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세금은 정말 도둑질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범죄자들로서는 결코 필적할 수 없는, 거대하고 엄청난 규모의 도둑질이다. 세금은 국가 내 주민들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는 것에 불과하다.

Murray Newton Rothbard (1926 – 1995)

머레이 뉴턴 라스바드(1926년 3월 2일 – 1995년 1월 7일)는 매우 지적이고 박학다식한 학자였고, 주로 경제학, 정치철학(특히 ‘리버테리어니즘’), 경제사, 그리고 법률 이론에 중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저술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개발하고 확장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고, 1929년의 대공황과 미국의 은행사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을 응용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와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로 대표되는 19세기 미국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결합하여 새롭고 독특한 정치철학을 개발한 것 역시 그의 매우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라스바드는 약 45년 동안 자유주의를 개발하고 알리는 데 전력을 다했고, 미국의 가장 저명한 지식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 자유시장에서의 화폐생산, 그리고 중앙계획에 대한 비판으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학파에 입각하여, 라스바드는 경제를 통제하는 강제적인 정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의 독점적인 힘이야말로 대중의 자유와 장기적인 복지에 대한 가장 거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종류의 국가를 가장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집결된 ‘거대한 도적 패거리’로 정의했다.

라스바드는 정부가 독점하여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가 민간 부부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잘 제공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공익’을 위한다는 표면적인 명목을 가진 많은 규제와 법률이, 사실 자기-권력 확대(self-aggrandizement)를 원하고, 위험할 정도로 통제받지 않는 정부 관료들의 계략에 불과하며, 그들을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해방시켜 사리사욕을 위한 권력에 손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실질적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라스바드는 상업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는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양산하고, 그러한 서비스가 경쟁이 이루어지는 민간 부분에서 제공될 경우에 비효율의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 주장했다.

라스바드는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m) 혹은 정실자본주의(crony-capitalism) 역시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엘리트 사업가들이 경쟁회사를 희생시키기 위해 정부의 독점력과 결탁하여 법률과 규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많은 사례를 언급하며 정경유착을 비판한다.

라스바드는 세금을 대규모의 강제적 절도로 간주했으며, 국가에 의한 무력의 강제적 독점은 곧 경쟁적인 공급자들로부터 보다 효율적인 방어 및 사법 서비스의 자발적 공급의 금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불환화폐 독점체제와 그것을 지원하는 중앙은행 및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는 정말 합법화된 금융 사기에 불과하며, 자유주의(libertairanism)의 원칙과 윤리적 입장에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생각했다.


삶과 경력

머레이 라스바드는 1926년 3월 2일 데이비드와 레이 라스바드(David and Rae Rothbard)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생이었고, 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컬럼비아 대학교 시절 학업성적은 특히 두드러졌다. 컬럼비아 학생일 때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받을 수 없었고, 미제스(Ludwig von Mises)도 그저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의 가격 이론을 학습하면서, 라스바드는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가격 및 임대료 통제에 반대하는 논증들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서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스티글러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임대료 통제에 대해 쓴 팸플릿의 출판사에게 글을 써서 보냈다.

