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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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라스바드 전통 대(對) 하이에크 전통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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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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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an McMaken (미제스 연구소 편집장)

주제 : #자유주의일반

원문 : The Rothbardian School
번역 : 김경훈 연구원

지난 12월, [역주: 이 글은 2010년 8월에 쓰여졌으며, 지난 12월은 2009년 12월을 말함.] <리즌 매거진>의 편집장 브라이언 도허티(Brian Doherty)는 칼럼을 발표했다. 해당 칼럼에서, 그는 오늘날 리버테리어니즘에 두 개의 주요 학파가 있음을 지적했다. 하나는 카토 연구소가 주도하는 온건한 하이에크학파이다. 다른 하나는 론 폴과 미제스 연구소가 이끄는 훨씬 급진적인 라스바드학파이다.

하이에크주의자들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면서도, 도허티는 론 폴의 라스바드학파가 오늘날의 자유주의 운동이 이토록 거대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이라고 평가한다:

론 폴 운동은 전쟁과 화폐 등 여러 사회적 분야에 대해 가장 분명한 자유주의적 입장을 표방하는, 2차대전 후 현대 미국의 가장 거대한 반정부 대중운동으로 자리잡았다. 론 폴 운동의 신념 혹은 스타일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원인을 분석해본다면, 여러 리버테리언 지도자들 중에서 머레이 라스바드의 영향이 가장 강력하다고 평할 수 있다. 라스바드가 평생을 리버테리언 운동가로 살면서 꿈꾸었던 반-전쟁, 반-국가, 반-불태환화폐를 지지하는 거대 군중의 구현이 곧 론 폴 지지자들이다.

론 폴 지지자들은 라스바드가 권력 엘리트를 분석하기 위하여 가장 관심을 가졌던 문제인 전쟁과 화폐에 주안점을 둔다. 안타깝게도 라스바드가 살아있을 적에 그의 견해는 표퓰리즘 혹은 음모론으로만 취급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론 폴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을 연구하면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론 폴 지지자들은 론 폴 본인과 론 폴에 관련된 인터넷 커뮤니티로부터 리버테리어니즘을 주로 학습하였다. 여기서 라스바드가 론 폴의 친구이자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론 폴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의 중심에는 바로 그 라스바드를 추종하는 미제스 연구소와, 미제스 연구소의 설립자 겸 라스바드 생애 마지막 13년을 함께 한 동료인 류 락웰(Lew Rockwell)의 개인 웹사이트가 자리잡고 있다.

학계와 워싱턴 D.C. 정계 밖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보통의 중산층 미국인들이 리버테리어니즘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 대중운동은 바로 론 폴과 라스바드의 사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론 폴이라는 이름은 이제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 어떤 리버테리언도 론 폴과 유사한 수준의 명성에 도달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론 폴의 사상적 배경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리버테리어니즘의 분파를 논함에 있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중대한 중요성을 배제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오스트리아학파를 탐구하면서, 우리는 온건파인 하이에크 전통과, 훨씬 더 급진적인 라스바드 전통이 서로 평행선을 이루는 경계 하에 분열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전통은 지적 배경에 있어 약간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라스바드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급진적인 반간섭주의 경제학을 계승하였다. 미제스는 그의 생애 거의 전 기간 동안 정부의 시장 간섭을 전면적으로 반대한 바 있다. 정치와 경제 양 측면에서 라스바드의 반간섭주의는 미제스보다도 더 급진적이지만,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경제학적 입장 차이는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반면 하이에크는 정부의 간섭을 훨씬 더 많이 받아들였다. 예컨대 그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노후연금, 식품생산의 정부규제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많은 입장을 대중화시킨 사람은 바로 하이에크이다. 그는 동 시대의 케인스에 맞선 가장 유명한 비평가였지만, 하이에크식의 정책 처방은 오늘날의 개혁가들을 더 이상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국가를 받아들였다는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나는 하이에크를 오스트리아학파의 밖으로 추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라스바드주의자와 하이에크주의자 사이의 분열은,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사람과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리버테리언 대중운동을 지배하는 레토릭을 고려한다면, 오스트리아학파 사상이 확산되는 원동력은 분명 라스바드 전통의 오스트리아학파와 론 폴의 정치운동임이 명백하다.

이런 이유로, 나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2010년 8월자 기사가 조지메이슨 대학교의 경제학자 피터 뵈키(Peter Boettke)에 대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지적 표준을 전파하는 학자"라고 평가한 것에 상당한 불편을 느꼈다.

피터 뵈키가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를 지탱하는 데 있어 유용한 도움이 되는 반대자 [역주: 즉, 국가를 진정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친화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국가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반대자] 라는 점에는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활발하고 광범위한 오스트리아학파의 지적 전통을 살펴본다면,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택한 하이에크 전통이 아니라 라스바드 전통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지적 표준'이라는 미사여구에 더 적합하다는 점 역시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지난 몇 년 동안 뵈키 교수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라는 타이틀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시도했던 사람인데, [역주: 뵈키 교수는 자신의 입장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넘어선 '정통 경제학(Mainline Economics)'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오스트리아학파를 탈피하고자 한다.] 오스트리아학파의 표준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준다는 점은 참으로 기이하다.

