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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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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가 자유를 배신하는 두 가지 길

해외 칼럼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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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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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ray N. Rothbard

주제 : #보수어용세력(가짜자유주의)

원문 : The Fight for Liberty and the Beltway Barbarians
번역 : 김경훈 연구원

보수주의와 리버테리언 운동에는 두 가지 형태의 항복, 즉 '대의명분의 포기(abandonment of the cause)'가 있다.

가장 흔하고 눈에 띄게 분명한 형태는, 우리가 너무 친숙하고 알고 있는 것, 즉 '변절(sellout)'이다. 젊은 리버테리언 혹은 보수주의자가 정치 중심지인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급진적 대의에 따라 국가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싱크탱크나 의회의 행정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점차적으로, 혹은 깜짝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는 칵테일 파티에 참석하여 그가 적으로 생각했던 국가주의자들이 사실 매우 상냥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기득권 정치의 세부 사항들(Beltway marginalia)'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곧 전면적인 개혁이 아니라 약간의 세금감면이나 수정안 따위를 다루는 사소한 국회 의원회 표결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며, 결국 수월한 계약 혹은 안락한 정부 일자리를 위해 전투를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 변절 과정이 계속되면서, 그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주요 원인이 국가주의자 적수가 아님을 알게 된다. 반면에, 항상 원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심지어 그가 대의명분을 팔아넘겼다고 공격하는 원칙주의 말썽꾼들이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곧, 그는 자신이 처음에 적수로 생각했던 국가주의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으로 변모한다.

우리 모두가 이 변절 과정에 너무도 익숙하다. 정의로운 대의를 포기하고, 악과의 싸움을 멈추고, 그리고 한때 아끼던 동지들에게 행한 이 도덕적인 반역에 분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나 변절처럼 명백하지 않으면서도 더 음흉한 형태의 항복이 존재한다. 단지 에너지를 잃고 자유주의 운동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 상황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형태의 항복은, 리버테리언 운동에서 상당히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주의에도 널리 퍼져있다. 어떤 리버테리언 투사들은 리버테리언의 대의명분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부패하고 썩은 세상을 버리기로 결정하며 자유주의에 대한 헌신을 포기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순수하고 고귀한 공동체로 후퇴한다.

아인 랜드(Ayn Rand)의 소설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urgged)'에서 등장한 개념으로 말해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갈트의 협곡(Galt’s Gulch)'이다. 랜드주의자처럼, 여타 리버테리언들도 계속하여 지하 공동체를 형성한다. 마치 서부시대에 머나먼 땅으로 떠나 마을을 만들듯, 숲속으로 도망가듯, 혹은 섬이나 고산지대로 피신하듯, 리버테리언만의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 리버테리언과 보수주의자 모두에게 있어, 이러한 삶의 태도는 사악한 세계를 버리고,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산간벽지로 퇴각해 자신들만의 작은 대안적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한다.

오래전에 나는 이 관점을 '회피주의(retreatism)'라고 이름 붙였다. 회피주의자들은 이러한 전략을 '신 아미쉬(neo-Amish)'라고 부르곤 하지만, 아미쉬는 적어도 생산적인 농부들이며, 유감스럽게도, 회피주의 리버테리언들은 결코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회피주의의 근거는 일종의 사이비 심리학 용어인 '고등한 도덕(High Moral)'으로 제시되곤 한다. 예컨대, 나를 비롯한 우리 무지몽매한 싸움꾼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순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자유(living liberty)'라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부정적인 것'에 해당하는 현실세계에 초점을 맞추기 보단 '긍정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살아있는 자유'이자 '순수한 리버테리언 삶'을 누리지만, 우리 더러운 영혼들은 여전히 부패하고 오염된 현실세계에서 살고 있다.

