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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은 언제나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해외 칼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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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6-08 17:50
조회
1081

Jeffrey A. Tucker
* 미국 경제조사 연구소(AIER) 편집장, 경제교육재단(FEE) 특별 연구원
* 미제스 연구소 부사장 (1997-2011)

주제 : #가치와_교환

원문 : A Society of Mutual Benefactors (게재일 : 2010년 5월 25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몇일 전 나는 식료품점에서 롤케이크를 하나 샀다. 나는 계산원에게 "고맙습니다(thank you)" 라고 말했고, 계산원은 "천만에요(you're welcome)" 라고 답했다.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 계산원들 역시 고객과 마찬가지로 "고맙습니다" 라고 답하지 않는가? "천만에요" 라는 대답은 듣기가 어렵다.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남부에서는 말이다.)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이봐, 나도 너를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고" 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천만에요" 라는 표현은 보통 답례로 아무것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물(재화 혹은 서비스)를 줄 때 사용된다. 예컨대, 내가 뒤에 있는 사람을 위해 문을 열고 기다리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 사람은 나에게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고 나는 "천만에요" 라고 답할 것이다.

요컨대, "천만에요" 는 '일방적인 자선(one-way benefaction)' 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일방적인 자선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지만, 보답으로 실질적인 대가를 반드시 얻지는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왜 '영리적 교환(commercial exchange)'에서는 구입하는 사람과 판매하는 사람 모두 "고맙습니다" 라고 응대하는가? 각 교환당사자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롤케이크를 샀을 당시로 돌아가보자. 나는 롤케이크가 내 주머니에 있던 2달러보다 더 가치있다고 판단했다. 식료품점 입장에서는 롤케이크보다 2달러가 더 가치있었다. 나와 식료품점 모두 서로 교환한다면 형편이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계산원의 업무는 이 교환이 보다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식료품점의 이익을 대변한다. 교환이 성립된다면 식료품점은 롤케이크를 포기하는 대신 (롤케이크보다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 2달러를 얻을 것이며, 나는 반대로 2달러를 잃는 대신에 (2달러보다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 롤케이크를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환의 본질이다. 교환하는 쌍방이 모두 이득을 보는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선택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경제적 교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환은 매일마다 수백만, 수십억, 수조 번씩 일어나는 마법이다.

각 교환당사자는 서로의 상대방에게 은인과 같다. '상호 자선(mutual benefaction)'의 제도로서 교환은 끊임이 없으며 보편적이다. 교환의 결과는 모든 교환당사자의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교환은 개인의 후생을 증진시키며, 모든 사람이 교환한다면 사회적 후생도 증가하게 된다.

물론 교환한 사람은 추후에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나는 롤케이크를 사고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버터가 다 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고, 롤케이크를 절반만 사고 남은 돈으로 버터를 샀어야 했다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다이어트를 위해 빵을 식단에서 빼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아니면 롤케이크가 정말 맛이 없어서 괜히 샀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미래의 불확실성과 인간의 변덕스러운 경향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이다. 최소한 교환할 당시에 나는 나의 형편이 더 나아지리라 믿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교환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료품점의 주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회제도라 할지라도 모든 행동의 행복한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교환 제도를 권장할 만하다. 최소한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만 교환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명백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굳이 지적할 가치가 없어보이는가? 세계 역사상 거의 모든 철학자가 이 점을 깨닫지 못했음을 당신은 아는가?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경제적 교환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지만, 그는 교환당사자들의 가치평가가 동등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경우에만 교환이 발생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높은 가치를 가지며 희소한 내과의사의 서비스와, 옥수수처럼 비교적 흔하고 가치가 낮은 재화가 서로 교환되는 기이한 경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가 어떻게 해서든 교환대상을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경우 화폐는 교환을 더욱 편리하게 하기 위해 도입된 재화에 불과한 것이다.1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는, 경제적 교환이 거래 대상들의 동등한 가치를 전제로 한다는 그의 초기 가정에 있다. 물론 그의 생각은 전적으로 틀렸다. 만약 교환당사자들이 서로의 재화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한다면, 교환을 통해서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교환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교환이 동등한 가치에 기초한다면,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저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의 교환은 상품에 대한 불평등한 가치 평가와, 덜 가치있는 것을 포기하고 더 가치있는 것을 손에 넣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바탕한다. 교환당사자는 언제나 자신의 '이기심(self-interest)' 기초해 서로에게 선물을 준다.

정확한 교환 이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를 따르는 스콜라학파 학자들이 활약하는 중세 말기에야 등장했는데, 교환의 논리를 처음으로 간파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스콜라학파는 경제적 교환이 상호 이익을 가져다주며, 각 교환당사자의 주관적 인식은 자신의 후생이 증가할 것을 기대한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교환 작용 그 자체가 교환에 간섭하는 모든 사람의 후생을 증진시키는 수단이다. 이용가능한 새로운 물리적 재화, 혁신, 생산성 향상이 없는 경우에도, 교환에 기초한 인간의 유대는 그 자체로 부를 증진시킨다.