그 출판사는 유명한 경제교육재단(FEE)이었고, 라스바드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제스를 만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라스바드는 즉각적으로 미제스의 자유방임(laissez-faire) 경제학에 매료되었고, 1949년에 발표된 대작 <인간행동>(Human Action, 1949. 번역판: 민경국·박종운 역, 2011)은 특히 그에게 엄청난 인상을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는 인간행동학자(praxeologist)가 되었다: 미제스의 이 저서는 라스바드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자유 경제를 위한 일관성 있고 엄격한 방어논리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뉴욕 대학교에서 개최되는 미제스의 세미나에서 활동하는 회원이 되었다. 한편, 그는 박사학위를 위해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지도 교수는 저명한 경제사학자 조셉 도프먼(Joseph Dorfman)이었으며, 라스바드는 1956년에 1819년의 공황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해당 주제에 대한 연구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라스바드는 곧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고전적 자유주의 학자들을 후원했던 주요 단체인 윌리엄 볼커 기금의 주목을 받았고, 대학생들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인간행동>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교과서를 저술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교과서 중 화폐와 신용에 대한 챕터는 미제스의 승인을 받기도 했다. 라스바드가 프로젝트를 계속 진척하면서, 그 내용은 단지 교과서 이상의 무언가를 담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바로 희대의 걸작 <인간, 경제, 국가>(Man, Economy, and State, 1962. 번역판: 전용덕·김이석 역, 2006/2019)이다. 아직까지도 이 책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라스바드는 역사와 정치철학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인간, 경제, 국가>, <권력과 시장>, <자유의 윤리>, 그리고 <새로운 자유를 위하여>(For A New Liberty, 1973. 번역판: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정연교·권기붕·정혜영·한학성 역, 2013.)와 같은 그의 책들은 자유주의 자연권 철학, 반정부 아나키즘, 그리고 오늘날의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이슈에 대한 자유시장 관점에서의 분석을 제공하는 훌륭한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경제사상사에 대해서도 심도깊은 이해를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콜라학파나 중농학파와 같은 아담 스미스 이전의 자유시장 경제학파를 연구하고 재조명하고자 했다. 그는 여러 권으로 구성된 <경제사상사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1995.)에서 경제사상사를 논의했는데, 안타깝게도 완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라스바드는 또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못하는 것을 전문화하려는 경향이 있다”(people tend to specialize in what they are worst at)는 라스바드의 법칙(Rothbard’s law)를 만들었다:

예컨대, 헨리 조지(Henry Geroge)는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 정말 위대했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는데, 그는 90% 이상의 시간을 토지에 대해 쓰는데 투자했다.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화폐를 제외한 모든 경제학 분야에서 위대하지만, 오로지 화폐에만 집중한다.(people tend to specialize in what they are worst at. Henry George, for example, is great on everything but land, so therefore he writes about land 90% of the time. Friedman is great except on money, so he concentrates on money.)

학계에서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라스바드는 1977년에 <자유주의 연구 저널>(the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을 창간했다. 이 저널은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에 관한 심포시엄을 개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저널은 자유주의 사상을 호의적으로 다루는 가장 중요한 학술지로 자리 잡고 있다.

1987년,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 이론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자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또 다른 저널인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리뷰>(the Review of Austrian Economics)를 창간했다. 이 저널 또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가장 핵심적인 학술지인데, 1997년에 이름을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분기별 학술지>(Quarterly Journal of Austrian Economics)로 바꾸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라스바드는 르웰린 H. 락웰 주니어(Llenwellyn H. Rockwell, Jr.)에 의해 1982년 루트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가 설립될 때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 조직은 라스바드 사상을 홍보하는 중요한 조직으로 자리 잡았고, 라스바드는 학술 부대표로 종사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86년까지 브루클린 폴리테크닉에서 강의했으며, 1986년부터 1995년 1월 7일 영면할 때까지는 네바다 라스베이거스 대학 경제학과의 S.J. 홀 석학교수로 재직했다.

이 창조적이고 박식한 천재의 삶과 업적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그가 사랑하는 아내, 조앤 라스바드(JoAnn Rothbard) 였다. 자유를 위한 머레이의 학문적 업적과 조앤의 헌신적인 도움의 결합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경제학에 대한 공헌

오스트리아학파는 인간행동의 공리들(오스트리아학파 전통에서는 ‘인간행동학’으로 불림)을 발견하고자 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며 통제경제를 비판한다.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driech Hayek), 그리고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중요한 이론가이다.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이론 전체가 “인간이 목적 지향적으로 행동한다”(humans engage in purposeful action)는 사실에 이미 논리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행동의 공리를 개발하면서, 그는 독점 가격이 자유시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합리적 기대 개념의 상당 부분을 그가 이미 발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라스바드는 몇 개의 부가적인 가정의 도움을 받아 행동 공리(the axiom of action)로부터 경제학 전체를 연역하려는 미제스의 시도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미제스가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연역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라스바드는 인간행동학에 주요한 이론적 혁신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의 계산문제가 정부가 통제하는 경제 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를 소유하는 단일 사기업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또한 프랭크 페터(Frank Fetter)의 임대 이론(theory of rent)을 오스트리아학파 자본 이론과 통합시켰고, 자유시장에서는 독점 가격이 형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치명적인 비판을 전개하였고, 후에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가 노벨상을 수상한 이유인 합리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s) 개념을 이미 예상해내기도 했다.