지난 몇년 동안, 나는 이런 회피주의자들에 맞서, 현실세계는 결국 좋은 것이라고, 우리 리버테리언이 반국가주의자일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가 아무리 오염되었다고 한들 반사회적이거나 현실에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해왔다. 나는 전장이 진흙탕이 되었다고 한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원칙과, 사람을 구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제안한다. 또 위대한 리버테리언 랜돌프 번(Randolph Bourne)을 인용하고 싶다. 그는 리버테리언이 미국의 애국자라고 선언했다. 물론 여기서 애국이란 국가에 충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거에 의해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는 우리의 삶의 터전, 우리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전통과 문화에 대한 애국적 신봉자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입장은, 분명 도스 파소스(Dos Passos)의 명언 "좋아, 우리는 두 나라다.(all right, we are two nations)" 로 표현될 수 있다. 비록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상으로 그 말을 했지만 말이다. '미국'은 오늘날 분명히 두 개의 나라이다. 하나는 워싱턴 D.C. 가 지배하는 부패한 적들의 나라이다. 그들이 세뇌하는 공립학교 제도, 그들의 관료제, 그들의 어용언론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나라다. 그것은 훨씬 더 광대하고, 더 중요하고, 더 고결하며, 전통적이며, 진정한 미국을 대표한다.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이고, 얼마나 오래 걸리든 우리는 미국을 되찾을 것이다. 우리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포기하는 것은 실로 중대한 죄악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부정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원칙, 우리의 존재가 냉혈한 적으로부터 공격받고 있을 때, 우리가 또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우선 부정적인 면에 강조점을 두는 바로 그 과정에서, 긍정적인 면 역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악에 맞서 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직 우리가 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에서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는 일종의 동전의 반대편이다. 우리가 어떤 긍정적이고 선한 가치 및 원칙에 헌신하고 소중히 여길 때 당연하게 발생하는, 일종의 논리적 귀결과 같다. 우리가 적과 싸우는 동시에, 우리의 긍정적인 가치를 강조하며 퍼뜨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그 두 측면은 함께한다.

보수주의자와 일부 리버테리언 사이에서, 상술한 후퇴주의는, 때때로 방어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비유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마치 숲이나 동굴에 옹기종기 숨어들은 후, 복숭아 통조림, 총, 탄약으로 수년을 연명하면서, 핵전쟁 혹은 공산당 침략군에 맞서 숲 혹은 동굴을 지키기 위해 결연히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침략은 없었다. 심지어 복숭아 통조림 마저 썩어가기 시작했다. 후퇴주의는 헛수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1993년, [역주: 이 글이 쓰여진 시점] 예상한 것과 정 반대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즉, 후퇴주의자들은 그들을 '완전히 없애버릴(burned out)' 끔찍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컨대 그들은 '주류·담배·화기 및 폭발물 단속국(Bureau of Alcohol, Tobacco, and Firearms)'에게 학살당할 위기에 쳐해있다. 그들은 몇 가지 규정보다 1밀리미터 짧은 엽총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혹은 잠재적인 아동학대를 방지하겠다는 이유로 개인을 끊임없이 감시한다. 후퇴주의가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점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후퇴주의자들은 결코 승리를 가져다 주지 못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순수함만이 쓸데없이 가득차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단지 자유주의 대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질 뿐인, 짓다 만 집 같은 자들이다.

흥미롭고 중요한 점은, 변절과 후퇴라는 이 두 노선이 비록 정 반대인 것 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른다는 점이다.

변절은 대의를 버리고 돈, 혹은 지위, 혹은 권력을 위해 동지들을 배반한다. 후퇴는 적당히 변절을 혐오하지만, 현실세계가 답이 없다고 결론 짓고 자유주의 운동에 미련을 버린다. 전자는 '실용주의'를 내걸고, 후자는 '순수자유주의'를 내걸지만, 결국 둘 다 현실세계에서 악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한다. 분명 이 두 노선에는 엄청난 도덕적 차이가 있다. 변절은 도덕적으로 사악하다. 반면 후퇴는, 사악하진 않지만, 격식있게 말하자면 정말로 끔찍하게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변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후퇴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선 악에 맞서 싸우고 현실세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후퇴주의자들은 권력과 압제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내면의 영혼이 자유롭다면 물리적 억압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곤 한다. 물론, 내면의 영혼이 자유로운 점은 좋은 일이다. 나 역시 감옥에 갇힌 죄수마저도 신념이 있다면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한다면 나를 하등한 유물론자라고 말해도 좋다. 나는 리버테리어니즘과 보수주의의 핵심이, 인간이라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즉 감옥에 갇힌 죄수의 내면적 자유에만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점에 있다고 믿는다. 리버테리어니즘과 보수주의는 외적인 현실 공간에서 자유를 요구하며 "자유와 재산(Liberty and Property)"이라는 선량하고 전통적인 구호를 부르짖는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이유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축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삶, 재산, 조국, 그리고 현실을 야만인들로부터 지켜내야만 한다.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의 웅장한 찬송가에 담긴 정신이, 리버테리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역주: 라스바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였으나, 주변 지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음.]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진리 위해 억압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날까지 서리라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주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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