명한 중농주의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가 캉티용의 뒤를 이었다. 그의 경제학 저술은 매우 적지만, 심오하다. <가치와 화폐>(Value and Money)에서 튀르고는 화폐의 기원과 경제적 선택의 본질을 명확하게 기술했다: 선택은 개인 선호도의 주관적 순위를 반영한다. 또 그는 후기 고전파 경제학을 당혹스럽게 만든 유명한 ‘다이아몬드-물 역설’을 해결하고, ‘수확체감의 법칙’을 분명히 세웠으며, —후기 스콜라학파의 난점이었던— 고리금지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그는 물론 고전적 자유주의자였고, 정부와 연결된 산업의 모든 특권이 폐지될 필요를 주장했다.

튀르고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위대한 프랑스 경제학 전통의 지적인 아버지와 같았다. 이 전통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물론 장-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와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édéric Bastiat)였다. 세는 경제학 방법론에 대해 깊이 연구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그는 경제학이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보편적 사실—예컨대, 욕구는 무한하고, 수단은 희소하다.—의 언어적 해명과 그 논리적 함축을 파악하는 점에 있음을 깨달았다.

세는 자원가격의 생산성 이론, 노동분업에 있어 자본의 역할, 그리고 그 유명한 ‘세의 법칙’, 즉 만약 자유시장에서 가격이 자생적으로 조정되도록 허용한다면, 과잉생산이나 과소소비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세와 바스티아는 자유방임주의와 산업혁명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자유시장 저널리스트로서 바스티아는, 비물질적 서비스도 물질적 상품과 정확히 동일한 경제학 법칙을 적용받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경제적 우화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설파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추후에 헨리 해즐릿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깨진 유리창의 오류’가 있다.

오스트리아학파 선구자들의 전통이 이론적으로 대단히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영국학파가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로 승리했다. 경제학의 영국 전통—객관적 비용과 노동가치론—은 결국 자본주의 착취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교리의 등장을 유도하고 말았다.


초기의 오스트리아학파

오스트리아학파의 창시자: 카를 멩거(Carl Menger)

지배적인 영국 전통은 1871년 카를 멩거의 <경제학의 기본원리>가 발표되면서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멩거 교수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설립자로서, 스콜라학파-프랑스 경제학의 접근방식을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확고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멩거 교수는 레옹 발라와 스탠리 제본스와 함게 경제적 가치의 주관적 기초를 설명하고, 한계효용설(개인이 소유한 상품의 단위가 많을 수록, 새로운 단위의 가치는 줄어든다)을 처음으로 온전하게 제시했다. 또한 멩거는 화폐가 자유시장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여주었는데, 그에 따르면 소비가 아니라 다른 상품과의 거래를 목적으로 가장 시장성이 높은 상품이 필요로 할 때 화폐가 발생한다.

멩거 교수의 저서는 경제과학의 역사에 있서 ‘한계주의자 혁명’의 기둥이었다. 미제스가 자신을 ‘경제학자로 만들었다’고 그를 칭송할 때, 미제스는 물론 멩거의 화폐이론과 가격이론뿐만 아니라 경제학 이론 자체에 대한 접근 역시 의미했다. 멩거는 오스트리아학파 선구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자유주의자이자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였으며, 경제학을 개인적 선택을 다루는 과학으로 보았다. <경제학의 기본원리>로부터 12년이 지난 후, 그의 연구는 독일 역사학파와의 전투에 직면했다. 역사학파는 이론을 거부하고 경제학의 정체성이 오직 국가를 위한 데이터의 축적에만 있다고 보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변호하기 위해 언제나 매우 큰 예외를 마련해두었고, 비엔나 대학교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멩거와 그의 추종자들을 멸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학파’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결국 이 용어가 고착화되어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멩거는 비엔나 대학교의 경제학과 교수로서, 불우한 짦은 삶을 살았던 루돌프 황태자(Crown Prince Rudolf)의 가정교사로 종사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결정적인 업적은, 연역적 논리(deductive logic)에 기초한 인간행동의 과학(the science of human action)으로서 경제학을 복권하였고, 그의 후계 이론가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그의 제자인 프리드리히 폰 비저(Friedrich von Wieser)는 훗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후기 저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멩거의 저작은 여전히 경제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매우 훌륭한 설명으로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학파 자본론의 창시자: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인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종사했던 멩거의 숭배자 겸 추종자인 뵘-바베르크는 경제학에 대한 멩거의 설명을 계승하고, 재구성하였으며, 가치, 가격, 자본, 그리고 이자 등 다양한 주제에 응용하였다. 1884년에 출판된 그의 <이자이론의 역사와 비판>(History and Critique of Interest Theories)은 이자율이 인위적인 구성요소라는 경제사상사의 전통적인 오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이 사실 시장의 자생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임을 명확하게 밝힌 저서였다. 즉 이자는 사람들이 현재의 소비를 장래의 소비보다 더 선호한다는 보편적 사실인 시간선호의 반영이다.—추후에 프랭크 패터(Frank Fetter)에 의해 이 견해는 확장되고 방어된다.—

