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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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 라스바드, 그리고 호페의 기초

해외 칼럼
철학
작성자
작성일
2020-01-02 17:11
조회
1771

CJay Engel (사업가, Bastion Magazine 대표)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개요

원문 : Foundations in Mises, Rothbard, and Hoppe (Bastion Magazine)
번역 : 김경훈 연구원



이 글은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Austro-Libertarianism) 지적 체계의 위대한 공헌자 미제스, 라스바드, 그리고 호페 사이의 약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세 사람 모두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영역에 속한다는 점은 물론 확실하며, 사실 이 체계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겼지만, 이들의 사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 점을 인식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세 사람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그들이 발전시킨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이론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면모이다.

경제학, 윤리학, 그리고 정치이론(이는 사회적 강제의 정당화에 대한 논의로, 응용윤리학이라 볼 수 있음)에 적합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논쟁은, 전부 지식에 대한 연구, 즉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루트비히 폰 미제스 <인간행동>의 첫 백 페이지 가량이 순수한 인식론에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인식론은 상당히 건조한 주제지만,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어떤 사상을 옹호하고 논증하기 위해서는, 지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입장에 대한 정당성 없이 논쟁을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경험적 기초에 근거한 다른 경제학파들(통화주의, 케인즈주의, 마르크스주의, 고전주의 등)을 거부하며, 오스트리아학파의 합리주의와 선험적 기초를 옹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지지한다는 것의 의미는, 경제학 진술이 경험 혹은 경험적 관찰과는 무관하게 이해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경제학은 감각경험이 아니라 선험적 논리법칙에 의해 유도되는 '사실'이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다수의 경제학파들과 다르게 ,오스트리아학파는 자료와 통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논리적 논법이 틀린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이상,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경험적 관찰에 의해 반증될 수 없다. 어떤 실험과 역사적 분석으로도 1+1=2 라는 사실을 왜곡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경제학 이론의 기초


오스트리아학파 방법론의 출발점은 "인간은 합목적적으로 행동한다(human beings act purposefully)" 라는 명제이다. 이 기초로부터 더 많은 경제학 진술들을 추론하고 도출한다. 미제스는 경제학의 "공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진정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미제스와 호페는 라스바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출발점을 정당화한다. 신칸트주의자인 미제스와 호페는 합리주의적으로 공리를 정당화한다. 미제스와 호페는 자신들의 공리를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곧 자기논박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인간도 합목적적으로 행동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합목적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행동의 공리"는 논리법칙을 응용한 결과이며, 선험적 사고방식에 기반하고 있다.

<경제과학과 오스트리아학파 방법론>의 19페이지 에서, 호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이러한 "선험적 종합" 공리를 자명하게 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일단 심리적으로 그것들이 명백하게 느껴지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험적 종합 공리를 듣자 마자 바로 그 자명성을 이해할 것이다. 사실 칸트는 나뭇잎이 푸르다는 것 같은 어떤 경험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 보다, 선험적 차원의 공리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선험적 공리가 자명한 이유는, 자기 모순 없이는 그 것의 진실함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선험적 공리를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제로 그것이 진실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이 모든 점에서, 미제스는 칸트를 추구한다.

미제스와 호페와 약간 다르게, 라스바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험적 전통에 자신의 인식론적 뿌리를 내린다. 라스바드는 "인간은 합목적적으로 행동한다"라는 진술을 경험을 통해서 추론하는데,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기 때문이다. 라스바드는 그의 에세이 <극단적 선험주의를 옹호하며> 에서, 자신과 미제스의 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가 행동 공리를 "선험적"으로 생각하든, "경험적"으로 생각하든, 그것의 타당성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철학적 입장에 달려 있다. 미제스 교수는 신칸트주의 전통에서 이 공리를 사고의 법칙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에 선행하는 선험적이고 정언적인 진리라고 주장한다. 나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은 칸트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공리를 다르게 해석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행동의 공리가 사고의 법칙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법칙이라 생각하고, 따라서 "선험적"이기 보다는 "경험적"이라고 파악할 것이다.

정치 이론의 기초

정치이론과 윤리학 영역에서 이 세 명의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지식인들은 좀 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제스는 라스바드나 호페의 아나코-캐피탈리즘 만큼 리버테리언 원칙을 취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리버테리언 전통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자유 사회에 대한 미제스의 사례는 효용주의적이었다. 미제스는 자유시장체제가 너무나 강력하고 인류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파시즘, 간섭주의, 그리고 이들의 모든 변용들과 비교해봐도 우월하고, 따라서 반드시 요구되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체제라고 보았다.

