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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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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의 영원한 유산 (미제스의 경제학적 업적)

해외 칼럼
인물
작성일
2020-01-07 14:07
조회
1039

Jörg Guido Hülsmann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앙제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의_역사

원문 : Mises’s Lasting Legacy
번역 : 김경훈 연구원



매년 10월 초, 전세계는 문학, 의학, 생리학, 물리학, 화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스웨덴과 평화상을 전담하는 노르웨이에 주목한다.

스웨덴의 위대한 기업가 알프레드 노벨은 경제학상을 제정하지 않았고, 그의 유산에 기초하는 위원회 역시 새로이 그런 상을 만든 적이 없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역주: 노벨상 제정시기보다 70년 가까이 느린] 1969년 이래로 후원하는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경제학상’ 이 있을 뿐이다.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이 상의 수상자를 선정하고 다른 상과 같은 시점에 수상식을 개최한다는 사실이, 전 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스웨덴 중앙은행상’이 진정으로 노벨상의 일원이라는 착각을 주곤 한다. 마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위조지폐처럼, 노벨경제학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를 대중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알프레드 노벨은 생전 경제학상을 제정할 의도가 없었고, 보아하니 스웨덴 중앙은행도 분명 그런 의도를 계승하고 있는 것 같다. 노벨 경제학상은 보통 응용수학, 응용심리학, 또는 계량경제학이라 불리우는 응용통계학 전문가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진정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무시당하며, 진실되고 새로운 학문적 기여를 전혀 남기지 못한 학자들이 수여받곤 한다. 많은 수상자들이 경제학에 매우 정통했던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들조차도 경제학에 대한 기여를 이유로 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울한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의 문제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스웨덴 중앙은행과 노벨경제학상이 정부의 중앙계획과 간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유포하는 신화의 실상을 무자비하게 폭로하고 불식시킨다. [역주: 19세기 경제학은 오로지 수요-공급 논리에만 의존하는 자유방임 정책 처방만을 내렸으며, 어떠한 간섭도 불허한다는 점은 곧 우리가 사회현실을 직접 바꿀 수 없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렇게 경제학은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오스트리아학파에 따르면 자유방임이 옳으며, 우울한 과학이라는 경제학의 문제점은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중앙계획에 자금을 투입하는 기관이다. 자기 업무에 도움이 안되고,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연구를 위해 수백만 크로나를 인쇄하고 소모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스웨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회주의자들의 지배를 받아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많은 부분에서 존경할 만 하지만 이러한 경향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놀랄 것도 없이, 노벨경제학상은 항상 복지국가, 전쟁국가, 그리고 불태환화폐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에게 심하게 편향되어왔다. 1974년의 하이에크를 제외하곤, 수상자 중 그 누구도 중앙은행과 통화간섭주의에 대해 비판한 적이 없다. 심지어 하이에크도 상을 수상한 이후에야 <Choice in Currency> (1976) 와 <Denationalisation of Money> (1977) 를 출판했다.

경제사상사의 위대한 거인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머레이 라스바드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놀랍지 않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미제스는 그 상이 다섯 번째로 수여되는 바로 그 순간에 죽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지 40년이 넘어가는 지금 그의 업적과 영원한 유산을 기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고전적 자유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을 부활시킨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대정치사상에 있어 그가 가장 크게 기여한 영역은, 전적으로 그의 사회분석, 특히 화폐이론에 바탕을 두고있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사상이 학계에 침투하여 고전파 경제학을 대체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미제스는 혁명적인 화폐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화폐 가격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개발하고, 화폐 생산의 원인과 결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그의 작품은 고전파 경제학의 중심에 있었던 반-통화간섭주의적 성격을 크게 강화시켰다.

아담 스미스 이전에, 사람들은 지출의 양이 곧 경제를 이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치인과 사업가들은 생산과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국가의 통화공급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는 이것이 잘못된 관념이며, 부의 진정한 원인은 노동의 분업과 검소한 생활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방해하는 정책은 효과가 없으며, 국가를 성장이 아니라 빈곤으로 이끔을 의미한다.

그의 이론은 고전파 경제학으로 알려진 지적 운동에 영감을 주었으며,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칼 멩거가 주관적 가치이론을 창시하고 그 견고한 토대 위에서 가격 이론을 개발했을 때,그는 고전파 경제학의 뿌리와 의의를 타도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고전파 경제학의 가격이론이 가지는 근본적 문제를 수정하여 그 전체적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역시 생산과정에서의 시간의 역할을 분석함으로써 저축과 자본에 대한 고전파의 교훈을 보강했다. 최종적으로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화폐이론을 완성함으로써, 고전파 경제학을 오스트리아적으로 완전히 수정해냈으며, 오스트리아학파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아담 스미스의 중요한 문제점은 화폐를 소홀히 다뤘다는 점이다. 그는 화폐의 수요나 공급 중 그 어느 것도 국부의 원인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위대한 데이비드 리카도 역시 스미스의 문제점인 가격의 생산원가 이론을 이어받았으며, 이 때문에 고전파 경제학은 은행산업에 대해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했으며, 그 실질적 결과는 끝없는 호황과 불황의 연속이었다. 화폐와 은행에 대한 그들의 실패는 고전파 경제학 전체구조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아담 스미스 이전의 인플레이션 교리가 다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에는 서서히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30년대에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미제스의 화폐이론은 고전적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실용적인 목적 하에서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정 반대로, 그는 자신의 화폐이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를 뒤늦게 이해했다. 그의 화폐이론은 1912년에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1924년의 제2판에서야 미제스는 자신의 화폐이론이 가지는 반간섭주의적 함의를 이해했다. 화폐이론에 대한 연구를 하던 때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그는 사회주의 체제 및 간섭주의 체제의 경제분석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는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하이에크, 하벌러, 매슐럽, 모겐스테른, 로빈스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지식인들이 고전적 자유주의로 전향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최종적으로, 미제스는 자신과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을 ‘인간행동학’이라는 통합된 체계에서 완전하게 제시하였다.

평생 동안 미제스는 정치경제적으로 완전한 비주류로 살았다. 이는 그에게 개인적인 불행을 안겨다 주었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의 유산은 영원하고 강력하다. 미제스가 진득하게 비판했던 인플레이션, 사회주의, 그리고 국가주의는 우리에게 빈곤, 부패, 혼돈을 안겨다주었다. 미제스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진정한 번영의 길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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