경제학의 많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교환의 이러한 본질은 한번만 파악한다면 아주 명백한 것으로 다가오지만, 확실히 완전하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여태까지 나는 시장 질서의 공헌을 과소평가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왔는데, 그들은 대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경제적 교환은 특별한 무언가로 전혀 간주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는 경제적 교환은 쉽게 없앨 수 있고 그렇게 해도 더 나빠지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물을 주는 것이 폐지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사회가 더 나빠진다는 점은 너무 뻔하지 않는가?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물질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감사를 보여줄 기회를 박탈당할 것이다.

내가 주장한 바 처럼, 경제적 교환이 '양방향적인 선물(two-way gift)' 이고,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상호 자선의 사례 중 하나라면, 경제적 교환의 가능성이 사라질 경우 사회가 완전히 붕괴한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사회적 후생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융성한 상업, 주식시장, 국제무역, 그리고 돈이 오가는 다른 모든 분야를 축복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추구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더 잘살게 되도록 도울 방법을 찾으면서 생겨난 것이다.

노예제도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16세기 스페인 신학자 바르톨로메 데 알보르노즈(Bartolomé de Albornoz)가 말하길:

'상거래(buying and selling)'는 우주를 지탱하는 인간의 삶을 '신경(nerve)'처럼 연결한다. 인간의 세계는 상거래를 수단으로 삼아 단결한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법률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민족들이 상거래 덕분에 협력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계약이 없다면, 어떤 민족은 다른 민족이 풍족하게 가진 특정 재화가 부족할 테지만, 특정 재화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가진 민족은 부족에 시달리는 민족과 공유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만약 교환이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도와준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시장 거래의 사회적 의미를 간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사회 정의(social justice)'와 관련된 문제들이다.2 시장은 인류의 부를 향상시키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지만,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한다. 사실 시장은 공공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인류의 협력적 상호작용에 불과하다.

'등가교환의 오류(the fallacy of value equivalence in exchange)'는 약 500년 동안 반박되어 왔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3 경제학은 하나의 과학이고 과학은 신중한 사고를 필요로 한다. 한 움큼의 도덕적 규범을 가지고 경제학을 쉽사리 직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경제학은 연역적 방법론과 수 많은 개념에 대한 신중한 묘사를 통해 연구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의 발전이 이토록 늦어진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제학을 이해하기에 너무 늦은 것도 아니다.

경제학을 이해하는 것은 곧 자유시장이 모든 사람의 후생에 기여한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시장경제를 폄하하는 글들을 읽어보라. 상기한 오류들이 근본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장 오늘에도, 당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경제적 교환에 참여할 것이다. 한번 교환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영광스러운 메커니즘을 되돌아 보도록 하자. 물건을 사면서 당신은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에게서 돈을 받는 사람도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천국에 가깝게 만들고, 평화와 번영을 촉진하는 거의 모든 것이 바로 교환이다.




태그 : #오스트리아학파개요 #경제적자유  #자유시장 #다른경제학파

  1. 역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화폐는 오로지 교환매개체로서만 사용된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부자연스럽다고 비난했다. 돈은 오로지 재화간의 교환에만 사용되어야 하며 이자를 받고 대출해주는 행위는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에서도 화폐는 물론 교환매개체이다. 그러나 여기서 화폐는 오로지 물리적 재화의 상호 교환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폐는 근본적으로 교환당사자들이 가진 주관적 가치를 보다 원할하게 교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재화이다. 만약 A가 오늘의 소비를 저축보다 더 선호하고, B는 오늘의 저축을 내일의 소비보다 더 선호한다면, B는 A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줄 수 있다.
  2. 역주: 사회정의란, 개인에게 정당한 몫을 부여하고 그 몫에 대한 권리, 책임의식, 이익을 정당하게 부여하는 것, 기회의 균등한 분배와 투명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함축시킨 사회-철학 용어이다. 이는 여성, 성소수자, 소수인종 등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피해를 입는다는 점을 전제하는 한에서 가능한 개념이다. 예컨대, 사회정의 옹호자들은 시장에서 대체로 낮은 성취를 기록하는 여성이나 장애인 등 소수자에게 보조금이나 복지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을 억압하는 각종 사회적-암묵적인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위 '비장애인 이성애 남성'에게 사회가 구조적으로 유리하게 짜여진 상황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교환의 본질은 그들의 주장이 부당함을 보여준다.
  3. 역주: 등가교환은 원론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는 두 상품의 교환을 일컫는데, 이는 원래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순수한 형태의 상품유통과정은 언제나 등가물끼리의 교환을 전제로 한다. 가령 신문 한 부가 우유 한 팩과 교환될 수 있다면, 두 상품은 동등한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다. 얼핏 보면 그럴듯 하지만 마르크스 경제학의 다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오류이다. 자기계발서에서 주로 쓰이는 등가교환이라는 개념은 삶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변환시키는 점에서는 유용하게 쓰일지 몰라도, 경제학에서는 철저히 배격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