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Heinrich Edler von Mises (1881–1973)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20세기에 가장 명성이 높았던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 중 한 명이다. 길고 생산적인 삶을 살면서, 그는 개별 행위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하여 목적 지향적으로 행동한다는 근본적인 공리(axiom)에 바탕을 둔 통합된 연역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의 경제분석 자체는, 경제학자가 가진 가치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적이지만, 미제스는 인류의 영속적 발전을 위해 지속 가능한 유일한 경제정책이 무제한적인 자유방임(laissez-faire), 자유시장, 결코 방해받지 않는 사유재산권의 행사, 그리고 정부의 역할을 그 영토 내의 시민과 재산의 보호로 엄격하게 제한함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미제스는
(a) 자유시장, 노동분업, 그리고 민간 자본 투자의 확대만이 인류의 번영과 호황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b) 토지와 자본재의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모든 종류의 합리적 가격 계산과 비용평가를 불허한다는 점에서 현대경제의 재앙이다.
(c) 시장을 방해하고 불구로 만드는 정부간섭은 필연적으로 역효과를 낳고 누적되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간섭을 폐지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의 도래를 결코 피할 수 없다.
라는 추론에 도달하였다.
국가주의와 집산주의가 맹위를 떨쳤던 20세기 내내 이러한 견해를 고수하고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미제스는, 반-인플레이션적인 금본위제와 자유방임을 주장함에 있어 비타협적인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미제스는 오스트리아와 미국의 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데 완전한 실패를 겼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길을 걸어나갔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석 경제고문이었던 미제스는 오스트리아의 인플레이션 재앙을 막기 위해 홀로 분투했고, 유럽 전역의 젊은 경제학자, 사회과학자, 철학자들을 사로잡은 유명한 사설세미나(privatseminar)를 개최하기도 했다. 미제스를 신-오스트리아학파(neo-Austrian School)의 창립자로 자리 잡게 해준 그의 경기변동이론은 중앙은행이 조장한 은행신용의 팽창이 인플레이션과 경제 불황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1930년대 초 영국의 젊은 경제학자 대부분에 의해 대공황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졌다.
미제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그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간 이후에 이루어졌다. 20년이 넘는 강의 활동을 통해,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오스트리아학파가 설립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73년 미제스가 사망한 이듬해, 그의 가장 유명한 추종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A. Hayek)는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걸쳐 미제스와 함께 경기변동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미제스는 1981년 9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의 렘베르크(지금의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빈의 명문가 출신이지만,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 곳에서 철도 건설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의 삼촌인 요아힘 란다우(Joachim Landau) 박사는 오스트리아 의회의 자유당 부대표를 역임한 바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막 넘어갈 시점에, 미제스는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좌파 간섭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젊은 미제스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창립한 명저인 멩거(Carl Menger)의 <경제학의 기본원리>(Principles of Economics, 1987. 번역판: 국민경제학의 기본원리, 민경국 역)를 읽게 되었고, 그 즉시 경제분석의 기초를 비현실적이고 기계적인 방정식이 아니라 개별 행위자의 행동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학파의 방법론과 그 귀결인 자유시장경제의 지지자로 전향하였다.
미제스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완전하게 반박한 오스트리아학파의 위대한 경제학자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의 유명한 비엔나 대학교 세미나에 참석하는 뛰어난 박사후 과정 학생이 되었다.
미제스 연구소(Mises Institute)의 문장은 미제스 가문의 그것과 같은데, 이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증조부인 마이에르 라흐미엘 미제스(Mayer Rachmiel Mises)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f I)에게 수여받은 것이다. 이 문장의 오른쪽 상단에는 상업과 소통의 신인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새겨져있고(미제스 가문은 상인과 은행가로서 성공을 누렸다), 왼쪽 하단에는 십계명이 표시되어 있다. 마이에르 라흐미엘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루트비히가 태어난 도시인 렘베르크의 다양한 유대인 문화단체를 통솔하였다. 문장의 붉은색 현수막은 샤론의 장미를 의미하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는 성모 마리아의 별칭 중 하나이며,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 왕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제스는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글귀 “불행에 굴복하지 말고 더욱 과감하게 거슬러 가라”(tu ne cede malis, sed contra audentior ito)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 미제스는 그의 첫 번째 위대한 업적인 <화폐와 신용의 이론>(The Theory of Money and Credit, 1912. 번역판: 김이석 역, 2011)을 집필했다. 이 책은 한계효용과 가격의 일반이론 속에 화폐이론을 통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그 당시까지는 정말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작업이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학 속으로 통합시킨 것이다. 하지만 뵘-바베르크의 그의 오스트리아학파 동료들은 미제스의 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스트리아학파를 화폐이론 없이 방치해두었는데, 그래서 미제스는 어쩔 수 없이 독립하여 그 자신의 ‘신-오스트리아학파’를 설립해야만 했다.