뵘-바베르크의 <자본의 실증이론>(Positive Theory of Capital, 1889.)은 정상적 사업이익률이 곧 이자율임을 증명했다. 자본가들은 돈을 저축하고, 노동자에게 지불하고, 최종적으로 상품이 판매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모든 자본의 성질이 결코 동일하지 않으며, 그 구조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동시에 시간적 차원(time dimension)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경제의 성장은, 자본 투자의 증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의 장기화 역시 의미한다는 것이다.

뵘-바베르크는 자본의 착취이론을 주제로 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오랜 세월 동안 설전을 벌였고,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기 훨씬 이전에 이미 사회주의 자본이론과 임금이론을 반박했다. 뵘-바베르크는 추후에 미제스의 비엔나 세미나의 원형이 되는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뵘-바베르크는 경제과학의 변하지 않는 사실에 기초한 경제정책을 꾸리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간섭주의가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시장경제에 대한 공격임을 천명하였다. 합스부르크 왕정이 끝나갈 무렵에는 재무장관을 무려 세 번이나 역임하며 균형 예산, 건전한 화폐, 금본위 제도, 자유무역, 그리고 수출 보조금과 독점 특권의 폐지를 위해 투쟁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

오스트리아학파 3대 거장: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경제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통합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오스트리아학파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이 학파가 영어권 세계로 진출할 큰 교두보를 마련한 것은 물론 뵘-바베르크의 연구와 저술 덕택이었다. 그러나 뵘-바베르크가 멩거의 분석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던 한 영역이 있는데, 바로 ‘미시’와 ‘거시’ 접근법의 교차점이라 할 수 있는 화폐이론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상공회의소의 경제자문관으로 근무하던 젊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이 분야에 도전하고자 했다.

미제스의 연구 결과는 <화폐와 신용의 이론>(The Theory of Money and Credit, 1912. 번역판: 김이석 역, 2011)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그는 한계효용 이론이 화폐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고, 그의 유명한 회귀정리(regression theorem)를 제시하며 화폐가 언제나 시장에서 생겨난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영국 화폐학파, 크누트 빅셀(Knut Wicksell)의 이자이론, 그리고 뵘-바베르크의 생산구조 이론(theory of the structure of production)을 참고하여,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학파 경기변동이론(Austrian theory of the busniess cycle)의 넓은 윤곽을 제시했다. 1년 후, 미제스는 비엔나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뵘-바베르크의 세미나는 두 학기를 내내 미제스의 저서를 두고 토론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미제스의 경력은 4년간 중단되었다. 그는 그 중 3년을 포병 장교로, 1년을 경제정보부 참모로 보냈다. 1919년 전쟁이 끝날무렵, 그는 당시에 심히 분열된 오스트리아 제국 내 소수민족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유를 지지하고, 전쟁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한 역작 <민족, 국가, 경제>(Nation, State, and Economy)를 출판하였다. 한편, 미제스의 화폐이론은 체이스 내셔널 은행의 경제학자 벤자민 앤더슨(Benjamin M. Anderson, Jr.)에 의해 미국에서 주목을 받았다.—미제스의 책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에 의해 무시당했는데, 그는 추후에 자신이 독일어를 읽을 수 없음을 시인했다.—

