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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 와이어 2021년 1월호] 리버테리언이여 일어나라!!

국내 칼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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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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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덕
* 미제스 연구소 아카데미 학장
* 경제학 박사 (대구대학교 무역학과 명예교수)

주제 : #경제사

미제스 와이어 2021년 정기칼럼 목차 <펼치기>

2021년 새해가 밝았다. 2020년 1월 '미제스 와이어'를 발표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2021년 새해를 맞았다. 2020년 1월에 2020년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검토했어야 했는데 미제스 코리아를 창립하는 데 신경 쓰느라 그런 기회를 놓쳤다. 이번 호에서는 과거를 회고하고 그를 토대로 2020년대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조선왕조부터 시작한다. 조선왕조는 군주정이면서 세습 독재 체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왕조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그것도 일부 양반-만이 인명, 재산, 자유 등이 적당히 보호되었다. 다른 신분, 특히 노비와 천민 등의 인명, 재산, 자유 등은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조선왕조 말기는 삼정(환곡, 전정, 군정)의 문란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삼정의 문란이란 국가의 전 영역에서 전 계층의 인명, 재산, 자유 등이 극도로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분에 의한 인명, 재산, 자유 등에 대한 제한과 차별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1894년 갑오개혁에서 신분제와 관련한 개혁의 내용만을 보고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양반·상인(常人) 신분제, 문벌, 문무차별, 서얼차별, 공사노비제도, 과부재혼금지제도, 조혼제도, 칠반(七班) 천인을 포함한 천민제도, 연좌제도 등의 폐지, 인신매매 금지, 종래 말업으로 취급해 오던 상업에 대하여 구관인(舊官人), 양반의 상업 경영의 자유화, 즉 직업의 신분적 차별 폐지, 귀천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선용(選用), 평민의 정치적 의견 제출 승인 등이다. 앞에서 나열한 것은 1894년에 행해진 신분제와 관련한 개혁 내용만을 간추린 것이다.

농업에서 중요한 토지는 국가 소유였고 개인은 그런 토지에 대해 점유권만을 가졌다. 이것은 토지라는 재산이 제도적으로 잘 보호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런 점유권마저도 개인이 만든 문서에 의해 입증되었다. 특히 노비는 토지, 가옥 등에 대해서 그런 점유권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권리는 잘 보호되지 못했기 때문에 토지 거래는 매우 불안전했고 분쟁이 잦았다. 무엇보다도, 조선왕조 말엽에 오면 지배 계급의 사치와 낭비, 부정부패, 권력독점에 의한 매관매직과 가렴주구, 뇌물, 공금횡령, 포흠, 화폐공급 관리의 실패 등의 문제가 심각했다.

한 마디로, 조선시대는 봉건·신분제 국가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민간의 생명, 재산, 자유 등은 잘 보호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소수의 지배 계급 또는 집단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자유가 없었고, 헐벗고 굶주렸으며, 외침을 막을 수 없었다.

필자는 '신분제와 자본주의 이전 사회'라는 책(2017)에서 조선왕조가 노비제를 중심으로 한 신분제 국가였기 때문에 그런 사회를 '자본주의 이전 사회'라고 규정했다. 자본주의의 조건으로 자유노동이 필수이고 노비는 노예노동으로 생산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개화세력은 1894-1895년 기간에 신분제 폐지를 포함한,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도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이용하고자 했던 개화세력은 친일세력이라는 이유로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에는 궁지에 몰렸다. 그 결과로 개혁 프로그램도 온전히 실천되지 못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내정 간섭을 막아보고자 했던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김홍집 총리를 비롯한 친일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김홍집 총리와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거리로 끌려나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다른 대신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일본 등으로 망명했다. 조선왕조 5백년 역사에서 자유의 확대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개화세력은 갑오개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뒤이어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뒤돌아보면, 고종의 결정은 보수 반동이었다. 고종, 대원군, 민비와 그 일족들 등은 국가의 정치철학을 결정함에 있어서 큰 잘못을 범했다.

이제 일제강점기를 고찰한다.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의 근대문명은 상당 부분이 식민지 한국에 이식되었다. 군국주의 국가 일본이 토지의 국가 공인 등기를 확립하면서 자연스럽게 토지의 개인 소유권 제도도 확립되었다. 이로써 토지에 대한 권리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잘 보호되었다. 국가 등기 제도의 확립은 근대 금융기관인 은행의 발달을 초래했다. 토지를 담보로 제공하는 데 국가 등기 제도가 주춧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철도, 전기, 전화, 전차, 버스 등과 같은 서양문명이 도입되었거나 그 이용이 크게 늘어났다.

다른 한편, 일제강점기는 군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약탈성, 폭력성, 야만성 등도 다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예를 들어,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쌀은 '공출'되었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공출은 법과 폭력에 의해 몰수되는 것이었다. 쌀을 조선총독부에 공출 당했던 농민은 그 대금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총독부가 지정하는 예금에 저축할 것을 강요당했다. 소위 '강제저축'인 것이다. 게다가, 일본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인명, 재산, 자유 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이 때 사법은 2심 재판이었다. 일본은 이미 3심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식민지 기간의 생산성은 크게 다섯 가지에 의해 결정되었다. 첫째, 식민지 기간의 경제체제가 강력한 간섭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금융산업은 금융사회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간섭주의는 각종 재화의 가격에 대한 규제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쟁 사회주의로의 진입은 식민지 한국 경제의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두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보다 생산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가 자본주의였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둘째, 식민지 기간에는 봉건제도 여전히 잔존했다. 잔존했던 봉건제로 서당, 노비제(1894년 갑오개혁에서 혁파되었지만 한국전쟁까지 일부 잔존했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봉건제는 식민지 기간 동안의 생산성을 적지 않게 떨어뜨렸다. 그러나 봉건 요소는 식민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축소되면서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향상되었다.

