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언 매거진 제1호 (2021년)

The Austrian Magazine
작성일
2021-02-23 13:18
조회
1358

The Austrian Magazine vo.1, 2021 (보러가기)


페이지수 31
발행처 한국 미제스 연구소
발행인 전계운
편집인 전계운
부편집인 김경훈
디자인/레이아웃 전계운
연구소를 위해 기여해주신 분들 전용덕, 박형진, 김경훈, 한창헌 외 5인의 후원자 분들

한국에서 유일한 자유와 재산권의 보루인 미제스 연구소에서 오스트리언 잡지가 첫 출간되었다. 이 사회에 국가주의와 간섭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상황에서 잡지의 출간은 참으로 기념비적인 일이다. 오스트리언 잡지만큼 자유 시장과 재산권 그리고 자유에 헌신하는 급진적인 출판물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한 단어로 잘 표현해주는 것은 “오스트리언(Austrian)”이다.

위대한 자유주의 수호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1973년에 사망했을 당시 “오스트리언”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위대한 학자들을 지칭하는 형용사인 동시에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오스트리언 놈들”이라고 경멸하는 의미로 쓰여왔었다.

그러나 미제스의 정신과 철학을 계승한 머레이 라스바드, 데이비든 고든, 한스-헤르만 호페, 론 폴 등의 위대한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는 경이롭게 성장하였고 “오스트리언”은 명사로 굳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자유와 재산권을 일관적으로 급진적인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오스트리언” 혹은 “오스트로-리버테리언(Austro-libertarian)”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적 및 인종과 관계없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잡지의 네이밍을 오스트리언으로 하였다.

미국 미제스 연구소의 월간 잡지 이름 역시 “오스트리언”이다. 우리는 미국과는 다르게 오스트리언 잡지를 연간으로 출판할 것이다. 출판물은 미제스 연구소를 후원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우편을 통해 전달 될 것이고, 웹사이트에서는 무료로 공개할 예정이다.

오스트리언 잡지에는 놀라운 만큼 알차고 급진적인 콘텐츠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각 호마다 미제스 와이어에는 올라오지 않는 오스트로-리버테리언들의 흥미로운 아이디어들, 인터뷰, 서적 리뷰, 한 해 가장 많은 추천과 조회수를 얻은 미제스 와이어 두 편 그리고 외부 기고가들의 글들로 말이다. 그리고 재정 보고서도 포함하여 미제스 연구소의 예산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놓았다.

마지막으로, 첫 발간사를 빌려 미제스 연구소 구성원들과 후원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전용덕 미제스 연구소 아카데미 학장님은 누구보다도 자유주의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를 알리기 위해 헌신하셨다.

매달 미제스 와이어를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자유주의적 해법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김경훈 연구원은 도처에 분산되어 있는 수 많은 자유주의적인 콘텐츠를 한 곳으로 모으고, 해외 칼럼들을 꾸준히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자유주의 정론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노고가 컸다.

한창헌 수습 연구원은 해외 장편 칼럼들을 특히 경제학과 관련된 글들을 번역하고 소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한스-헤르만 호페 교수의 <자유주의자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출간하는데 있어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세 분의 기여를 더 열거하자면 이 지면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미제스 연구소를 후원하는 분들의 지지와 관심 덕분에 미제스 연구소는 본연의 임무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미제스 연구소가 당당히 한국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 덕분이다.

오스트리언 잡지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어떤 문의사항이 있다면 miseskorea@miseskorea.org로 연락 주시길 바란다. 다시 한번 미제스 연구소의 임무에 대한 여러분의 지지와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전계운, 한국 미제스 연구소 대표


한국 자유주의 운동의 아버지를 만나다― 전용덕 교수 인터뷰 <펼치기>

1. Life

MK: 학장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오스트로-리버테리언이 되셨나요? 타고나신 성향이나 삶의 모토가 자유주의적인 것이 오스트로-리버테리언이 되시는데 영향이 있었을까요?