그의 화폐이론에서, 미제스는 1850년대까지는 유명했으나 그 후에는 잊혀 있던 영국 통화학파의 원칙을 부활시켰는데, 이에 따르면 화폐와 은행 신용의 팽창은 인플레이션과 경기변동만을 유발할 뿐이며, 따라서 정부 정책은 반드시 100%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방향을 고수해야만 한다.
미제스는 이런 통찰력에 그의 고유한 경기변동이론 요소를 추가했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 외에도, 은행의 신용 팽창은 기업가들이 높은 차순(higher orders)의 자본재—기계설비, 건축 등—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하도록, 동시에 소비재에는 더 적게 투자하도록 유도함으로써 필연적인 불황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은행 신용의 팽창이 가지는 문제점은, 은행이 기업에게 대출을 해줄 때, 일종의 유사저축(pseudo-savings)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사업가들로 하여금 소비자들이 실제 저축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저축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여 자본재 생산 투자에 필요한 자금이 충분히 조달되리라 믿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팽창에 의한 호황(boom)은, 시장이 잘못된 투자를 청산하고 소비자의 선호 및 수요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투자와 생산구조로 다시 정립하는 과정, 즉 반드시 필요하지만 고통스러운 경기 침체(recession)를 야기한다.
미제스와 그의 추종자 하이에크는 1920년대 전반에 걸쳐 경기변동이론을 개발하였고, 이를 토대로 미제스는 1920년대에 널리 퍼져 있던 영원할 것만 같은 번영의 신시대(New Era) 신화가 허구이며,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는 은행의 공황과 경기침체로 이어지리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하이에크가 미제스의 사설세미나에서 영향력 있는 학생이었던 라이오넬 로빈스(Lionel Robbins)의 초청을 받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강의하게 되었을 때, 하이에크는 대부분의 젊은 영국 경제학자가 미제스의 이론을 받아들이게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그의 케임브리지 제자들과의 논쟁에서 케인스의 화폐이론을 제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패배했다. 1937년 케인스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발표하면서, 케인스 혁명의 물결이 경제학계를 휩쓸었고, 하이에크의 제자 대부분이 전향했기 때문이다.
미제스-하이에크의 경기변동이론과 정책 처방은 케인스의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호황 기간에, 미제스는 모든 은행 신용과 통화 팽창이 즉각적으로 중단되어야 했다고 보았다. 또 침체 기간에는, 시장의 재조정 능력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스스로 작동될 수 있도록 엄격한 자유방임을 고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미제스는 간섭이 가능한 최악의 형태는 물가나 임금을 보조하고, 실업을 유발하고, 통화 공급을 늘리고, 또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미제스에게 불황은 낮은 저축률과 그에 비례하지 않는 높은 소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정부 지출을 늘리고 소비를 촉진하는 것보다는, 저축, 절약, 그리고 정부 지출의 감소를 장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견해는 1936년 이후 거시경제 정책의 전 세계적 경향과 완전히 척을 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러시아를 필두로 하여 유럽 대부분에서 승리했고, 미제스는 이에 대해 그의 유명한 1920년작 논문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경제계산”(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으로 대답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사회주의의 경제계획 위원회가 현대 경제 체제를 구상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하였다; 더욱이, 인위적으로 ‘시장’을 흉내 내려는 어떤 시도도 작동할 수 없는데, 진정한 가격 및 비용 체계는 재산권의 교환, 즉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미제스는 이 논문의 내용을 그의 명저 <사회주의>(Socialism, 1922. 번역판: 박종운 역, 2015)에서 보다 발전시켰는데, 이 책은 철학적, 사회학적, 그리고 물론 경제학적 측면을 모두 포괄적으로 고려하여 사회주의를 가장 철저하고 완전하게 파괴한 사상 최대의 대작으로 여전히 명성을 누리고 있다. 미제스의 <사회주의>는 하이에크를 포함하여, 독일의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와 영국의 로빈스 등 여러 저명한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을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936년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이는 유명한 경제평론가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의 찬사를 받았고, 그는 이 책을 뉴욕 타임스에서 서평하였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저명하고 학식 있는 공산주의자였던 매튜스(J.B. Matthews) 마저도 미제스주의 입장으로 전향하여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에 반대할 정도로 이 책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럽과 미국 전역의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15년 동안 사회주의의 경제계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1936년에 폴란드 경제학자 오스카르 랑게(Oskar Lange)가 ‘사장 사회주의’ 모델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랑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의 공산화를 돕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폴란드를 포함한 공산권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붕괴했고, 이념적 지평을 떠나 랑게의 ‘해결책’을 받아들였던 모든 기득권 경제학자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다.
