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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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가 징병제를 옹호한 이유

해외 칼럼
철학
작성자
작성일
2020-06-12 21:50
조회
1333

David Gordon
*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 <미제스 리뷰(The Mises Review)> 편집자

주제 : #정치철학과_윤리학

원문 : A Puzzle about Mises and Conscription (게재일 : 2020년 4월 10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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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철학(Friday Philosophy) <펼치기>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사회주의(Socialism)>에 남긴 일부 발언은, 우리가 그의 <인간 행동(Human Action)>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매우 당혹스러운 구절을 이해할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 구절은 미제스가 말하리라고 예상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정말 당혹스럽다. 미제스는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지극히 엄격한 고전적 자유주의자였다. 그의 <자유주의(Liberalism)>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자유에 대한 미제스의 완전한 헌신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징병제는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심각한 억압 중 하나이다. 징병된 병사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며, 종종 잔혹한 환경에서 전투하다가 죽도록 보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최고의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미제스가 징병에 반대할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다.

당신의 생각은 처음에는 사실로 밝혀진다. 1940년에 쓰여졌지만 1998년에야 출판된 짧은 책 <개입주의: 경제적 분석(Interventionism: An Economic Analysis)>에서, 미제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징병을 비난한다:

군인들의 전쟁으로부터 총력전이 복귀한 첫째 단계는 강제 군복무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더 이상 용병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한 신체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 그러나 신체가 건강한 사람의 일부가 산업 전선에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인식된다면 …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과 건강한 사람 사이의 의무적인 복무를 구별할 이유가 없어진다. [역주: 건강하면 전선으로 보내고 문제가 있으면 군수공장으로 보내면 된다.] 따라서 의무 군복무는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일할 수 있는 모든 시민의 강제 노동으로 이어진다. (p. 69)

같은 책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몰락한 원인이 반자본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930년대에 '전쟁에 의한 부당이익(war profiteering)' [역주: 자본가들이 군수품을 공급하면서 떼돈을 버는 것] 을 반대하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었고, 프랑스인들은 (그리고 영국인들은) 독일군의 맹공을 견디는데 필요한 무기들을 시장에서 제공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반자본주의적 추론들을 근거로 하여, 레옹 블룸(Léon Blum) 정부는 프랑스의 방위산업을 국유화했다. 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프랑스 공장의 생산력을 재무장 노력에 투입하는 것이 절실해졌어도, 프랑스 당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전쟁에 의한 부당이익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p. 72)

이제 앞서 언급한 당혹스러운 구절을 살펴보자. <인간 행동>의 제2판과 그 이후의 판본에서 미제스는 징병제를 옹호한다. 그가 말하길: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자는 그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각 개인의 고립된 저항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행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정부가 저항을 조직하는 것이다. 정부의 본질적인 과제는 국내의 폭력과 외부의 적에 맞서 사회 제도를 방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군대와 징병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사람의 노예화를 꾀하는 악당들의 방조자가 되는 것이다." (1966년에 출판된 제3판 원서 p. 282, 1949년의 제1판에는 없는 구절임)

도대체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징병제를 반대했던 엄격한 고전적 자유주의자인 미제스가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는 생각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는 상시화된 징병제를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징병제가 일반적으로는 잘못되었지만, 허용 가능한 경우가 딱 한가지 있다고 보았다. 1922년에 출판된 <사회주의>는 그의 이러한 생각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생활의 본성에 대한 고려 없이 도덕 선생님들이 절대적 윤리학을 구축했을 때는 얻어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철학자들의 열변이 변경시킬 수 없는 사실은, 생명이 살아나가려고 애쓴다는 것, 살아 있는 존재가 즐거움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협동의 근본 원리를 인식하는 순간, 생존 및 고통회피 등에 대해서 인간 행동의 기본 법칙이라고 인정하는데서 오는 모든 양심의 가책이 사라진다. 모든 사람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위해서 살고 있고 또 살길 바란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방해하기는커녕 그것을 촉진하는데, 그 이유는 개인의 생활을 더 높게 충족시키는 것은 오로지 사회 안에서만 그리고 사회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기주의(egoism)가 사회의 기본 법칙이라는 학설의 진정한 의미다.

사회가 개인에 대해서 하는 가장 높은 요구는 그의 생명을 희생하라는 것이다. 비록 개인이 사회로부터 수용하여야 하는 그의 행동에 대한 다른모든 제약들이 궁극적으로는 그의 이해관계에 맞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하더라도, 반행복주의적 윤리학이 말하길, 그 희생요구는 개인적 이해와 전반적 이해 사이의 대립을 부드럽게 만드는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영웅의 죽음은 공동체에는 유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지 못한다. 오로지 의무에 입각한 윤리학만이 그가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더 면밀하게 고려하게 되면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반대가 쉽게 반증될 수 있다. 사회의 존속이 위협받을 때, 각 개인은 파괴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심지어 그 시도를 하는 중에 멸망하리라는 전망이 있어도 그것은 그를 더 이상 단념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전에 살아가듯이 살아가는 것 아니면 나라를 위해, 사회를 위해, 혹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사이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투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올 기회에 비해 오히려 죽음, 노예, 혹은 견딜 수 없는 빈곤이 확실하다. 우리의 제단(祭壇) 및 우리의 벽난로들을 위해서(pro aris et focis) 치러지는 전쟁은 개인에게 희생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이들을 위한 편익을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생존을 보전하기 위해서 그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싸우는 전쟁에만 맞다. 그것은 봉건 영주들의 다툼들 혹은 왕자들의 궁궐 암투(cabinet war)들과 같이 단순히 부유해지기 위한 수단인 전쟁의 경우에는 맞지 않다. 그래서 “국가의 선”을 위해 개인의 “희생들”을 요구하는 윤리학 없이는 정복욕이 넘치는 제국주의는 지탱될 수 없다. (원서 p. 402, 한국어 번역본 2권 "제27장 사회주의와 윤리학 - 3절 행복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기여")

따라서 미제스는 일관성있다. 만약 당신이 가정과 고향을 위해 싸우고 있다면, 당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파괴된다면 당신 역시 파멸할 것이므로, 당신은 싸움의 포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당신을 징병하는 것은 당신의 지위를 악화시키지 않는다. 만약 전쟁이 가정과 고향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주장은 적용되지 않고 징병도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물론 나는 미제스의 주장이 설득력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적으로, 적이 승리하는 상황이 '참을 수 없는 것(insufferable)'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 국가가 이것을 결정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미제스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을 통해서 사람들이 징병에 대한 미제스의 견해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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