20살(1972년)이 될 때까지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일 안하면 먹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그 때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근면, 자조, 협동’을 자주 강조했는데 나중에 그가 독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 말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박사과정할 때 내 주위에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던 학생들이 있어서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1989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정치권은 ‘대깨문’과 같은 전체주의 현상은 없었지만 당리당략을 위한 정치, 반대를 위한 반대, 간섭주의, 사회주의 등이 가득했다. 저런 정치가들과 경제참모들이 한국 경제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강력한 의심이 들었다. 다시 말하면, 주류경제학에 대한 의심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나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1년 11월에 미제스의 Liberalism, 바스티아의 법 등을 읽었다.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들을 여러 번 읽었다. 이후 대우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을 공동으로 저술했다. 그러나 공부하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좋은 경제학이 아니라고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다수의 의문을 마음에 품은 채, 1997년 안식년을 받아 UNLV대학에서 라스바드의 인경국, 인간행동 등을 구입하거나 복사해서 한국 돌아와서 빠르게 읽었다.

인경국이야말로 경제이론에 대한 의문을 말끔하게 해소해주었다. 그 이후에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라스바드의 자유의 윤리 등을 이해하고 번역하는 데 집중했다. 인경국을 잘 이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브레인워시가 필요한 책인데 그 당시 엉터리 경제이론을 많이 가진 나 같은 사람일수록 그 일이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MK: 머레이 라스바드 사후에 오스트리안이 되셨는데 직접 만나뵈셨거나 관계를 맺은 유명한 외국의 리버테리언 혹은 오스트리안이 있으신지?

UNLV대학에서 호페를 몇 번 만났고 한국 돌아와서도 메일을 주고 받았다. 피터 클라인도 논문에 대한 논평 때문에 몇 번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근래에는 두 분 다 연락해 본 적이 없다.

MK: 최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 입각한 경제사 연구에 집중하고 계시는데, 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서 다른 경제학자들이 서술한 한국경제사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 역사 해석에 오류가 적지 않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평소에도 역사에 관심이 많다.

MK: 지난 100년 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10-20년 주기의 경제위기를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데 주류경제학, 특히 화폐-거시 부문인 케인스 경제학은 그런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류경제학자들은 케인스 경제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제위기에 대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가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실질적인 설립자로 일컬어지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1912년에 ‘화폐와 신용의 이론’을 출간했다. 그는 그 책에서 정부가 독점 발행하는 법정 불환지폐야말로 반복되는 경제위기의 주범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법정 불환지폐를 폐지하고 민간 발행의 상품화폐 제도를 확립하면 될 것이다

MK: 최근의 세계적 경제위기는 코로나19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인데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하나요?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 경제위기는 다른 원인도 있다. 그것은 각국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인위적으로 인하하여 화폐공급을 크게 증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부분도 있다. 즉 이번 경제위기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화폐공급 증가로 인한 경기변동이 중첩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이번 경제위기의 해결책은 과거보다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주류경제학자는 그 점을 잘 알지 못한다.

2. Austrian

MK: 문재인 정부는 2020년의 경제위기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재정적자를 큰 폭으로 늘리고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 부채만으로도 780조 원(2020년 예상)이 훌쩍 넘어갈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부 부채가 급증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의 정부부채의 크기는 우리가 감당할만하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는데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은 정부부채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애초에 재정적자를 만들지 말 것을 제안한다. 게다가, 한국은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하여 향후 재정적자의 부정적 영향은 더 증폭될 것이다. 그 분기점을 2020년으로 보고 있다.

MK: 근래 한국의 청년실업은 어느 때보다도 높습니다. 노동조합, 연공서열제에 의존한 임금 체계 등이 높은 청년실업의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는 노동개혁은 고사하고 노동조합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노동조합에 대하여 어떤 대책을 제시하고 있나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노동조합은 노동자 일반을 위하는 조직이 아니라 현직에 있는 노동자를 위하는 조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임금을 올리는 과정에서 경제 내의 모든 비노조원은 소득을 재분배당한다. 노동조합은 폐지해야 마땅하다

MK: 미국 미제스 연구소의 대표 제프 다이스트는 경제학에 뿌리를 두지 않는 자유주의자는 나쁜 자유주의자일 확률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는 가치중립적 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에 있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인가요?

