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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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의 두 전통: 라스바드 대(對) 하이에크

해외 칼럼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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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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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Doherty – Reason.com

Brian Doherty
* <리즌(Reason)> 편집장

주제 : #자유주의일반

원문 : A Tale of Two Libertarianisms (게재일 : 2010년 2월 15일)
번역 및 편집 : 김경훈 연구원

  • 이 글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타 모두뇨(Roberta Modugno)가 편집한 라스바드의 정치철학 저술 모음집인 <라스바드 대 철학자(Rothbard vs. the Philosophers)>에 대한 <리즌> 편집장 브라이언 도허티의 서평을 편집한 것입니다. 라스바드와 하이에크를 비교하는 부분을 중점으로 원문에 있는 내용을 부분적으로 쳐냈습니다. <리즌>은 라스바드와 미제스의 자유주의에 상대적으로 비판적이고 하이에크에 비교적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나 이 글의 경우 중도적인 관점에서 잘 서술하였다고 생각해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아나키즘 정치철학자, 미국사 역사학자, 그리고 자유주의 운동가인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가 없었더라면, 현대 자유주의 운동은 지금 수준의 규모와 영향력에 전혀 근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스바드는 수 많은 젊은 자유주의 지식인 및 운동가 세대를 교육시키고 영감을 주었으며, '인문학 연구소(Institute for Humane Studies)', '케이토 연구소(Cato Institute)', 미제스 연구소와 같은 여러 자유주의 기관을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자연권 윤리,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아나코-캐피탈리즘, 급진적 반(反)간섭주의, 그리고 공공과 민간영역의 권력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인 불신을 조합한 그의 독특한 사상은 작은정부와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현대 자유주의의 다른 분파와는 구별되는 풍미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보수주의 잡지인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는 그들의 우상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A. Hayek)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죽었을 때 거리낌 없는 찬사를 보내며 추모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995년에 라스바드가 죽었을 때, 그의 오랜 친구였던 내셔널 리뷰의 창립자 윌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는 라스바드의 무덤에 오줌을 싸갈기는 글을 기고했다. 버클리가 말하길, 라스바드는 광신적 사이비종교의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David Koresh) 만큼이나 그의 인생을 낭비했고 영향력은 보잘것 없었다.

그러나 머레이 라스바드의 영향력은 지금 좀 달라진 상황이다. 비록 <내셔널 리뷰>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지만 말이다. 단, 비록 텍사스의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 론 폴(Ron Paul)에 대한 공격은 예외이다. 론 폴의 광대하고, 열정적이며, 젊은 팬들의 등장은 버클리가 결코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자유주의 사상사에 대한 책을 쓰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론 폴의 등장은 라스바드의 급진적 비타협주의가 분열을 초래하며 라스바드 자신도 무의미한 인물로 전락시켰다는 버클리의 주장과는 모순된다.

론 폴 운동은 전쟁과 화폐 등 여러 사회적 분야에 대해 가장 분명한 자유주의적 입장을 표방하는, 2차대전 후 현대 미국의 가장 거대한 반정부 대중운동으로 자리잡았다. 론 폴 운동의 신념 혹은 스타일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원인을 분석해본다면, 여러 리버테리언 지도자들 중에서 머레이 라스바드의 영향이 가장 강력하다고 평할 수 있다. 라스바드가 평생을 리버테리언 운동가로 살면서 꿈꾸었던 반-전쟁, 반-국가, 반-불태환화폐를 지지하는 거대 군중의 구현이 곧 론 폴 지지자들이다.

론 폴 지지자들은 라스바드가 권력 엘리트를 분석하기 위하여 가장 관심을 가졌던 문제인 전쟁과 화폐에 주안점을 둔다. 안타깝게도 라스바드가 살아있을 적에 그의 견해는 표퓰리즘 혹은 음모론으로만 취급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론 폴의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을 연구하면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론 폴 지지자들은 론 폴 본인과 론 폴에 관련된 인터넷 커뮤니티로부터 리버테리어니즘을 주로 학습하였다. 여기서 라스바드가 론 폴의 친구이자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론 폴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의 중심에는 바로 그 라스바드를 추종하는 미제스 연구소와, 미제스 연구소의 설립자 겸 라스바드 생애 마지막 13년을 함께 한 동료인 류 락웰(Lew Rockwell)의 개인 웹사이트가 자리잡고 있다.