라스바드가 원래 <인간, 경제, 국가>를 계획했던 것처럼, 이 책은 정부간섭의 유형을 종합적으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챕터를 마지막 부분에 포함하고 있다. 이 챕터는 또한 세금을 정의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규율을 비판하고 있는데; 비록 짧지만 명석한 한 문단을 통하여, 추후에 존 롤스(John Rawls)와 그의 추종자들이 가져올 ‘행운’에 바탕을 둔 반시장적 주장을 미리 논파하였다. 불행하게도 그 문단은 보다 길었으나, 심하게 편집된 형태로 <인간, 경제, 국가>에 수록되었다. 라스바드가 의도한 원래 내용은 1972년에야 <권력과 시장>(Power and Market, 1972.)이라는 이름을 달고 별개의 책으로 발표되었다. 즉 애당초 라스바드가 설계한 <인간, 경제, 국가>는 <권력과 시장>을 포함한 내용이며, 이 완전한 형태는 미제스 연구소에서 구해볼 수 있다.

분명히 이 책들은 한 사람이 일생에 한 번도 쓰기 어려운 희대의 걸작이었으나, 라스바드는 이후에도 경제학에 대한 수많은 공헌을 남기는 데 멈춤이 없었다. 그의 중요한 논문인 1956년의 “효용이론과 후생경제학의 재건을 향하여”(Toward a Reconstruction of Utility and Welfare Economics)에서, 그는 만약 우리가 효용을 기수적(cardinal)이지 않고 서수적(ordinal)이라고 여긴다면, 후생경제학의 반시장적 견해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입증된 선호(demonstrated preference)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오직 자발적인 교환 참여로부터만 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라스바드는 만약 경제학자가 스스로를 온전한 ‘가치중립적’으로 남겨둔다면, 어떠한 정책 제언도 할 수 없음을 논증하기도 했다. 경제학에 대한 그의 주요 논문들은 라스바드 사후에 출판된 두 권 분량의 <행동의 논리>(The Logic of Action, 1997.)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시장에 대한 라스바드의 견해에 따르면, 개인적 보호와 국방마저도 정부에 의한 강제 독점이 아니라 시장에서 공급되어야 한다. 케인스 경제학과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효용주의 역시 라스바드의 치명적인 비판을 받았다.

<인간, 경제, 국가>에서, 라스바드는 국가 간섭의 다양한 종류를 세 가지의 범주로 정리했다:

a) 침해자가 다른 사람의 재산권 행사만 일방적으로 제한하고 자신은 자유롭게 권리를 행사한다면, 그것은 자폐적 간섭(autistic intervention)이다.

b) 자신과 피해자 사이의 교환을 강요하거나, 피해자들이 자신에게 ‘선물’ 하는 걸 강요한다면, 이는 이항적 간섭(binary intervention)이다.

c) 침해자가 피해자 간의 교류를 강요하거나, 특정 사안을 금지할 경우 이는 삼각적 간섭(triangular intervention)이다.

샌포드 이케다(Sanford Ikeda)에 따르면, 라스바드의 이러한 분류는 “미제스의 본래적인 공식화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차이와 불일치를 완전히 해소한다.(eliminates the gaps and inconsistencies that appear in Mises’s original formulation.)

<권력과 시장>에서, 라스바드는 자유시장에서 경제학자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지만, 정부에 고용된 경제학자의 권력과 역할은, 정부가 시장에 계속하여 간섭한다면, 더 많은 진단과 추가 정책제안이 필요해지므로 당연히 강력해진다고 분석했다. 이 점에서 그는 경제학자들이 단순히 자기 이익의 증대를 위해 정부간섭의 증가에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나코-캐피탈리즘(Anarcho-capitalism)

자유방임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그는 하나의 딜레마에 봉착했다. 만약 상품과 서비스가 시장에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논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왜, 보호 및 방어 서비스는 시장 공급이 아니라 강제 독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라스바드는 자유방임주의를 버리거나, 개인주의적 아나키를 포용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1949년 겨울에 결국 결정을 내렸는데, 그 선택에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다.