민간의 경제행위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나쁜 결과 또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설명한다. 자연히 경제행위에서도 자유가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런 철학을 가지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제프 다이스트는 이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MK: 다른 경제학파보다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는 방법론이나 인식론에 대해 매우 강조하는데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에서 방법론과 인식론의 중요성은 어떻게 되나요? 왜 다른 학파들은 이 주제를 무시할까요?

경제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value free)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학이 과학이 되기 위한 두번째 조건은 방법론과 인식론적 문제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해는 경제이론의 내용과 한계를 명확히 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MK: 간혹 소위 자유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중에서 박정희의 수출주도성장 정책을 자유주의적인 정책이라는 주장하는 연구자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과연 맞는 주장인가요?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박정희가 시행한 모든 정책은 잘해야 간섭주의이고 사회주의도 없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인이 저술한 ‘국가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당시 민간들은 자신들을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민간들이 노력한 결과만 보면 그것은 분명 한강의 기적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잘못된 제도 또는 정책으로 그런 노력의 상당 부분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박정희의 잘못된 제도 또는 정책은 민간이 만들었던 한강의 기적을 ‘한강의 보통 사건’으로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결과물이 바로 한강의 보통 사건인 것이다.

MK: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연구와 앞으로의 연구 계획은 무엇인가요?

지금 일제강점기의 경제사를 서술하고 있다. 서술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토지조사사업, 종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예민한 주제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3. Libertarian Mind

MK: 문재인 정권 열렬 지지자들은 현 정권에 대해 비판하는 자들을 집중 공격하여 비판자들에게 재갈을 물려왔습니다. 이런 집단적이면서 비이성적 행동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 행동은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전체주의는 결코 바람직한 정치철학이 아니다. 간섭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전체주의로 가서는 안 된다. 리버테리어니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MK: 자유주의의 발상지인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영향력이 없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와 리버테리어니즘이 한국에서 과연 자리를 잡을 있을지가 간혹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상 자유주의 생태계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자유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국과 같이 리버테리어니즘 생태계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 리버테리어니즘을 스스로 교육하고 외로움에 지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리버테리언은 북극성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MK: "라스바드의 자유주의는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이론은 좋지만 비현실적이다"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즉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이상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스바디안들은 자신들의 입장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에서는, 육체와 재능의 평등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이다. 즉 공산주의는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스바드의 리버테리어니즘 또는 아나코-자본주의에서 그런 비현실적인 목표는 없다. 리버테리어니즘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왕정과 민주정 하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등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제프 다이스트 - 새로운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지침서 (Jeff Deist - For a New Libertarian) <펼치기>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리버테리어니즘 그 자체보다는 리버테리언들에 대한 것입니다. 리버테리언들이 길을 잃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연설의 제목인 "새로운 자유주의자들을 위하여(For a New Libertarian)"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머레이 라스바드의 유명한 책 "새로운 자유를 위하여: 리버테리언 선언문(For a New Liberty: A Libertarian Menifesto)"를 연상하기를 바랍니다.

이 과소평가된 책은 아마 자유의 윤리보다는 덜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저자들이 자신의 책의 부제로 "선언문(a menifesto)"을 붙이지만, 그렇게 대담한 부제를 달고 있을 가치가 있는 책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리버테리어니즘은 정책을 추구하는 철학이다.(libertarianism, then, is a philosophy seeking a policy)"라는 머레이 라스바드의 명언을 좋아합니다.

나는 그가 오늘날의 리버테리어니즘이 어떤 방식으로 "공공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그가 이 명언을 고칠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그는 "리버테리어니즘은 더 나은 리버테리언들을 추구하는 철학이다(libertarianism is a philosophy seeking better libertarians)"라고 말을 바꿀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다.

나는 또한 "새로운 리버테리어니즘"이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제목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선대 사상가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는 위대한 사상가들 덕분에, 우리는 사상의 개발이라는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참 좋은 일인데,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새로운 이론을 개발해낼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상에 대해서는 행복한 중고거래상의 역할만을 맡으면 됩니다.

