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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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이에크가 아니라 미제스인가? (미제스 연구소는 왜 미제스 연구소인가?)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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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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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9

Hans-Hermann Hoppe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개요

원문 : Why Mises (and not Hayek)?
번역 : 김경훈 연구원



나의 오랜 친구 랄프 라이코가 1996년에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F.A. 하이에크는 오늘날 가장 뛰어난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시에 그들은 가장 유명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두 분 모두 훌륭한 학자이자 위대한 인간이었으며, 운좋게도 나는 두 분 다 나의 선생님으로 모실 기회를 가졌다. 하지만 세계가 이 둘을 매우 다르게 대우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제스는 그가 영면하고 바로 다음 해에 하이에크가 수상한 노벨경제학상에 거부당했다. 자유기업의 대변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때 하이에크는 종종 대학과정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반면 미제스는 미국 학계에서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다.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단체들 사이에서도 보통 미제스는 무시되거나 뒷전으로 밀려나지만, 하이에크는 명예롭게 언급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추측하고, 왜 내가 (그리고 미제스 연구소 대부분이) 반대로 하이에크가 아니라 미제스를 더 선호하는지 설명하고 (또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싶다.

나의 주안점은, 미제스에 비해 하이에크가 보유한 더 큰 명성이, 경제학과 관련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경제학은 거의 차이가 없다. 실제로 하이에크 경제사상의 대부분은 미제스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이 사실만으로도 경제학자 미제스는 경제학자 하이에크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하이에키안은 숙련된 경제학자가 아니다. 하이에크가 경제학자로서 처음 명성을 얻게 된 책인 <Monetary Theory and the Trade Cycle>와 <Prices and Production> 등을 읽은 하이에키안은 거의 없다. 그리고 나는 그의 <Pure Theory of Capital>를 제대로 연구한 하이에키안이 오늘날 10명 이하에 불과하다고 감히 추측한다.

오히려 하이에크의 명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그 자신의 온전한 산물, 즉 하이에크가 학문적 삶 후반부에 전개한 정치철학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하이에크와 미제스의 차이는 실로 두드러진다.

나의 견해는 내 친구 랄프 라이코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하이에크는 전혀 고전적 자유주의자가 아니었으며, '급진적 자유주의자(Radikalliberaler)'도 아니었다. 하이에크는 사실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인데, 우리가 사회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이에크가 '존경받을만'하고 또 '현명한' 학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당신도 기억하겠지만,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모든 정당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역주: 물론 그들을 계몽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헌정되었다. 그리고 모든 정당의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그 자신을 '자유주의자(liberal)'로 내세우기 위해 하이에크를 인용하며 그 빚을 갚는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서, 나는 주로 하이에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이론적 공헌으로 간주되는 <자유헌정론>과 세 권 분량의 <법, 입법, 그리고 자유>에 주로 의존한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정부의 기능이 단지 외부의 적에 맞선 방어 및 질서 유지를 위한 법 집행, 즉 고전적 자유주의가 말하는 작은정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 사회에서 정부는 "시장에서 다양한 이유로 제공될 수 없거나 적절하게 제공되지 않는 많은 서비스를 세금에 의존한 자금 조달을 통해 공급할 수 있다." 시장이 언제나 모든 상품과 서비스들을 완벽하게 제공해 줄 수는 없는 법인데, 하이에크는 정부에게 이를 공급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이 상품과 서비스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폭력, 전염병, 홍수나 산사태 같은 자연재해로부터의 보호, 현대 도시에서의 삶을 보조할 많은 편의 시설과 거의 모든 도로의 건설, … 측정기준, 토지 등록 제도, 지도 제작, 통계 수집 등 시장에서 공급되는 재화 혹은 서비스의 품질을 검증할 다양한 정보.

여기에 더해 정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정한 최저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또 "민간 투자가 시들어 질때 간섭할 수 있어야 하며", 학교와 연구소의 재정을 지원하고, "건축법규를 관리하며, 음식물의 품질을 보장해야 하고, 특정 전문직에 대한 인증제를 실시해야 하며, 몇몇 위험물, 예컨대 무기, 폭발물, 독, 마약 등의 거래를 제한한다. 그 외에도 생산과정에 대한 보건감독을 담당해야하고, 극장, 스포츠, 경기장 및 기타 기관들을 제공해야 한다." 심지어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개인의 동의 없이 재산을 갈취할 권한(수용권) 역시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하이에크는 일반적으로 "부와 인구가 전반적으로 증가하면 할 수록, 시장에서의 자발적 거래가 아니라 오직 집단적 행동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필요의 비율 역시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이익의 합계가 손실의 합계를 초과한다면", 전 국민에 대한 강제 적용을 전제로 하는 광범위한 보험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이는 더 큰 강제, 즉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막기 위한 것 이다. 공공주택의 건설 역시 정부가 할 수 있는 과제 중 하나이며, 마찬가지로 도시계획과 도시 구역 분할 역시 이득이 손실을 초과하는 경우에 적절하게 정부에 의해 주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락 및 편의시설의 제공, 예컨대 자연의 아름다움, 역사적 유적지, 혹은 기타 과학적 관심사의 보전 혹은 그 곳에서의 휴양"을 보존하기 위해 국립공원 혹은 자연보호구역을 설치하는 것 역시 적법한 정부과제이다.

추가적으로, 하이에크는 정부가 얼마나 거대한지, 또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조치가 특정한 요건을 충족시키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은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정부 활동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의 성격이다." 즉 세금 그 자체는 물론, 극도로 높은 세율 역시 하이에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금과 마찬가지로 하이에크에게 있어서는 징병제 역시 강제로서의 성격을 잃는다.

만약 적어도 특정 제도가 가진 강제들이 예측가능하고, 개인이 그의 역량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시행된다면, 이런 조치는 강제의 사악한 본성을 대부분 박탈시켜준다. 만약 얼마나 많은 세금을 지불하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군복무 기간이 내 경력에서 예측가능한 부분이라면, 나는 이 예측을 기초로 하여 나의 계획을 짤 수가 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스스로 만든 삶의 일반적인 계획을 따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과는 무관할 수 있다.

이것이 하이에크가 세금과 징병제를 정당화하는 논거이다.

나는 자유와 강제에 대한 하이에크의 모호하고 모순된 정의를 인용하면서 그를 계속 비판할 수 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나의 주장을 펼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연 어떤 사회주의자 혹은 환경주의자가 하이에크의 이런 주장을 거부하는지를 묻고 싶다. 하이에크에 따른다면, 사회주의자들 역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자유주의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제스는 매우 전적으로 하이에크와 반대 견해를 가진다. 미제스에게 있어 자유주의는 곧 사유재산이다. 그는 국가를 합법화된 권력으로 인식하며, 국가의 유일한 기능은 반사회적 요소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미제스에게 정부는 그저 "무장한 사람, 경찰, 헌병, 군인, 교도관, 사형집행인의 고용기관이다. 정부의 본질적 특징은 폭력, 살해, 구속에 근거한 법령의 집행이다. 더 많은 정부간섭을 요구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더 많은 강제와 더 적은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게다가, (미제스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미제스조차 아나키스트는 아니었다고" 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젊은 미제스는 분명 개인의 수준에 까지 이르는 무제한적 분리독립을 허용한다. 만약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러한 분리는 바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다. 늙은 미제스 역시 결코 이 입장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제스는, 나의 지적인 주인 머레이 라스바드가 지적했듯이, 자유방임 급진주의자이자, 극단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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