라스바드는 1950년대부터 자신을 자유재산 아나키스트(a private property anarchist)로 간주했으며, 그 이후에 아나코-캐피탈리스트(anarcho-capiitalis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아나키즘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며,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다.(Capitalism is the fullest expression of anarchism, and anarchism is the fullest expression of capitalism.)

그의 아나코-캐피탈리스트 모델에서, 치안 서비스 제공회사는 자유시장에서 경쟁하고, 보호 및 사법 서비스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 소비자들에게서 자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한다. 아나코-캐피탈리즘은 국가의 무력 독점의 종식을 의미한다.

라스바드는 대기업과 거대 정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했고, 그 둘을 똑같이 비난했다. 그는 엘리트 사업가들이 경쟁회사를 희생시키기 위해 정부의 독점력과 결탁하여 법률과 규제 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많은 사례를 언급하며 정경유착을 비판한다. 그가 아인 랜드(Ayn Rand)의 ‘대기업에 대한 막역한 헌신’을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아인 랜드는:

20세기에 들어서 공격적 국가주의가 증가하게 된 중요한 책임이 바로 대기업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영웅으로서의 대기업 사업가’를 숭배하는 감정이 너무 헌신적이다.([Rand] is too committed emotionally to worship of the Big Businessman-as-Hero to concede that it is precisely Big Business that is largely responsible for the twentieth-century march into aggressive statism…)

라스바드에 따르면, 정경유착주의(cronyism)의 한 예는, 소위 소위 보존법(conservation laws)을 철도회사들이 후원함으로써 얻은 독점적 특권의 부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시장 화폐 (Free market money)

화폐이론도 라스바드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영역 중 하나이다. 그는 고전적인 금본위 제도=의 미덕을 강조하고, 100% 지금 준비금 제도를 지지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가 개발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경기변동이론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공황을 초래하는 신용 팽창은 오직 이 제도를 도입할 경우에만 방지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일반 대중을 위해 요약한, 자주 재판되는 인기 있는 팸플릿인 <정부는 우리 화폐에 무슨 일을 해왔는가?>(What Has Government Done to Our Money?, 1964. 번역판: 전용덕 역, 2010/2011/2012.)를 저술했으며, 일종의 교과서로서 <은행의 신비>(The Mystery of Banking, 1983)도 발표했다.

라스바드는 화폐 발행과 분배에 있어 정부의 독점력을 본질적으로 파괴적이며 비윤리적이라고 믿었다.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오스트리아학파 경기변동이론에 따르면, 과도한 신용 팽창은 필연적으로 자본 자원의 심각하게 잘못 분배하는 동시에 지속될 수 없는 신용거품을 초래하고, 결국 경제 공황을 초래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중앙은행 및 부분 지급준비금 제도를 합법적인 화폐 위조(legalized counterfeiting), 또는 제도화된 횡령(institutionalized embezzlement)으로서, 본질적으로 사기와 다름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정부가 시민들로 하여금 상품화폐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그 어떤 시민도 결코 탈출할 수 없는 폰지 사기의 합법적인 강제와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완전(100%) 지불준비금 은행제도와, 자발적이고 비정부적인 금본위제 또는 차선책으로서의 자유은행업(그는 이를 자유시장 화폐제도라고도 불렀음)의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관리한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와 불환화폐 체제에 대해 라스바드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암울한 화폐 및 은행의 상황을 살펴보자. 은행은 출금 가능한 예금을 39:1 비율로만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자금을 확장(pyramiding)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고, 연방준비제도 역시 딱히 이를 통제하거나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불환화폐로 가득한 오늘날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건전한 비-인플레이션적 시장 화폐 체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목표는 명확하지만, 다양한 방법을 놓고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a) 정부간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품본위제, 즉 금본위제로 복귀한다. (b) 연준을 폐지하고 자유롭고 경쟁적인 은행 체제로 복귀한다. (c) 정부에게서 화폐에 대한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 그리고 (d) 시중은행에게 100% 완전 지불준비금 제도를 시행하게 만든다. 이 외에도, 예금인출의 미지급 조짐이 아주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해당 은행을 당장 파산시키고 모든 자산을 청산하는 제도를 도입할 수도 있다. 다만 이 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라면, 부분 지불준비금 제도를 사기로서 불법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은행들로 하여금 신용의 형태를 계속하여 혁신하게 만드는 방안을 고려한다면, 자유은행업은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공헌