로버트 하일브로너(Robert Heilbroner)를 비롯한 일부 저명한 사회주의자는 “미제스가 옳았다“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미제스는 옳았다”는 1990년 뉴올리언스에서 개최된 남부경제학회 연례 발표회 주제 중 하나였다. —
사회주의를 경제적 재앙이라 할 수 있다면, 정부의 간섭은 효과가 없고,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미제스는 그의 <간섭주의>(Interventionism, 1929. 번역판: 전한용 역, 1999)에서 이러한 통찰력을 정교하게 다듬었고, <자유주의>(Liberalism, 1927. 번역판: 이지순 역, 1988/2014)에서는 자유방임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정치철학을 제시했다.
미제스는 20세기 모든 정치적 경향에 반대했다. 더불어 그는 당시 경제학과 여타 학문의 철학 및 방법론적 경향을 지배하고 있던 파멸적 경향에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실증주의, 상대주의, 역사주의, 다원논리주의(polylogism, 모든 민족과 성별 등의 집단이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집단과는 소통할 수 없다는 입장), 그리고 기타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와 객관적 진리의 거부 등이 그가 상대했던 대표적인 입장이다. 또한 미제스는 경제학의 적절한 방법론, 인간행동학(praxeology)을 개발해냈는데, 그는 경제학이 명백한 공리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을 통해 경제이론을 유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제스는 경제학과 여타 학문에서 비현실적인 수학적 모델과 통계 사용으로 인간행동학과 역사적 이해를 대체하려는 늘어나는 경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미제스가 영어로 쓴 첫 두 책은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전능한 정부>(Omnipotent Government, 1944)는 파시즘과 나치즘이 대기업 및 자본가 계층에 의해 탄생했다는, 그 당시에는 표준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마르크스주의적 견해에 도전한 첫 번째 책이었다. <관료제>(Bureaucracy, 1944. 번역판: 황수연 역, 2012)는 정부의 운영방식이 언제나 ‘관료주의적’일 수밖에 없고, 관료제 특유의 악한 성격 대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정부를 비판하는 저술 중에서 아직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석력을 자랑하고 있다.
미제스의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은 <인간행동>(Human Action, 1949. 번역판: 민경국·박종운 역, 2011)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쓰인 경제학 일반이론 서적이다. 이 책에서 미제스는 그의 고유한 방법론과 연구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그는 독창적이고 연역적인 ‘인간행동학적’ 원리를 토대로 한 거대한 통합적 경제이론의 구조를 상세하게 건설했다. 그러나 경제학자 및 정부가 일반적으로 국가주의와 케인스주의 인플레이션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시대에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경제학자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미제스는 1957년 그의 마지막 주요 저서인 <이론과 역사>(Theory and History, 1957. 번역판: 과학이론과 역사학, 박종운 역, 2015)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역사주의의 반박 외에도, 과학이론과 역사학의 근본적 차이와 기능에 대한 설명과, 경제학을 필두로 한 인간행동이론의 다양한 분과를 제시했다.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미제스는 학계에서 유급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뉴욕 대학교는 1945년부터 1969년, 88세의 나이로 그가 은퇴할 때까지 방문 교수 직위를 주었으나, 그의 월급은 1962년까지는 보수주의-자유주의 단체인 윌리엄 볼커 기금이 지급했고, 그 후에는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단체 및 사업가 협회로부터 나왔다. 이렇듯 그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미제스는 점점 더 많은 학생과 열렬한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게 되었고, 그 역시 이들의 학업에 영감과 도움을 주었다. 그 자신의 놀라운 생산성도 계속 이어나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미제스는 자유시장 및 자유주의(libertarianism)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1946년부터 죽을 때까지 부업으로서 뉴욕 어빙턴 소재 경제교육재단(FEE) 소속으로 일했다. 1950년대에는 전미제조협회의 경제고문을 역임하며 자유방임 지지자들과 함께 일했지만, 이들은 결국 당대에 ‘계몽적’이라고 여겨진 국가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힘을 잃고 말았다.