라스바드는 사명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경제적 변화를 위한 전략의 측면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라스바드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지만, 요점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느냐에 있다."에 진심으로 동의하곤 했다. (나는 자유주의 운동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며 라스바드에 동의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그들이 라스바드를 선동적인 사상가라고 생각하는 반면, 그들이 선호하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보다 과학적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사실, 모든 주요한 자유주의 사회사상가가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탐구를 추구했다기 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집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라스바드주의 체제의 진정한 핵심은 바로 '비침해의 공리(the axiom of nonaggression)'이다. 이 원칙에 따라 라스바드는 모든 형태의 국가주의를 비난한다. 결국 국가가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걷는다면, 국가는 반드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방향으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라스바드는 세계를 완전한 자유로 이끌고자 하는 사회철학자, 경제철학자, 그리고 사상가들의 영향력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의 비판은 종종 그가 사랑하는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에게 향하기도 한다: "미제스는 '효용주의자(utilitarian, 공리주의자)'이고, 윤리에 대한 그의 상대주의적 접근은 완전한 자유의 사례를 확립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라스바드는 아인 랜드(Ayn Rand)가 자유주의라는 사상에 아주 나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도 비판했다: "민간의 자선사업과 박애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개인주의 사회의 도덕적 자질에 대한 헌사이다." 또 보통 네오콘의 철학적 대부로 평가받는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절대적 윤리에 동의했다는 점에서는 칭찬했으면서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분석을 비롯한 레오 스트라우스의 여러 책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친 것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자유주의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라스바드가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이 출판되기 이전에 먼저 읽어보고 논평한 비밀 메모일 것이다. 라스바드는 <자유헌정론>이 자유주의자들에게서 결코 지지받아선 안되며, 그 책이 출판된다면 맹렬하게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 및 활동가들은 라스바드의 이 메모가 끔찍하고 추악할 뿐더러, 라스바드의 명성에 씻을 수 없는 흑역사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유주의(libertarianism)'는 정부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정치적, 윤리적 신념에 대해 실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일련의 사상을 연결시킨 개념이다. 뉴딜과 케인스주의 등 경제계획 및 간섭주의에 대체로 또는 전적으로 반대하는 경제적 신념을 가진 사상가들이 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하나로 묶이게 되었다. 그들은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볼커 재단, 경제교육재단(FEE) 등 여러 지적 공동체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지적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연계하곤 하였다.

그러나 라스바드가 분명하게 밝힌 바 있듯이, '오류가능주의(fallibilism, 인식론적 입장 중 하나로, 이성적으로 완전히 옹호되거나 정당화되는 믿음 또는 이론 등은 없다는 입장)'적이고, 효용주의적이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하이에크(그리고 프리드먼과 미제스의 많은 부분)의 사상과, 권리에 기초한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라스바드의 사상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두 개의 사상은 모두 '자유주의'라는 이름표 아래에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고 있다.

라스바드가 살아있을 적에 결코 공개되지 않은 비밀 메모에 따르면, 라스바드는 자유와 정치적 질서에 대한 하이에크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놀라울 정도로 고통스럽고, 극도로 나쁘며, 심지어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하이에크를 "사악"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대체로 자유주의에서 가장 존경스러우며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하이에크가 자유주의 운동에 장애물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정치적 자유를 오로지 수단으로만 생각하며 지지했으며, 아나키스트인 라스바드만큼이나 자유를 소중히 여기지는 않았다. 라스바드는 하이에크의 입장이 보다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수사학적인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하이에크마저도 ~~를 인정했다" 라고 말하며 반자유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어느정도 사실이 되었다.) [역주: 한겨례, "하이에크는 단순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라스바드가 실용적인 이유만으로 하이에크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유에 대한 합리주의적 논증을 하이에크가 잘못 이해했으며, 그리하여 고전적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권리에 대한 논쟁의 중요성을 잘못 해석하였다고 주장했다. [역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하이에크는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을 따르는 반면, 라스바드는 대륙의 합리주의 전통을 따른다. 하이에크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대륙의 합리주의 인식론이 사회주의의 뿌리가 되었다며 강력하게 비판하지만, 합리주의를 따르는 라스바드와 호페는 반대로 경험주의 인식론이 반자유주의 및 반시장경제의 근원이라고 반박했다.]