때때로 리버테리언들은 우리가 "현대성의 함정(modernity trap)"이라고 알려진 함정에 빠져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예컨대 지적인 전환이 없이도,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새로운 패러다임, 즉 새로운 "제3의 길"을 만들어내어 정부를 쓸모없게 만들 것이라는 상상은 일부 리버테리언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는 너무 평등하고, 민주적이고, 탈중앙화적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위계적인 국가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한다는 것이며, 또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이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흐름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동시에, 시민들이 진실을 명백히 목도하게 만듬에 따라 폭군들을 몰아낸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이 사실이기를 희망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엔, 오히려 국가는 이러한 세태에 맞추어 '국민적인(national)' 것에서 '초국민적인(national)'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글로벌리즘은 EU와 같은(그리고 그들의 NGO 공범들) 국가들 사이의 동맹으로 만들어진 신흥 카르텔에 의한 보다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의미합니다.

국제통화기금과 같은 국제기구 아래에서 중앙은행들 사이의 융합이 요구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인류역사에 필연적인 방향점이 있다는 결정론적 관점을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술적 진보의 경이로움으로부터 이익을 얻습니다. 특히 비트코인, 우버, 그리고 암호화 기술은 국가가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보다 어렵게 만들며 우리는 이를 환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기술의 발전이 정부가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조차 더 쉽게 만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이 계속 존재하는 한, 우리의 인간본성, 즉 정부를 형성하려는 완고한 경향은 영원히 문제로 남을 것이라 의심합니다. 경제적 수단이나 정치적 수단으로 인류를 조직하는 것은, 인쇄술의 탄생, 산업혁명, 전기의 발견, 또는 수 많은 엄청나게 많은 기술적 진보에 의해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디지털 혁명이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라 가정할 수 없습니다.

자유에 대한 라스바드의 생각은 거의 반세기가 훨씬 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라스바드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과 신체를 지배하는 존재자입니다. 즉, 자기는 자기 자신을 소유합니다. 이에 따른 필연적 귀결은 재산권, 즉 개인들은 자기 마음과 신체로 만들어낸 부산물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소유권과 재산권에 대한 생각을 통해, 우리는 언제 무력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 즉 자기방어를 고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소유권, 재산권, 비침해성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여러 집단이 똘똘 뭉쳐 스스로를 "정부"라고 칭할 때에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라스바드의 패러다임에서, 정부는 자기방어로 간주할 수 없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무력 또는 위협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효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라스바드의 패러다임은 아름답고, 단순하고, 논리적인 이론입니다. 물론, 최소한 세 가지 요소, 즉 개인의 자유, 재산권,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라는 개념은, 실질적인 인간의 진보를 위해 필요하며 또 존재합니다.

이집트 학자들은 다르게 말하고 있지만, 저는 피라미드가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없었던 소련의 과학자들은 시베리아 유배를 피하기 위해 핵폭탄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더 중요한 사실은, 자유와 인간의 진보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상적이고, 빈틈없는 자유에 대한 라스바드의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머레이 역시 나의 이러한 말에 단호하게 동의할 것입니다. 그 역시 사상과 교육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행동주의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머레이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했으며, 어떤 종류의 행동주의에 대해 말했을까요? 머레이가 살아있을 때이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문제입니다.

I. 자유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하다는 것을 인식하라

가장 중요한 점을 하나 말해보자면, 우리는 자유가 자연스럽고, 유기적이며, 인간 행동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는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몇몇 리버테리언들은 유토피아주의에 빠져, 자유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며 인간의 진화가 필요하다고 묘사하는 나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진보주의자들과 많이 비슷해보입니다. 인간이 마침내 가족과 부족에 대한 낡고 고리타분한 사상을 버리고, 순전히 이성적인 (항상 모든 것에 반대하는) 자유사상가가 되어, 종교와 신앙의 신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초인적 인간을 위하여 구시대적 윤리 또는 민족주의 또는 그것들 사이의 문화적 동맹을 깨부수어야만 자유가 통할 것이라는 생각말입니다.