셋째, 식민으로 인한 수탈과 차별도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수탈과 차별은 대부분 제도화된 것이기 때문에 외부 관찰자가 식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른 한편, 수탈을 자율거래로 오인할 여지도 없지 않았다. 그 거래가 형식적으로는 자율거래인처럼 위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식민지 한국인이 수탈이나 차별을 회피할 방법은 없었다.

넷째,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도입 또는 투입된 대량의 자본, 기술 등으로 생산성이 크게 높아졌다. 자본, 기술 등의 도입의 시작은 192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것들의 본격적인 도입은 193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러나 그런 자본에는 단순한 신용수단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본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경기변동, 인플레이션 등을 초래했다.

다섯째, 식민지 한국인의 자발적인 노력도 생산성 향상에 작지 않게 기여했다. 그러나 군국 일본은 농업에는 자원을 과다하게, 공업에는 자원을 과소하게 배분되도록 경제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식민지 한국인의 노력을 상당 부분 허공에 날려버렸다.

종합하면, 앞에서 지적한 다섯 가지 요인은 시기별로 나타나는 정도가 모두 달랐을 뿐 아니라 그것들이 합쳐져서 경제성장의 크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1937년 이후는 전쟁 사회주의로 진입하면서 그 이전의 모든 노력을 상당 부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식민지배의 핵심은 군국주의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라는 개념은 틀린 것이다. '군국일본강점기'가 정확한 표현이다. 폭력성, 약탈성, 야만성이라는 관점에서 군국주의는 제국주의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진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야만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이다. 생명, 재산, 자유라는 측면에서 군국일본강점기가 조선왕조보다 더 좋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면 식민의 유산은 무엇인가? 혹자는 일본이 남겨준 철도, 각종 공장과 시설, 기술자들과 기능공들 등을 유산으로 간주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앞에서 필자가 지적한 문제점에 비추어 그런 주장은, 비록 틀리지는 않았지만, 한계가 있다는 점을 즉각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식민 지배의 소프트웨어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일본 식민 제국, 1895-1945'를 저술한 마크 피티(Mark Peattie)는 식민 유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일본의 조선 사람들에 대한 궁극적 유산은 그들에게 민족적 의분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조선학자 이정식(李庭植)이 지적한 것처럼, '일본은 그의 조선 정복과 지배를 통해 조선의 민족주의를 일깨우고 키웠다. 일본은 조선 민족주의의 부정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상징을, 즉 민족의 적을, 제공했다.'”(복거일,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p. 403 재인용)

식민지 유산을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이지 하드웨어가 아니다. 식민지 시대 청산의 최대의 과제는 정치철학적으로는 군국주의, 경제체제로는 사회주의와 간섭주의를 폐지하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우리 가슴속에 새겨진 '반일 민족주의'를 청산하는 것이다. 반일 민족주의를 지워버리는 일에 비하면 친일 청산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검인정 교과서와 국공립학교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반일 민족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미군정이 비록 짧은 기간 통치했지만 그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군은 남한 뿐 아니라 서독에도 진주했다. 그러나 서독과 남한의 성장경로는 완전히 달랐다. 미군정은 두 지역에 진주하면서 강력한 간섭주의와 사회주의를 실시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서독에서는 에르하르트라는 자유주의자 정치가가 모든 재화의 가격을 자유화했지만 남한에서는 그런 기회가 미군정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다. 그 결과로 서독은 폐허에서도 즉각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강력한 간섭주의와 사회주의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무너무 어려운 삶을 살았는데 미국의 원조가 그런 삶에 그나마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1공화국에서도 한 동안 지속되었다. 일부 개선된 부분이나 산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해방이 되면서, 반일 민족주의 청산과 함께 1937년 이후에 도입된 전쟁 사회주의와 간섭주의를 폐지하는 것도 그 중요성이 작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정도 1공화국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채로 6·25전쟁을 맞았다. 1공화국은 농지개혁을 단행했지만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었다. 1공화국 이후 모든 정부는 갑오개혁과 같이 자유를 크게 확대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반일 민족주의 청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3공화국을 포함한 모든 정부의 공통점은 간섭주의와 사회주의가 경제체제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다만 시기별로 조금씩 경제체제의 차이가 없지 않지만 말이다. 이명박 정부부터 복지국가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복지국가주의는 간섭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 체제로 볼 수 있다. 3공화국을 포함한 모든 정부의 정치철학은 국가주의이다. 경제체제로는 간섭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전체주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너무 자주 들린다. 게다가, 복지지출은 폭증하고 있고 그 결과로 국가 부채는 무섭게 늘어나고 있다. 그런 만큼 점점 더 민간의 생명, 재산, 자유 등은 파괴되어 왔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최대 과제는 민간의 생명, 재산, 자유 등의 보호를 확대하는 것이다. 정치철학적으로는 군국주의와 국가주의를 청산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반일 민족주의를 청산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모든 정부는 어떤 것도 실천하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 이후 모든 정부는 필자가 주장하는 방향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를 우리는 지금 보고 있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암담할 것이다.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2020년대 우리가 성취해야 할 목표는 리버테리어니즘이지 국가주의가 아니다. 전체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경제체제로는 자본주의이지 간섭주의와 사회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2008년 국제경제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이다. 우리가 국가주의, 전체주의, 간섭주의, 사회주의 등을 잘 안다면, 한국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아야 한다. 미제스가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생명, 재산, 자유 등이 우리 모두의 어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리버테리언이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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