경제평론가 로퍼트 웬젤(Robert Wenzel)이 지적했듯:

피터 뵈키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표준을 보여주는 나팔수로 묘사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경우에 정당할 수 있을까? 그 훌륭한 지적표준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머레이 라스바드 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업적을 더 높게 평가하며 더 널리 알리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에크를 논의하면서 미제스를 무시하는 처사는, 시카고 불스의 리그 우승을 이야기 할 때 마이클 조던을 언급하지 않고 대신에 스코티 피펜을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물론 피펜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조던이야 말로 바로 '그 사람(The Man)' 이었다.

이제 월스트리트 저널을 조금이나마 옹호해보자. 그 기사에서 '리버테리어니즘'이라는 용어가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은 위안이 된다. 그리고 그 기사는 아마 학계 밖의 대중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주류 학계 내에서의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지위에 대한 논고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론 폴은 전혀 학문적인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만약 월스트리트 저널의 편집자들이 진정으로 선의를 가지고 이 주제에 관한 글을 쓰고자 했다면, 월스트리트 저널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학파를 구성하는 지적, 정치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극도로 형편없는 쓰레기 기사를 내놓았다는 죄를 지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월스트리트 저널은, 론 폴이 길거리의 많은 학생 앞에서 중앙은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는 동안,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자와 피터 뵈키가 조지메이슨 대학교 경제학과 사무실에 앉아 하이에크의 안전하고 온건한 사상을 토론하는 상황을 상상하진 않았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최소한 월스트리트 저널이 극도로 무지하고 편파적인 편집을 가한 기사를 선보였다는 점에서는 죄를 지었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 이 기사를 읽으며, 하이에크 전통을 '존중받을 만한' 오스트리아학파로 이해하면서, 라스바드 전통은 그러한 품격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일반적인 성향, 즉 보수주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결론이다. 또 이 기사로 하여금, 월스트리트 저널은 자신이 작금의 기득권 '도둑정치(kleptocracy)'의 진지한 비판자들, 예컨대 론 폴 따위와는 전혀 무관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웬젤이 지적하듯, 이 기사에서 미제스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기껏해야 특이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뿐이다.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은닉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다. 뵈키 교수를 인터뷰했던 기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가능성은 현저하게 적다. 오스트리아학파를 논의하면서 미제스, 라스바드, 론 폴을 무시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아마 일개 기자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편집 권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편집부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면, 뵈키를 인터뷰하는 동안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뵈키 교수가 라프바드나 론 폴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인터뷰에 응하진 않았을 것이라 장담한다. 나는 언론사에서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일해왔으며, 설령 뵈키가 인터뷰에서 라스바드를 자신의 개인적인 주님 혹은 구세주라고 칭송하는 경우에도, 언론사는 여전히 라스바드 혹은 미제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월스트리트 저널은 무능해서 론 폴과 라스바드를 알지 못했다. 둘째, 방금 언급했듯이 리버테리언 운동에서 론 폴과 라스바드가 가지는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려 했다. 여기서 내가 의심하는 가능성은 두번째지만, 첫번째 역시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저널의 이러한 처사는, 하이에크 전통과 라스바드 전통 사이의 논쟁에 정통한 사람에게는 놀랍지 않다. 1982년, 류 락웰은 당시에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인식된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다. 당대의 리버테리언 단체들은 락웰의 노력을 허사를 만들고자 여러 협박을 늘어놓았다. 라스바드는 락웰의 노력을 열렬히 지지하며 함께하기로 결정했고, 그리하여 결국 오늘날 라스바드학파에 대한 일련의 적대감이 형성되었다.

이렇듯, 최근의 라스바드-하이에크 논쟁은 뿌리깊은 원인을 가지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는 두 전통 사이의 어떤 적대감을 재점화시켰다. 그러나, 리버테리언 싱크탱크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리버테리언 그룹 내의 소소한 논쟁마다 의견이 낼 겨를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논란이 있을 때 마다 "이런 사소한 것 까지 신경을 써야하나?"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마음에 스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와 '아니오' 모두 그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타겟으로 하는 청중을 고려할 때, 이 기사는 리버테리어니즘과 라스바드 경제학의 힘을 통하여 사람을 끌어 모으는 리버테리언 대중운동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답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기사는 하이에크 전통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보다 안전한 계열임을 알리면서, 이를 갈망하는 보수적인 독자들 [역주: 자유시장을 자기들 멋대로 도용하고 싶은 국가주의자-보수주의자들] 에게 하이에크에 대한 존경을 유도할 신호탄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라스바드주의자들은 완전히 무시될 것이고, 결국 음모론자 혹은 비주류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뵈키 자신도 2010년 1월의 블로그 게시글에서 이를 암시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사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결국 우리의 동료인 하이에크주의자들을 파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매우 광범위하며, 무책임하고, 학대적이고, 파멸에 이른 우리 정부의 힘을 억제하고자 마침내 부상한 대중운동의 원동력이 루트비히 폰 미제스, 머레이 라스바드, 그리고 론 폴의 급진적-일괄적-원칙적 유산에 있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존중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는 구성원들이 주도한 성공적인 리버테리언 운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곡물법 동맹을 이룬 코브던주의자들, 제퍼슨주의자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고전적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그들이 사회적 존중을 받는 기득권층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정말로 엄청나게 긴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태그 : #자유주의전략 #아나코캐피탈리즘 #미제스 #하이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