전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정부의 주요 이론가는 마르크스주의자인 오토 바우어(Otto Bauer) 였다. 미제스는 그를 뵘-바베르크 세미나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 매일 밤 마다 그에게 경제학을 설명하며 그가 결국 볼셰비키식 정책 추진을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미제스를 용서하지 않았고, 그와 학계 정치판에서 일종의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미제스가 대학에서 유급 교수직을 얻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미제스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사회주의 그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위대한 논문,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경제계산”(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을 1920년에 발표했으며, 이후 2년간 이 논문의 내용을 확장, 발전시키면서 희대의 명저 <사회주의>(Socialism, 1922. 번역판: 박종운 역, 2015)를 저술해냈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이나 자본재의 교환의 허가하지 않으므로, 자원이 가장 시급하게 사용되어야 할 용도를 찾을 방도가 없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가 완전한 혼란과 문명의 종말을 초래하리라 예측했다.

미제스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는데, 사회주의자들이 그때 까지 그 문제를 언제나 회피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학파와 사회주의 사이의 경제계산논쟁(economic calculation debate)은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고, 1989년 사회주의 권역이 붕괴할 때 까지 주류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자유시장을 대표한 미제스의 주장은 하이에크,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 그리고 라이오넬 로빈스(Lionel Robbins) 등을 사회주의로부터 전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외에, 그는 자신의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유명한 사설세미나(Privatseminar)를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프린츠 마흐루프(Fritz Machlup), 고트프리트 폰 하벌러(Gottfried von Haberler), 오스카르 모르겐스테른(Oskar Morgenstern),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 리하르트 폰 슈트리글(Richard von Strigl), 에리히 푀겔린(Erich Voegelin), 그리고 파울 로젠슈타인-로단(Paul Rosenstein-Rodan)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많은 지식인들이 참석하였다.

또한 1920년대와 30년대 동안, 미제스는 두개의 다른 학문 분야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는 경제학에서의 연역적 방법론(deductive method)을 방어하는 일련의 에세이를 통해 독일 역사학파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이를 추후에 인간행동학(praxeology) 혹은 행동의 논리학(the logic of action)이라고 명명했다. 또 그의 학생 하이에크와 함께 오스트리아 경기변동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기간 동안 하이에크와 미제스는 경기변동이론에 대한 많은 연구를 진행했고, 신용확대의 위험성을 경고했으며, 다가올 통화위기를 예측했다. 이 시기의 작업은 1974년 하이에크가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후에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하이에크는 환율, 자본이론, 그리고 화폐개혁 문제에 있어 케인스 경제학의 주요한 반대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인기 있는 <노예의 길>(Road to Serfdom, 1944.)은 뉴딜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의 고전적 자유주의 운동이 부활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후기작인 <법, 입법, 그리고 자유>(Law, Legislation, and Liberty, 1973.)는 법에 대한 후기 스콜라학파의 접근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사회정의와 평등주의의 엉터리 처방을 비판하는 데 그것을 적용하였다.


오스트리아의 밖에서

전세계적인 불황에 시달린 이후인 193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는 나치정권의 합병이라는 거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하이에크는 이미 1931년에 미제스의 권유에 따라 런던으로 떠났고, 미제스 자신도 1934년에 제네바로 건너가 국제관계연구소 대학원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이후 미제스는 미국으로 이민갔다. 이러한 분열은 오스트리아에서의 오스트리아학파를 약화시켰지만, 반대로 영어권 세계에서 오스트리아학파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제스를 민족사회주의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인식한 나치는 그의 아파트에서 각종 문서를 압류해 전쟁 기간 동안 숨겨두었다. 역설적이게도, 전후 독일의 경제개혁과 국가재건을 이끈 것은 뢰프케의 저술활동과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의 국가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제스의 사상이었다. 그후 1992년, 오스트리아 기록관리자들은 모스크바에서 재개관된 아카이브에서 미제스의 도난당한 비엔나 문서들을 발견했다.

제네바에서 머무는 동안, 미제스는 자신의 최고 걸작인 <국민경제학>(Nationalökonomie)을 저술했으며, 미국에 온 후 이를 개정 및 확장하여 영어로 발표한 것이 바로 그의 <인간행동>(Human Action, 1949. 번역판: 민경국·박종운 역, 2011)이다. 그의 제자 머레이 라스바드는 이 책을 “미제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우리 세기 인간 정신의 가장 훌륭한 산출물 중 하나이며, 경제학을 온전한 전체로 격상시켰다“고 평가했다. 당연히 <인간행동>은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경제학 일반이론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미 당시의 경제학계가 자유시장이 때로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경제에 간섭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케인스주의로 완전하게 대세가 기울었고, 따라서 불환화폐, 부분지급준비금제도, 그리고 중앙은행을 받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인간행동>은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들의 모든 원칙은 미제스에게 아주 불쾌하고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었다.