그들은 물질주의를 제외하고 성적 집착과 부르주아적 가치 등의 구태의연한 생각들을 사람들이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들이 묘사하는 전형적인 리버테리언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일 싱가포르로 가서 직장에서 연봉을 2만 달러 더 받을 것마냥 행동하는, 거의 영혼이 없는 경제적 행위자입니다.

글쎄, 진실로, 인간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치 아인 랜드(Ayn Rand)의 소설에서 나오는 영웅적인 행크 리어든(Hank Rearden)의 무리마냥 연약하고, 허약하고, 계층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라스바드는 "새로운 자유를 위하여"의 말미에 있는 자유주의 전략에 대한 챕터에서 이런 주제에 대해 논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란 없으며 무한히 변화할 수 있고, 완벽해질 수 있으며, 새로운 질서의 이상적인 하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진보적인 이상주의자들의 생각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버테리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다고 라스바드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들어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호하는 구조에 사람들을 맞추려는 급격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며, 자유가 도덕적인 발전을 위한 올바른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사실, 오로지 리버테리어니즘만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스바드는 자유를 "탁월할 정도로 현실적"이라고 보았으며, 리버테리어니즘을 "인간과 세계의 본성과 정말로 일치하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사회를 조직하는 데 있어 매우 실용적인 접근법으로서, 또 이용가능한 대안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이고 자발적인 해결책으로서 최선인 것으로 이해하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거창한 비전과 유토피아를 선전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지저분하고 불완전한 세상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완벽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좌우명이 되어야 합니다.

II. 시민사회의 제도를 거부하기보다는 수용하라

저의 둘째 요점은 시민사회 그 자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리버테리언들이 수십 년간 시장을 열렬하게 포용하는 동안, 가족, 종교, 전통, 문화, 시민적 제도 또는 사회적 제도 등을 적대하는 비참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리버테리언들은 시장을 제외하고는 시민사회 자체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해본다면 상당히 기이합니다. 시민사회야말로 국가없이 사회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메커니즘을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자유와 인간본성에 대한 라스바드의 생각대로, 시민사회는 권력없이 유기적으로 조직화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소속되고 싶어합니다. 리버테리언들은 왜 이를 무시할까요?

가족은 항상 국가에 맞서 개인을 방어하는 최전선이었습니다. 정치인들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충성심의 원천이 가족이었음을, 또 그들에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도 가족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가족은 우리가 접하는 최초의 공동체로서 인간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환경입니다. 적어도, 이상적인 형태의 가족은 그렇습니다. 가족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지원을 제공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반면에 정부는 우리가 원자화되고, 외로워지고, 부서지고, 취약해지고, 의존적으로 변하고, 단절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가능한 일찍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거나, 공교육으로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복지와 세금을 이용해 꼼짝도 못하게 만들고, 결혼과 대가족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공적인 감시로 어떤 식으로든 유대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혼을 조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가정을 무너트리려 합니다.

이런 주장이 지나치게 우파적인 논점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강한 가족을 원합니다. 우리는 엘리트 가족을 원합니다. 우리는 정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부유한 가족을 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대가족을 원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실현 가능한 점을 주목해봅시다. 만약 미국 인구의 10%가 합리적으로 자유를 지향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이는 3,200만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각자 3명의 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우리는 1억 명의 자유의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역시 국가에 대항하는 또 다른 중요한 방어선을 형성합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종교의 역할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서구세계의 사람들은 높은 비율로 어떤 종교를 믿든 관계없이 여전히 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을 믿는 것 자체가 국가의 전지전능함과 지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교는 개인의 충성을 받는 것에 있어 국가의 잠재적인 경쟁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종교를 억압하려고 해도 결코 수면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성가신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과 신앙 외에도, 거의 모든 상상가능한 이익을 위한 공동체를 제공하는 비국가적 제도는 무한히 많습니다. 기업에서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도들이 국가권력없이 사람을 조직하는 시민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중요한 점을 하나 더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 더 리버테리언적인 사회가 보다 덜 방종적이고 문화적으로 더 보수적일 것이라는 믿음은 타당합니다. 국가의 중요성과 권력이 축소될수록,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시민사회의 제도들이 가진 중요성과 권력이 더 커진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더 리버테리언적인 사회에서는 자신의 생활방식과 선택에 대한 비용을 다른 사람에게 청구하는 것이 보다 어려워집니다.