번영과 융성히 성장하는 인간사회의 미래란 오직 자유사회만이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이다. 어떤 정부라도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자유사회 대신에 행동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경제학 이론에 근거해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된다. 그리고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의 유익함에 대한 미제스의 모든 진술은 옳았다. 한스-헤르만 호페가 <사유재산의 경제학과 윤리학>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미제스]는 죽음보다는 삶을, 병보다는 건강을, 가난보다는 풍요를 선호한다. 미제스는 특히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삶의 질을 누리는 것을 일반적 목적이라고 가정한다. 실제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 미제스는 경제학자로서 선택이라는 행동을 올바르게 유도해 줄 수 있는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권장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경제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범위에만 한정된다.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미제스의 견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번영을 궁극적인 목표로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라스바드가 지적했듯, 경제학적 분석은 자유방임주의가 장기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생활수준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렇다면, 경제학적 진실에 완벽하게 동의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복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 어떤 경제학자도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는 특권이나 보조금이 악영향을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왜 장기적인 사회복지가 최우선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빈곤을 그 자체의 궁극적 가치라고 주장하거나, 평등과 같은 다른 궁극적인 가치를 가져오는 수단을 주장할 수 있지 않은가?

즉 호페는 미제스가 자유시장의 잠재력과 그 필연적 결과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칭찬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왜 좋은 것인가? 경제학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규명할 수 없다. 강력하고 부유한 폭군들은 자본주의가 자유시장이 만들어내는 만인에 대한 번영을 바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미제스는, 윤리학적 진술들이 이성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직 효용주의만이 미제스가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윤리적 입장이었다.

라스바드는 스승의 효용주의를 거부했다. 라스바드가 현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대주의적 해결책을 거부할 용기를 가졌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그는 높게 평가될 가치가 있다. 미제스는 확실히 문화적 상대주의자는 아니었고, 사실 구 시대의 매너리즘, 행동양식, 그리고 사회적 가치 등을 옹호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이러한 품성은 순수한 이성적 추론을 통해 정당성을 얻은 것은 아니고, 그저 그의 출생지인 오스트리아의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나온 것 이었다.

효용주의에 반대하면서 라스바드는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초월적 윤리를 추구했다. 라스바드의 자연법 리버테리어니즘은 인간이 육체와 외부 재산에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규범적 명제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 소유권은 그것의 소유자가 해당 재산을 사용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가짐을 의미한다. 소유권의 이런 성격은 비소유자에 의한 재산의 사용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도 그러한 권리 행사를 막을 도덕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물론 이 명제는 인간의 재산 사용이 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잠재적 충돌 위협이 없다면 그런 규칙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라스바드는 효용주의가 아니라 재산권 사회질서가 진정으로 윤리적 성격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엄격한 선험주의자인 호페는, 라스바드의 자연법 경험주의뿐 아니라 미제스의 효용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의 견해는, 리버테리언 윤리이론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이론과 같은 방법론으로 방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전회인데, 그가 자신의 생각을 처음 소개 했을 때, 리버테리언 공동체에서는 호페의 견해에 대한 뜨거운 찬반논쟁이 일어났었다. 만약 우리가 미제스가 효용주의자이고, 라스바드가 토미스트(역주: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사람)라고 말할 수 있다면, 호페는 사유재산권 질서에 인간행동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갈등을 막는 규범을 제공하는 것이 정치이론의 목표라고 주장한다. 만약 갈등의 가능성이 없다면, 정치이론 역시 필요 없다. 또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자원이 희소한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산배정규칙이 요구된다. 이런 규칙들 중 어느 하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즉 정치이론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기소유권을 전제로 해야 한다. 처음부터 그가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고 또 정당화할 수 있게 해주는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인간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호페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논리적 가능성을 경제학적 "행동 공리"에서 발견한다. 인간이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때, 그러기 위해서는 논쟁에 참여해야만 하고,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활용해 어떤 활동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전제조건과 모순된 행동을 하게 될 뿐이다. 따라서 호페는 리버테리어니즘을 제외한 어떤 정치 이론도 모순된다고 간주한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호페의 주장은 우리가 반드시 리버테리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호페는 누군가가 훔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이성적으로 설명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는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를 완전히 피하려고 노력해왔다.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고서는,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정치질서를 제외하곤 어떤 정치질서도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없다.

비평가들은 "왜 자신을 반박하는 것이 나쁜가?"라고 물으며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범죄자나 정치인은 논리의 법칙에 대해 단 한 줌의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 호페 역시 이런 비평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그는 오직 이성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가 비합리적인 것보다 이성적인 것을 선호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권 원칙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고 확장하여야 한다. 물론 그런 확장은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권을 전제해두고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인간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 마음일 뿐이며, 그의 육체는 그의 소유물일 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재산권 이론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이론은 인식론적 토대가 필요하다. 그 위대한 논쟁은 정확히 그 토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세계의 차이점을 연구하는 것은 보람있고, 빛을 발하는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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