미제스는 대학에서 월급을 받고 종사할 자격이 물론 충분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비엔나에서 그랬던 것 처럼, 뉴욕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미제스가 미국에 가기 이전부터, 그의 가장 충실하고 뛰어난 옹호자인 저널리스트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은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와 뉴스위크(Newsweek)에서 미제스의 저서를 서평하곤 했으며, 미제스 사상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된 고전 <경제학의 교훈>(Economics in One Lesson, 1946.)을 출판했다. 해즐릿은 미제스 사상의 홍보를 넘어서, 직접적으로 오스트리아학파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케인스주의를 총체적으로 붕괴시키는 <신경제학의 실패>(Failure of the ‘New Economics’, 1959)를 저술했으며, 세이의 저술을 옹호하며 그를 오스트리아학파 거시경제학 이론의 중심으로 복권시켰다. 해즐릿은 미제스의 비타협적인 원칙 고수를 따랐고, 그 결과 저널리즘계에서 가장 중요한 4대 고위직 자리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미제스의 뉴욕 세미나는 1973년 그가 죽기 2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의 경제학 박사과정 학생인 머레이 라스바드는 그 세미나를 통해 오스트리아학파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점점 더 주류경제학으로부터 이탈해 오스트리아학파를 학습하게 되었다.


머레이 라스바드와 오스트리아학파의 부활

오스트리아학파 3대 거장: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

머레이 라스바드는 분명 매우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컬럼비아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주류 경제학 사상을 거부하는 것은 그의 학술 경력 전반에 걸친 핵심 주제가 되었다. 라스바드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벌였으며, 다방면에 능통했음에도, 결코 아이비리그의 어떤 대학에서도 학술적 지위를 얻지 못했다. 오직 브루클린 폴리테크닉만이 그에게 교수직을 제공하였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할 수 있었다.

라스바드는 거의 모든 오스트리아학파 전통을 비타협적으로 옹호했으며,이러한 급진주의로 인해 많은 영향력 있는 정치 단체들로부터 배척받게 되었다. 심지어 그의 견해에 동조할 수 있었던 보수 우파 단체들에게서도 좋은 취급을 받지 못했다. 윌리엄 F. 버클리(William F. Buckley)는 그의 죽음을 조롱하는 부고를 썼고, 아인 랜드(Ayn Rand)의 지지자들은 대기업이 정치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본 라스바드의 견해를 결국엔 거부했다.

라스바드는 자신의 저서 <미국 우파의 배신>(The Betrayal of the American Right, 2007.)에서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진정한 정신(true spirit)이 무엇인지 밝혔다.

경제학에 있어, 라스바드의 <인간, 경제, 국가>(Man, Economy, and State, 1962. 번역판: 전용덕·김이석 역, 2006/2019)는 미제스 <인간행동> 이후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완전히 정형화시킨 세기의 걸작으로 자리매김 했다. 특히 독점이론, 효용이론, 복지이론, 그리고 국가이론에 있어서는 미제스의 견해를 개선하고 강화했다.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한 라스바드의 접근법은 재산의 자연권 이론이라는 틀 안에서 경제과학을 응용한 것으로, 후기 스콜라학파 사상의 직접적 계승이다.