당신은 별다른 조건없이 국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가족, 교회, 자선단체에게 도움을 의존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그 도움에 조건을 붙일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개인적 신념이나 생활방식, 혹은 선호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고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머레이 라스바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물론, 리버테리어니즘도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리버테리언들이 시민사회를 언제나 찬미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원하며 또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즉 공동체의 형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정부, 가족, 신, 사회, 도덕, 문명 등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리버테리언이 아니라 허무주의자입니다.

III. 정치적 보편주의는 리버테리언의 목표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사안은, 리버테리언들이 일종의 보편적인 정치적 합의를 옹호하려는 경향을 완고하게 가진다는 문제점입니다. 리버테리언들에게 정치적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은 사람들이 자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하여, 국가의 규모와 범위, 권력을 가능한 축소하고 자기결정을 가능한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리버테리언 원칙에 대한 생각은 보편적 리버테리언 정치라는 생각과 뒤섞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두자는 신조는, 문화적 요소와 종종 결합되어 보편적인 리버테리언 교리로 대체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리버테리어니즘을 보편적 진리로서 강요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리버테리언들은 종종 진보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처럼 보이곤 합니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지구상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합의를 지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리버테리언들에게 있어서, 다른 나라에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리버테리언적이지 않습니다. 리버테리언들의 정치적 목표는 보편적 가치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결정권의 급진적 옹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오콘들이 안락한 서구 세계에 있으면서 TV에 나와 시리아, 이라크, 북한, 러시아에게 무엇이 최선이며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설교를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충분히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리즌 매거진(Reason Magazine)>의 리버테리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것은 훨씬 더 고통스러우며, 심지어 정치적 그리고 전술적 실수입니다.

오늘날의 주류 보편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민주주의 투표는 군주정 이후의 세계의 신성한 정치적 권리이다.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로 변모하여, 강력한 사회안전망, 규제된 자본주의, 여성과 소수자들을 위한 법적 보호, 그리고 기타 사회문제에 대한 합의된 규범을 다루게 된다. 시민권에 대한 서구적 개념은 이제 모든 곳에 적용되고 있으며, 기술을 통해 우리는 국민국가의 오래된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좌파 리버럴들은 초국민적 행정국가(단일세계정부)를 강조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세계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무역계획과 "민주주의의 수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20세기에 보여준 공통점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정치적 협약이 전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고, 어디에서나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적어도 리버테리언들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보편주의는 글로벌리즘을 위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하지만, 글로벌리즘이 자유는 아닙니다: 대신에, 글로벌리즘은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정부를 만들겠다고 위협할 뿐입니다. 또한 보편주의는 자연법이 아닙니다. 사실 보편주의는 종종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진정한 다양성과 종종 대립하곤 합니다.

게다가, 실제로 보편적으로 합의된 것 조차도 사실 거의 없습니다. 정부의 통치, 권리, 종교의 역할, 이민,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 여러 개념들에 대해 하나로 합일된 기준은 없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관습법 전통을 보유한 서구세계에서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에 대한 존중을 얻는데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리버테리언들은 보편주의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기에 바쁩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는 글로벌리즘의 내러티브를 뒤흔들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증가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EU를 공격하고, 스코틀랜드, 카탈루냐, 벨기에, 안달루시아, 심지어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분리독립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갑자기 연방주의와 주들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는 워싱턴, 브뤼셀, 유엔, IMF 등 글로벌리즘 기관들에 등을 돌리고 싶어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메카는 파리가 아닙니다. 아일랜드인과 호주 원주민은 서로 다릅니다. 불교도와 자메이카 토착종교 신도는 다릅니다. 40대 미국인 아줌마는 러시아인과 다릅니다. 그들 모두가 철저한 라스바드주의자가 되기를 우리가 바래야 합니까? 리버테리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동성결혼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텍사스와 모나코는 동등한 국경경비태세를 갖추어야 할까요? 우리는 파리에서의 다음 번 테러를 막기 위해 텍사스와 동등한 수준의 총기법을 프랑스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까요?

