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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선호에 대한 로버트 노직의 잘못된 비판

해외 칼럼
경제학
작성자
작성일
2020-07-18 11:50
조회
1210

David Gordon
*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 <미제스 리뷰(The Mises Review)> 편집자

주제 : #인간행동학

원문 : Nozick on Time Preference (게재일 : 2020년 5월 22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phil

금요일의 철학(Friday Philosophy) <펼치기>


이 글에서 나는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논문 "오스트리아학파의 방법론에 대하여(On Austrian Methodology)"에서 시간선호에 대해 논한 부분을 다루고자 하지만,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노직은 복잡한 논증을 전개하는 것을 좋아하며, [역주: <자유의 윤리(The Ethics of Liberty)>의 개정판 서문을 쓴 한스-헤르만 호페는 미제스와 라스바드를 비롯한 오스트리아학파 학자들이 논리정연한 글을 쓰는 반면 노직의 글은 난해하고 분열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1, 2] 시간선호에 대한 그의 논의는 특히 어렵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가 언급한 여러 사안 중 몇 가지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노직은 미제스의 명저 <인간행동(Human Action)>의 한 구절을 비판하는데, 이 구절은 시간선호에 대한 미제스의 논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진다:

'시간선호(time preference)'는 인간행동의 범주적 필요조건이다. 욕망을 만족시킨다는 행동 그 자체가 바로 미래 순간의 만족보다 현재 순간의 만족이 선호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보존가능한(nonperishable)' 재화의 소비를 미래를 위해 무기한으로 미루는 대신, 지금 소비하는 사람은, 미래의 만족에 비교했을 때 현재의 만족에 더 높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을 현시한다. 만약 그가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만족하는 것을 비교적 먼 시기에 만족하는 것보다 선호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소비하지 않는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다. 그는 항상 축적할 것이고, 결코 소비하지 않고 결코 즐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늘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내일도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날에도 그는 같은 상황에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p.796)

노직은 미제스의 주장에 맞서 세 가지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사람은 지금 어떤 행동을 하는 것과, 나중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무차별(indifference)'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행동은 '약한 시간선호(time-week preference, 인간은 현재를 미래보다 선호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는 개념)'를 보여줄 수 있지만, 반드시 '강한 시간선호(time-strong preference, 미제스의 주장대로 인간이 "반드시" 현재를 미래보다 선호한다는 개념)'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노직이 말하는 "약한 시간선호"란, 만약 당신이 B보다 A를 선호할 때, 당신은 B보다 A를 선호하거나 둘 다에게 무관심한 것 중 '하나에 해당한다(either a or b)'는 것이다. 이 개념은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의 표준이다. [역주: 시간선호에 대한 노직의 접근은 주류 신고전파의 '무차별곡선(indifference curve)' 개념을 응용한 것이다.]

이 반대 의견이 가진 문제는 간단하다. 미제스는 무관심이 행동으로 현시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부정한다. 미제스에 따르면, 만약 당신이 B가 아니라 A를 선택한다면, 그 선택은 당신이 B보다 A를 더 선호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당신의 '선호척도(preference scale)'는 오직 선택의 순간에만 드러난다. 당신의 '현시된 선호(demonstrated preference)'는 그저 당신이 주어진 시기에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노직은 미제스가 이런 견해를 가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미제스가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견해를 받아들이며 미제스를 비판하려 했다.

그러나 노직이 아니라 미제스가 옳았다. 우리가 가능한 어떤 대안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최선을 선택한다는 점은 일종의 상식적 이해이다. 이런 상식적 이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분명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다. 시간선호에 대한 노직의 개념은 이러한 상식적 이해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만약 당신이 B보다 A를 약하게 선호한다면, 당신을 A보다 B를 약하게 선호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B보다 A를 강력하게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직이 받아들어야 하는 최선은 "강한 시간선호"이다. 그러나 "강한 시간선호"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선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역주: 시간선호는 가치판단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가치중립적 관점에서 인간 행동의 구조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사실, "약한 시간선호"라는 개념이 바로 "강한 시간선호"에 기생하는 개념이다. "약한 시간선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B보다 A를 더 선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B보다 A를 선호하거나, 그들에 대해 무관심한 경우에만 B보다 A를 약하게 선호할 수 있다.

이제 전혀 나을 바가 없는 노직의 둘째 논점을 살펴보자:

인간은 어떤 특정한 만족을 얻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고, 그것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얻던, 비교적 나중에 얻던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나중에는 이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금 행동하는 데 있어 시간선호가 아닌 다른 이유를 가질 수도 있다. 지금 행동하기 위해 앞선 것을 선호해야 한다는 개념은 필수적이지 않다.

이 주장에는 단순한 실수가 있다. 미제스는 '보존가능한 재화(nonperishable goods)'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행위자가 어느 시점에 소비할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재화를 의미한다. "모 아니면 도(now or never)" 상황에 놓여있는 만족은 시간선호에 대한 논쟁에 적합한 주제가 아니다.

노직의 셋째 논점은 보다 근본적인 오해에 기초한다:

우리가 끊임없이 행동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항상 모든 재화에 대한 시간선호를 가진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는다. 기껏 해야,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행동은 (그 옵션이 나중에도 이용가능할 때) 특정한 재화에 대한 시간선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재화 G에 대한 시간선호 기간의 변경(an alternation of periods of time-preference for good G)' 및 '재화 G에 대한 시간선호가 없는 기간(periods of no time-preference for good G)'과 호환된다. 그는 재화 G의 시간선호를 가지는 기간 중에 재화 G를 얻기 위해 행동한다. 이러한 발상은 일반적인 시간선호 개념에 비해 상당히 약한 것이다. (강조는 원문에 따름)

물론 노직의 이의 제기는 옳다. 당신이 지금 재화를 얻는 것을 나중에 얻는 것보다 선호할 때, 당신은 특정한 재화에 대한 시간선호만을 지금 현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학파에 있어, 선호는 특정한 시기에 일어나는 행동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노직은 우리가 행동할 때는 미래의 재화 G보다 지금의 재화 G를 더 선호하지만, 행동하지 않을 때는 재화 G에 대한 시간선호를 갖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주장은 얼빠진 것이다. 우리는 행동하지 않을 때 선호를 갖지 않는다. [역주: 노직은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고 오스트리아학파에서도 이는 인정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으로 오스트리아학파를 반박하려는 시도는 얼빠진 것이다.]

상술한 사안들이 시간선호에 대한 노직의 관점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시간선호의 형성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제공하며, 이 설명을 통하여 오스트리아학파의 표준적 입장에 대해 '이중 할인(double discounting)'의 문제를 제기한다. [역주: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논의하고 있음]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칼럼에서 다루고자 하지만, 하나 경고하자면, 노직의 논의는 내가 이 칼럼에서 이야기한 것 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나는 노직이 미제스 및 라스바드와 기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요약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노직은 대게 '반사실적인 것(counterfactuals)'에 대해 숙고한다. 예컨대, 선호는 단지 당신이 선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설적 환경에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 역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미제스와 라스바드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개인의 행동이다. 괴테의 말 처럼,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Im Anfang war die Tat!)" [역주: 노직은 인간의 선호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여러가지 제약이 있는 현실에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호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러나, 미제스와 라스바드에게 있어서 노직과 같은 주장은, 적어도 경제학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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