그 결과, 라스바드는 재산, 결사, 그리고 계약의 자유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와 국가가 없는 사회질서, 혹은 아나코 캐피탈리즘에 대한 전면적인 방어논리를 개발해낼 수 있었다. 라스바드는 미제스의 견해에 내포된 몇 가지 불일치를 제거하고, 확장하고, 완성했으며, 그럼으로써 미제스의 초기 저술 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정책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그러나, 미제스의 초기 견해 그 자체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라스바드는 자신의 경제학 이론에 입각해 대공황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학파 경기변동이론을 응용하여, 당시의 주식시장 붕괴와 경기 침체가 이전의 은행 신용 확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였다. 그 후 정부 정책에 대한 일련의 연구에서, 그는 시장에 대한 모든 유형의 간섭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하기 위해 이론적 틀을 새로이 확립했다.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를 확장하고 급진화했으며, 이는 미제스 통찰력을 논리적 완결지점까지 밀어붙인 결과였다.—법, 질서, 그리고 기본적인 사회인프라 같은 ‘공공재’ 및 서비스에 대해— 미제스가 국가의 역할을 인정한 것과 달리, 라스바드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민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익’을 위한다는 표면적인 명목을 가진 많은 규제와 법률이, 사실 ‘자기-권력확대’를 원하고, 위험할 정도로 통제받지 않는 정부관료들의 계략에 불과하며, 그들을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해방시켜 사리사욕을 위한 권력에 손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실질적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라스바드는 상업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는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양산하며, 그러한 서비스가 경쟁이 이루어지는 민간 부분에서 제공될 경우에 비효율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 주장했다.

라스바드는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m) 혹은 정실자본주의(crony-capitalism) 역시 강도높게 비난했다. 그는 엘리트 사업가들이 경쟁회사를 희생시키기 위해 정부의 독점력과 결탁하여 법률과 규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많은 사례를 언급하며 정경유착을 비판한다. 기업가의 입장에선 정당한 경쟁이 아니라 정치적 술수를 쓰는 것이 비용적 측면에서 더 이점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이렇듯 라스바드는 추후의 공공선택론(public choice theory)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분야를 사전에 연구한 바 있으며, 이 영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업적을 남겼지만, 오늘날의 공공선택론은 라스바드의 저술과는 거의 무관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라스바드는 세금을 대규모의 강제적 절도로 간주했으며, 국가에 의한 무력의 강제적 독점은 곧 경쟁적인 공급자들로부터 보다 효율적인 방어 및 사법 서비스의 자발적 공급의 금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불환화폐 독점체제와 그것을 지원하는 중앙은행 및 부분지급준비금제도는 정말 합법화된 금융사기에 불과하며, 자유주의(libertairanism)의 원칙과 윤리적 입장에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오스트리아학파와 고전적 자유주의 교리를 확실하게 자리잡게 만든 사람은 물론 라스바드였다. 특히 식민지 시절의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다룬 네 권 분량의 <자유에서 잉태한>(Conceived in Liberty, 1975-1979.)은 면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권 이론과 오스트리아학파의 재융합의 관한 그의 철학적 작업물은 <자유의 윤리>(The Ethics of Liberty, 1982. 번역판: 전용덕·김이석·이승모 역, 2016.)가 대표적인데, 이 책을 집필할 때와 거의 동 시기에, 그는 <에드워드 엘가의 세기의 경제학자들 시리즈>(Edward Elgar’s Economists of the Century series)의 일환으로 출판될 두 권 분량의 <행동의 논리>(The Logic of Action, 1997.)를 저술하고 있었다.

1982년에, 하이에크, 해즐릿, 그리고 미제스의 미망인 마르기트 폰 미제스(Margit von Mises)의 도움을 받아 루트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라스바드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다. 미제스 연구소는 학술회의, 교육 세미나, 책 출판, 오스트리아학파 모노그래프 제작, 회보지 발간, 학술활동 촉진, 심지어 영상물 촬영 등 여러 프로젝트를 줄기차게 추진하면서, 오스트리아학파를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시대로 이끌었다.

오스트리아학파 3대 거장: 한스 헤르만 호페(Hans Hermann-hoppe)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수 많은 새로운 지지자들과 함께 새 천년을 맞이했다. 경제학자로는, 스페인 출신의 헤수스 우에르타 데 소토(Jesus Huerta de Soto), 독일 출신의 외르크 귀도 휠스만(Jörg Guido Hülsmann), 그리고 미국 출신의 로버트 머피(Robert Murphy) 및 월터 블락(Walter Block) 등이 있으며, 저술가로는 탐 우즈(Thomas Woods)와 르웰린 락웰(Lew Rockwell) 등이 저명하다. 방송인과 공인으로서는 피터 쉬프(Peter Schiff)와 론 폴(Ron Paul)이 대표적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최근의 성황을 두고, 고전적 자유주의 학문과 사상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출처 : https://mises.org/what-austrian-economics, https://wiki.mises.org/wiki/Austrian_School

번역 및 편집 : 김경훈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