아니면, 정치적 탈중앙화, 분리독립, 그리고 '보충성의 원칙(subsidiarity principle, 소단위의 법률이나 제도가 우선하고 소단위의 책임 범위를 넘어서는 단계에서 차상위의 제도가 적용돼야 한다는 법률용어)' 에 관심을 가지는데 시간을 더 보내는게 나을까요? 다시 말해, 몰타는 몰타인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보편주의를 거부하였으며, 자기결정권이 가장 지고한 정치적 목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머레이 라스바드는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쓴 저술 중 하나인 "동의에 의한 국가(Nations by Consent)"에서 유기적인 국가들이 정치적 국가들로부터 이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결정권이야말로 궁극적인 정치적 목적입니다.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자기결정이야말로 자유를 위한 길입니다. 70억명의 개인이 스스로를 완전히 지배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보다 단기적으로 볼 때 우리는 독일보다는 리히텐슈타인을, 영국보다는 룩셈부르크를 선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연방화에 있어 주의 권리를 지지해야 하며, EU의 해체를 응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카탈루냐, 스코틀랜드, 캘리포니아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방정부가 수도에 있는 입법부와 행정기관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것을 선호해야 하며, 따라서 다자간 무역거래를 거부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정부에 관해서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선호해야만 합니다.

정치적 탈중앙화, 분리독립, 보충성의 원칙, 무효화는 모두 우리를 보다 자기결정권이라는 정치적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해주는 원리입니다. 보편적인 정치적 합의를 주장하는 것은 리버테리언들에게는 매우 큰 정치적 실수입니다. 우리가 리버테리언인 이유는 세계의 75억 명의 사람들에게 최선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IV.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최근 블로거인 바이오닉 모기(Bionic Mosquito)와 나눈 이메일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 바이오닉 모기를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에게 여러분들 위해 가상의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울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유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물리적으로 싸울 것입니까? 이러한 싸움은 심각한 부상이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체포당해서 감옥에 가거나, 재산, 집, 소유물을 상실할 위험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물리적으로 공격을 당하거나, 혹은 가족이 공격당하면 싸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마 가까운 친구나 이웃을 위해서도 싸울 수 있겠죠.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는 완전히 낯선 사람을 위해서 물리적인 방어력을 행사할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노파가 강도를 당하고 있다면 말이죠.

만약 우리가 우리 마을과 지역 사회의 모든 이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외부 세력에 의해 물리적으로 침략당한다면, 아마도 마을과 지역 사회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재산을 위해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아주 격렬하게 싸우지는 않더라도요. 우리는 확실히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지만 집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차는 어떠한가요? 차를 몰고가던 중 무장강도를 만나면 물리적으로 싸울 것인가요? 아니면 죽음이나 부상의 위협을 감수하지 않고 그냥 차를 주고 넘어갈 것인가요?

지갑의 경우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정부가 그러하듯이, 누군가 소득의 40%를 가로채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요? 이를 막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인가요?

확실한 점은 우리가 비트코인, 망 중립성, 혹은 양도소득세의 인상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조국", 자유, 혹은 종교같은 추상적인 것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어떠한가요? 이러한 주제는 더 막연해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추상적인 것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왔고 또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직접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전장에서 그들의 동료를 위해서, 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개인적인 의무감을 채우기 위해서 싸운다고 말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민족, 조국, 신, 그리고 국가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리버테리언들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위협을 무릅쓰고 이런 요소들을 무시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ANNAUL REPORT 2020 <펼치기>