라스바드는 일반적으로 미제스의 의견에 매우 긴밀하게 동의했지만, 한 영역에서는 미제스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미제스는 윤리적 판단이 주관적일 뿐이라 주장했다.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는 결코 합리적 추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스바드는 인간 본성의 요구 조건에 따른 객관적 윤리가 형성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제스에 반대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및 아퀴나스주의 철학에 기초해 있는데, 정치철학에 대한 라스바드의 주요 역작에서 <자유의 윤리>(The Ethics of Liberty, 1982. 번역판: 전용덕·김이석·이승모 역, 2016.)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의 정치 윤리학 체계에서, 기본 원칙은 자기소유권(self-ownership)이다. 자기소유권의 엄중한 성격을 감안한다면, 강제적인 정부의 보호 서비스 독점은 불법적이다. 라스바드는 로버트 노직이 대표하는 최소국가 지지자들을 반대하는 논증을 개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계약의 본질과 처벌의 적절한 기준 등 자유주의 법학 이론이 가지는 쟁점에 대한 중요한 설명을 제공하였다. 그는 시장에 대한 미제스의 논증이, 많은 훌륭한 가치를 찾아내어 중요하면서도 왜 절반의 성공에 그쳤는지를 설명하였으며, 하이에크의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견해를 상세하게 비판하였다.

자기소유권

<자유의 윤리>에서, 라스바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규범, 즉 보편적 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 곧 완전한 자기소유권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곧 자연법(natural law)으로서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좋은 규범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개인이 자신의 노동의 산물을 온전히 소유하며, 소유되지 않은 토지에 자신의 노동을 섞으면 정당한 소유주가 된다고 보았다. 그 이후에 그것은 거래나 선물에 의해서만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는 독점적인 사유재산으로 격상된다. 물론 그러한 토지는 경제적 이치에 맞는 사용이 가능하지 않는 한 미사용 상태로 남아있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에 대한 공헌

역사 연구에 있어 라스바드의 업적은 경제학의 영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네 권 분량의 <자유에서 잉태한>(Conceived in Liberty, 1975-1979.)에서, 그는 미국 혁명의 자유주의적 성격을 강조한 식민지 시절의 미국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어느 때처럼, 그는 여기서도 주류 학설에 도전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덕목과 군사적 재능에도 시큰둥 했다. 라스바드에게 있어서, 연합 규약(the Articles of Confederation)은 중앙 집중적인 헌법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는 결함 있고 지나치게 약한 협정이 아니었다. 연합 규약은 너무 많은 중앙 통제를 허용했을 정도이다.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을 경제사에 적용할 수 있음을 <미국의 대공황>(America’s Great Depression, 1963)에서 보여주었다. 1929년의 대공황은, 규제되지 않은 자본주의의 실패를 증명하기는 커녕, 오히려 경제에 대한 정부 간섭의 위험성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당시의 경제 붕괴는 1920년대 연방준비제도에 의한 통화 팽창이 유발한 인위적인 호황에 대한 불가피한 조정으로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경제 침체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이 논증을 전개함으로써, 라스바드는 후버 수정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후버 자신과 그 패거리들이 만든 신화와 반대로, 그는 결코 큰 정부를 반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정치의 공학자’를 표방한 그의 경제 정책은 뉴딜의 시작과 다름없었다. 후버에 대한 라스바드의 견해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스바드에게 있어서, 은행 정책의 흐름은 미국 경제사를 해석할 열쇠였다. 미슐레(Jules Michelet)와 마찬가지로, 그는 역사를 인간 자유를 향한 투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논고는 결코 불필요한 통계 수치의 나열이 아니었다. 라스바드는 항상 역사적 결정의 배후에 있는 특정 행위자들과 이해관계의 식별을 중요시하였다. 은행업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던 모건(Morgan)과 록펠러(Rockefeller)의 투쟁은 그의 <미국 화폐·은행사>(A History of Money and Banking in the United States, 1999.)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주제이다.