콥던(Richard Cobden), 브라이트(John Bright), 그리고 스펜서(Herbert Spencer) 전통의 자유무역주의자 및 고전적 자유주의자로서 미제스는 경제적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유와 이성의 차원에서도 물론 자유주의자(libertarian)였다. 합리주의자로서, 그리고 모든 형태의 국가주의의 반대자로서 미제스는, 그 자신을 결코 ‘보수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고, 19세기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자(liberal)라는 표현을 더 선호했다.
실제로, 미제스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방임을 추구하는 급진주의자였고, 관세, 이민 규제, 또는 도덕을 강요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반기를 들었다. 동시에 그는 문화적·사회학적 맥락에서는 엄격한 보수주의자로서, 평등주의를 공격하고, 정치적 페미니즘을 사회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아 강력하게 비난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보수주의적 비판자들과 달리, 미제스는 개인의 도덕성과 핵가족 체제가 자유시장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강화되는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미제스의 인식론적, 그리고 정치적 관점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영향력은 주목할 만하다. 1920년대 그의 학생들은 비록 이후에 케인스주의로 전향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영원히 미제스의 영향력 하에 명백하게 남아 있었다. 하이에크와 로빈스를 포함하여, 프린츠 매클럽(Fritz Machlup), 고트프리트 폰 하벌러(Gottfried von Haberler), 오스카 모겐스테른(Oskar Morgenstern),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 휴 게이츠켈(Hugh Gaitskell), 하워드 S. 엘라이스(Howard S. Ellis), 욘 판 시클(John Van Sickle), 그리고 에리히 푀겔린(Erich Voegelin) 등이 미제스에게서 학문적 세례를 받았다.
드 골(De Gaulle) 장군의 경제 및 화폐 자문관으로 일하며 프랑스를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한 자크 뤼프(Jacques Rueff)도 미제스의 오랜 친구이자 추종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가 사회주의자에서 벗어난 것 역시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미제스의 오랜 친구 겸 자유시장주의 동료인 루이지 에이나우디(Luigi Einaudi) 대통령 덕분이었다. 반면 미국에서 미제스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호적이지 못한 학문적 여건하에서도 그는 헨리 해즐릿, 로렌스 퍼티그(Lawrence Fertig), 퍼시 그리브스 주니어(Percy Greaves, Jr.), 베티나 비엔 그리브스(Bettina Bien Graeves), 한스 F. 센홀츠(Hans F. Sennholz), 윌리엄 H. 피터슨(William H. Peterson), 루이스 M. 스파다로(Louis M. Spadaro), 이스라엘 M. 커즈너(Israel M. Kirzner), 랄프 라이코(Ralph Raico), 조지 라이스만(George Reisman), 그리고 머레이 N.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 등의 제자와 지지자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업가들을 비롯한 비학술인으로 구성된 아주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의 거대하고 복합적인 <인간 행동>은 첫 출판 이후 지금까지 아주 높은 판매고를 유지하고 있다.
1973년 10월 10일 뉴욕에서 92세의 나이로 미제스가 영면한 이후, 미제스의 가르침과 영향력은 다시금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미제스 사망 1년 후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경기변동이론을 이유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고, 미국에서 첫 번째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회의가 개최되었다. 미제스의 책들은 재판되고, 그의 글들은 문집으로 모아져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 대한 강의와 프로그램들이 전미 곳곳에서 성황 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 르웰린 락웰 주니어(Llewellyn Rockwell, Jr.)가 설립한, 앨라배마주 오번(Auburn) 소재의 루트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가 미제스의 부활과 미제스 경제학 교리의 확장 및 연구를 앞장서고 있다. 미제스 연구소는 학술지와 책을 발간하고, 초급, 중급, 그리고 고급을 모두 아우르는 다양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과정을 마련해두고 있는데, 이것이 미제스를 지지하는 학생과 교수의 수를 증가시키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회주의의 붕괴와 그로 인한 자유시장이 갖는 매력의 증대는, 이러한 인기의 상승에 크게 기여했다.
작성 : 머레이 라스바드 (Murray N. Rothbard)
번역 : 김경훈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