PRESIDENT'S REPORT

미제스 연구소의 창립자인 류 락웰(Llewellyn H. Rockwell, Jr.)씨가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1982년 미제스 연구소를 설립했었을 때 미제스의 부인 마르기트씨가 열성적으로 참여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도전과 큰 책임감에 직면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자유시장 사상을 마르키트씨의 엄격한 기준을 충족시키면서 홍보할 수 있었을까요? 다행히도 이 질문에 답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인 머레이 라스바드에게 새 연구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는 기뻐하면서 박수를 쳤고 흔쾌히 아카데미 부학장을 맡았습니다. 이 일만큼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없었습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머레이를 가장 높이 평가했습니다. 머레이의 위대한 작품인 <인간,경제,국가>를 두고 인간행동(Human Action), 인간행동학(Praxeology)의 일반적인 과학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서 가장 정교한 경제학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저는 미제스의 경제학을 발전시키는 방법은 라스바드를 가이드로 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제스가 왜 머레이를 훌륭한 제자이자 후계자로 여겼는지 쉽게 알 수 있는데, 머레이는 경제, 역사, 철학, 정치 이론, 그리고 수많은 다른 주제들을 막힘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머레이는 상아탑에 속한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유에 헌신했고 약탈적인 국가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금본위제를 회복하고, 연준을 폐지하고 비(非) 개입주의 외교정책으로 회귀하길 원했습니다. 그는 경제학에서 타협 없는 자유시장을 선호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합니다.”

저 역시 지난해에 미제스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도전과 큰 책임감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그대로의 자유주의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를 대중들에게 홍보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다행히도 락웰에게 라스바드가 있었듯이 저에게는 라스바드처럼 비타협적인 길을 고수해온 전용덕 학장님이 계셨었습니다. 학장님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이론 응용을 통해 한국 역사를 오스트로-리버테리언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큰 업적을 남기셨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앞으로 미래와 그리고 과거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떤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미제스와 라스바드가 남긴 유산과 그리고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후대 학자들이 남겨논 수 많은 글들과 논문, 영상들을 한국 미제스 연구소의 웹페이지나 유튜브, 미국 미제스 연구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남겨놓은 유산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지식, 논리의 정교함과 일관성, 건전한 윤리 의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와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를 모르고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원인을 진단할 수 없음은 물론, 10~20년 주기로 찾아오는 경제적인 고통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피하고, 자유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미제스 연구소는 자유의 거인들이 남긴 유산을 한치의 왜곡 없이 전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미제스 연구소의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이 일의 시작을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훌륭한 기부자분들의 관심과 지지입니다. 항상 마음 깊숙이 감사드립니다. 2021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OUR MISSION

2019년 9월에 설립된 미제스 연구소는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전통의 오스트리아 경제학, 개인의 자유, 올바른 역사관, 국제 평화관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미제스 연구소는 세금과 인위적인 통화가치의 절하, 그리고 강압적이고 독점적인 국가 보호 서비스를 거부하고, 자유 시장 자본주의 경제와 사유 재산 질서를 추구합니다.

OUR PRINCIPLES

미제스와 라스바드는 인간행동에 대한 연역 과학인 인간행동학(praxeology)을 창안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옹호하는 것이며 동시에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학문적 방향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 토대이며, 신고전학파의 수학적 모델과 가설적인 방법론을 반대합니다.

세부 재정 내역(수입)

1. 미제스 연구소의 수입은 자발적인 기부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입니다. 정부의 프로젝트와는 어떤 연계도 없을 예정입니다.

2. 기부 주 경로는 검로드로 통한 기부와 계좌이체를 통한 기부 두 곳이며, 계좌이체로 통한 기부금은 주로 예산 지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3. 검로드는 추후 패트리온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4. 패트리온 시스템으로 변경 시 공지하겠습니다.

세부 재정 내역(지출)

1. 미제스 연구소의 예산 지출은 크게 개발/운영관리/일반으로 나누어집니다.

2. 개발은 카드뉴스 및 명언 제작, 영상 제작, 전자책 및 인쇄물 제작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3. 운영관리는 사이트 유지 및 보안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4. 일반부문은 주로 기타 잡부금 및 광고료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2020년 재정 수입 (원, 달러)


기부금(Contributions) 666,433원 ($ 603.11)
자본금(Capital) 966,910원 ($ 860)
Total 1,633,343원 ($ 1478.14)

2020년 재정 지출 (원, 달러)


개발비(Development) 668,000원 ($ 604.52)
운영관리(Management) 649,477원 ($ 587.76)
일반(General) 320,446원 ($ 290)
Total 1,637,923원 ($ 148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