라스바드의 마지막 학문적 승리는, 안타깝게도 끝을 맺지 못한 채 미완성본이 라스바드 사후 출판되었다. 바로 두 권 분량의 <아담 스미스 이전의 경제사상과 고전 경제학>(Economic Thought Before Adam Smith and Classical Economics, 1995)이다. 이 책에서 그는 경제이론의 역사에 대한 아주 세밀하고 박학한 설명을 제공한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아담 스미스는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가 아니었다. 리카도주의 후계자들에 의해 개량되고 이어진 아담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경제학을 잘못된 길로 내몰았다. 라스바드의 연구에 있어 경제학의 영웅 지위는, 아담 스미스 훨씬 이전에 이미 주관가치론을 개발한 스페인 스콜라학파,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캉티용(Cantillon), 튀르고(Turgot), 그리고 세이(Say)에게로 귀속된다. 또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시조라 할 만한 존 스튜어트 밀 속의 이단적 믿음을 해부하고, 그의 성격과 사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정치적 견해

현안에 대한 논평에서도, 라스바드는 어떤 주제에 관해서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소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아프가니스탄의 내분이든, 중동 석유에 투자의 원천이든, 어떤 주제에서든 그는 항상 관련된 자료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현안에 대한 그의 칼럼은 <락웰-라스바드 보고서>(Rockwell Rothbard Repert)에 실렸는데, 그것들은 이제 <라스바드의 활력>(The Irrepressible Rothbard, 2000)에서 읽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설립한 또 다른 저널인 <자유주의자 포럼>(The Libertarian Forum)은 1969년부터 1984년까지의 각종 토픽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제공하고 있다. 라스바드의 명저 <새로운 자유를 위하여>는 대중에게 자유주의적 견해를 폭넓게 설명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반-평등주의 (Anti-Egalitarianism)

1974년작 저서 <자연에 대한 반란으로서의 평등주의>(Egalitarianism as a Revolt Against Nature and Other Essays)에서, 라스바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등은 자연적 질서가 아니며, (법 앞의 평등을 제외하고) 만인을 모든 면에서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성전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 확실하다.(Equality is not in the natural order of things, and the crusade to make everyone equal in every respect (except before the law) is certain to have disastrous consequences.)

또 그가 말하길,

평등주의 좌파의 핵심은 현실에 구조가 없다는 정신병적 믿음이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만으로 언제든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다. (At the heart of the egalitarian left is the pathological belief that there is no structure of reality; that all the world is a tabula rasa that can be changed at any moment in any desired direction by the mere exercise of human will.)

라스바드는 또한 국가주의자들이 인종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억제하는 것 역시, 그들의 평등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를 이용하기 위함에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1963년작 논설문 “흑인 혁명”(Negro revolution)에서, 그는:

흑인 혁명에는 자유주의자가 찬성해야 할 요소와 반대해야 할 요소가 모두 뒤섞여 있다. 자유주의자는 인종 차별과 경찰의 잔혹성에는 반대하면서도, 강제 통합과 인종별 직업 할당제와 같은 부조리에 대해서도 동등하게 반대해야 한다.(The Negro Revolution has some elements that a libertarian must favor, others that he must oppose. Thus, the libertarian opposes compulsory segregation and police brutality, but also opposes compulsory integration and such absurdities as ethnic quota systems in jobs.)

라스바드는 맬컴 X를 흑인의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했으나, 마틴 루서 킹은 “발전하는 흑인 혁명의 중대한 방해요소“(the major restraining force on the developing Negro revolution)에 불과하고, 그렇기 때문에 백인들의 총애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또 1968년에 킹 목사가 암살되었을 당시에,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이 도시의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한 것을, 베트남인을 상대로 미군 병력을 사용한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불간섭주의 (Noninterventionism)

라스바드는 마르크스의 명언을 약간 수정하여 받아들였다: 마르크스가 바란대로, 라스바드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하기’도 추구했다. 그는 이론적 작업에서 자신이 개발한 아이디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자유주의적 견해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한 사안은 그에게 있어 최우선의 중요도를 가졌다. 라스바드 역시 랜돌프 본(Randolph Bourne)의 “전쟁은 국가의 건강이다(war is the health of the state.)라는 격언에 동의했고, 따라서 공격적인 외교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외교정책의 불간섭을 지지하며 구 우파(the Old Right)의 수호자가 되었다. 라스바드는 국가권력과 공격적 외교정책에 있어서 존 T. 플린(John T. Flynn)과 가렛 개러트(Garet Garrett)를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고립주의자 세력과 같은 신념을 공유했다.