라스바드는 하이에크가 불필요하게 권리를 침해하는 정부의 권력을 광범위하게 정당화했음을 지적한다. 라스바드에 따르면, 하이에크는 정부에 의한 공공재 공급, 시장에서 경쟁하는 공기업, 의무적인 실업보험 및 노인연금,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복지 등을 지지했다.

라스바드와 하이에크의 불안한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리즌>의 전 편집자인 버지니아 포스트렐(Virginia Postrel)이나 '니스카넨 센터(Niskanen Center)'의 윌 윌킨슨(Will Wilkinson) 같은 현대 하이에크주의자들 역시 하이에크의 사상이 라스바드적인 신념과 혼동되고 있는 현실을 비통해하기도 한다. 온갖 유형의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다툼은 결국 타협이 불가능한 두 개의 노선으로 귀결된다. 즉, 반국가주의적인 라스바드의 사상, 혹은 보다 고전적 자유주의적이고, 효용주의적이고,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하이에크의 사상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궁극적인 정치적 목적의 차이는 종종 주류 권력에의 참여 의지와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도 반영된다. [역주: 하이에크주의자들은 주류 보수 우파와의 연대를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기득권에 포함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바라기도 한다. 그 결과가 하이에크의 노벨경제학상 수상과 80년대 레이건 및 대처 정권의 신자유주의이다. 반면에 라스바드주의자들은 정치적 수단이 결코 자유주의에 기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자는 교육과 계몽활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하이에크는 중앙계획의 실패, 자유시장 가격제도의 힘, 그리고 '사회정의(social justice)'의 파괴적 성격에 대한 신념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하이에크에 친숙한 사람들은 라스바드의 비판을 읽고 (아나코-캐피탈리스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이에크가 자신이 비판한 나쁜 것들의 대부분을 지지했었다는 점을 알고 놀라곤 한다.

자유주의 내부에서 이러한 충돌은 현실이고, 중요하며, 계속되고 있다. 하이에크와 라스바드(그리고 그들이 영향력을 미치고 가르친 후계자들)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 지식인들은 하이에크와 라스바드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자유주의의 두 경향은 그들이 주류 세계에 맞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계속해서 다툴 것이다.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이 라스바드의 권리적 자유주의와 하이에크의 결과적 자유주의를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중 하나는, 라스바드와 하이에크의 접근법 모두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신념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와 라스바드는 둘 다 지식인 이상의 존재였다. 그들은 자유의 창도자였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옹호하려는 것은 달랐지만, 정부가 급격하게 성장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하이에크와 라스바드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다. 하이에크와 라스바드 모두 위대한 경제사상가였고, 오스트리아학파의 교훈인 한계효용의 법칙과 노동의 분업을 이해했다. 세상 사람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적 그리고 지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라스바드와 하이에크가 제공하는 상이한 방식의 논증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론 폴과 케이토 연구소 사이에서 가끔 나타나는 분열과 불편한 관계는 이미 1950년대에 라스바드와 하이에크가 갈등을 맺으며 나타났던 것이다. (여전히 라스바드의 완전한 아나키즘은 대부분의 론 폴 지지자들에게도 너무 급진적이지만 말이다.) [역주: 론 폴은 라스바드적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케이토 연구소는 하이에크적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기관이다. 오늘날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훌륭한 자유주의 정치인이 론 폴임에도 불구하고, 케이토 연구소는 공공연히 론 폴을 무시하고 그를 비판한다. 대신에 케이토 연구소는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주류 정치인들에게 로비하고 연대한다.] 만약 하이에크와 라스바드가 전쟁을 했었다면, (아마 라스바드의 일방적인 전쟁이었겠지만) 이 전쟁에 패자는 없으며 라스바드와 하이에크 모두 승리자이다. (자유주의 출판업자인 브래드포드(R.W. Bradford)는 1988년에 라스바드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쥐는데 패배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했지만, 나는 론 폴을 통해서 미제스 연구소의 영향력이 부활하였고 이 주장이 거짓임이 들어났다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사상과 인간 사회를 위한 최선은 라스바드의 자유주의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가 모두 살아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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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게시글 : 한스-헤르만 호페 - 왜 하이에크가 아니라 미제스인가? (미제스 연구소는 왜 미제스 연구소인가?), 라이언 맥마켄 - 미제스-라스바드 전통 대(對) 하이에크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