전후의 보수주의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비록 라스바드가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의 <네셔널 리뷰>(National Review)의 초기 기고자 중 한 명이면서도, 그는 버클리나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 혹은 프랭크 S. 메이어(Frank S. Meyer) 등 해당 잡지의 편집진들이 옹호하는 냉전에서의 공격적 정책 추구를 반대했다. 그는 머지 앉아 이런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결별했고, 그 후 그들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중 하나가 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그는 군국주의와 대외간섭을 추구하는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ism, 네오콘) 역시 비난했으며, 어떤 시점에, 어느 집단과도 일시적인 동맹을 지지하는 실용적 정책을 지지했다. 라스바드의 정치적 입장을 잘 보여주는 핵심 에세이인 <좌파와 우파>(Left and Right: The Prospects for Liberty)는, 그가 창간한 중요한 학술 저널 <좌파와 우파>(Left and Right)에 실렸다. 이 저널은 수정주의적 역사관과 외교정책에 대한 중요한 에세이들을 수록했으나, 불행하게도 1965년부터 1968년까지만 발간되었다.

라스바드는 제국주의와 세계 지배를 꾀하며 전쟁을 일삼는 미국 제국주의의 부상을 비판했다.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반감은, 심지어 1967년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체 게베라(Che Guevvara)가 CIA의 공작으로 처형당한 것을 칭송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적은 우리의 적이었다“(his enemy was our enemy)라고 말할 정도였다. 라스바드는 전쟁의 중단이 필수적이라고 믿었고, 이전의 전쟁에서 정부가 어떻게 시민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전쟁, 평화, 그리고 국가”(War, Peace, and the State)와 <국가의 해부>(The Anatomy of the State)에서 그의 견해가 잘 드러나고 있다.

라스바드는 ‘엘리트주의’ 이론가인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가에타노 모스카(Gaetano Mosca), 그리고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의 통찰력을 이용해 국가의 구성원, 목적, 그리고 이념에 대한 모델을 형성했다. 역사학자 해리 반스(Harry Elmer Barnes)의 부고문에서, 라스바드는 역사적 지식이 왜 중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경제와 사회의 영구적인 군국화, 병영국가로의 전환, 군-산 복합체의 등장, 그리고 징병제의 영구적 도입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었다. 다시 말해 세계대전의 참전이, 거대 정부가 운영하는 혼합경제, 즉 중앙정부, 강력한 노동조합주의, 그리고 대기업이 결탁하여 국가-독점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데 결정타를 날렸다.

1973년 인터뷰에서, 라스바드는 ‘자유주의 외교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0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힘을 가능한 최소화해야 한다. 고립주의는 국가의 힘을 국내에서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외교 문제에서도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이다.(minimize State power as much as possible, down to zero, and isolationism is the full expression in foreign affairs of the domestic objective of whittling down State power.)

그는 또한,

미국의 어떤 군사간섭이나 정치·경제적 간섭도 금기시해야 한다.(abstinence from any kind of American military intervention and political and economic intervention.)

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자유를 위하여>에서 라스바드는 이렇게 썼다.

순수한 자유주의 세계에서는, 국가도 없고, 특정 영토에서 강제를 독점하는 정부도 없기 때문에, ‘외교정책’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In a purely libertarian world, therefore, there would be no ‘foreign policy’ because there would be no States, no governments with a monopoly of coercion over particular territorial areas.)

“중동에서의 전쟁의 책임”(War Guilt in the Middle East)에서, 라스바드는 이스라엘이 행하는 중동 아랍인에 대한 공격, 예컨대 몰수 정책(confiscatory policies)과 난민들을 돌려보내고 빼앗을 재산의 환원을 거부하는 것 등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조직적인 반-반유대주의(Anti-Anti-Semitism) 역시 비판했다. 라스바드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무고한 사람들에게 보복하려는 모든 국가의 행동이 테러리즘 그 자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실제 가해자가 도통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어떤 이유를 가져온다고 해도, 결국 끊임없이 계속되는 대량 살상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Anything else is an apologia for unremitting and unending mass murder.)라고 말하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보복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작성 : 데이비드 고든(David Gordon)

번역 및 편집 : 김경훈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