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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머레이 라스바드와 함께한 세월들 (라스바드를 통해서 진정한 성인이 되다) - 호페와의 첫만남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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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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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Hermann Hoppe
한스-헤르만 호페는 살아있는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호페는 멩거, 뵘-바베르크, 미제스, 그리고 라스바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로-자유주의(Austro-libertarianism)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서,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인간행동학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적어도 지금까지는—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의_역사

원문 : Coming of Age with Murray (게재일 : 2017년 10월 16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2편] 라스바드의 가난했던 삶
[3편] 라스바드는 왜 아나키스트였나
[4편/完]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싸운 라스바드

나는 1985년 여름에 머레이 라스바드를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35살이었고, 머레이는 59살이었다. 그후 10년동안, 1995년 라스바드가 영면에 들기 까지, 나는 머레이와 함께하곤 했었다. 처음엔 뉴욕시에서, 그 다음엔 라스 베가스의 UNLV(네바다 대학교 라스베가스 캠퍼스) 에서, 누구보다도 그와 가깝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나는 자부한다. 물론 그의 아내 조이(Joey Rothbard)를 빼고.

지금은 이제 거의 머레이가 죽었을 때 만큼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나는 머레이와 함게 한 10년 동안 배운 것을 조금이나마 말하고, 반성하는 데 이 기회(미제스 연구소 35주년 기념행사)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머레이를 만날 때 이미 성인이었다. 생물학적으로는 물론 지적으로도 성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 함께한 세월을 통해서 진정한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경험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머레이를 만나기 전에 나는 이미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고, '프리바트도젠트'(독일의 대학교 무급시간강사) 지위에 오른 상태 였는데, 그 지위는 미제스가 한때 비엔나 대학교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것 이었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행동과 인식: 데이비드 흄의 철학을 중심으로 한 경험주의의 비판, Handeln und Erkennen: zur Kritik des Empirismus am Beispiel der Philosophie David Humes) 외에도 다른 두 개의 책을 이미 저술한 상태였는데, 하나는 나를 미제스주의자로 밝힌 책이었고(인과과학적 사회연구의 비판, Kritik der kausalwissenschaftlichen Sozialforschung), 다른 책은 곧 출판될 예정인 책이었는데(재산, 무정부, 그리고 국가 Eigentum, Anarchie und Staat), 이 책에서 나는 스스로 라스바드주의자라고 밝혔다. 나는 이미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이론적 작품들을 모두 읽은 상태였다.(그러나 나는 그 당시로서 라스바드의 방대한 저널리즘 작품들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읽지도 못했다.) 즉 나는 머레이를 만남으로써 미제스주의자 및 라스바드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몇 년 전부터 이미 지적으로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내가 이론가이기는 하지만서도, 이 자리에서 나는 거대한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지적 체계에서 미제스와 그의 계승자로서 라스바드가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들, 그리고 이 시스템에 대한 나 자신의 작은 공헌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오직 내가 머레이와 함께 한 오랜 개인적 경험들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내가 그와의 만남을 통해 알게된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교훈들이, 나를 진정한 성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나는 뉴욕시로 이사했다. 왜냐하면 머레이를 모든 사회 이론가들 중에서, 확실히 20세기에선 가장 뛰어나고, 그리고 아마도 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미제스도 모든 경제학자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제스가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관계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라스바드라는 이 남자를 만나고 같이 일하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위대함에 대해 같은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사실 30년 전보다 오늘날 그들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이 죽은 이후로 제2의 미제스나 라스바드는 없었다. 가까운 미래에 그런 사람이 다시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아마 우리는 엄청난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뉴욕으로 이주할 당시 나는 머레이의 작업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이 때가 1985년 이었음을 기억하라, 그 시절 나는 책을 쓸때 여전히 자필에 의존하거나 기계식 타자기를 사용했다. UNLV에 가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써볼 수 있었다. 그리고 머레이는 죽을 때 까지 컴퓨터를 쓰지 않았다. 여하튼 그 당시엔 휴대전화는 커녕 이메일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구글, 위키피디아, 유튜브 등이 하나도 없었다. 놀랍게도 심지어 그 당시엔 팩스기계 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뉴욕에 도착하기 이전에 머레이와 주고받은 서신은 정말 구닥다리 우편제도에 의존한 것이었다. 내가 머레이에게 함께 일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자 그는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즉시 버튼 블루머트(Burton Blumert, Center for Libertarian Studies의 회장이자 미제스 연구소의 설립자 중 한명, 생업으로는 Carmino Coins이라는 회사를 운영하였음. 머레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측근이었고, 나에게 역시 가장 큰 은인이자 소중한 친구였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정말 버튼은 내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서신을 통해 나는 머레이의 사진 몇 장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미제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며, 브루클린 폴리테크닉 연구소(이후 뉴욕 폴리테크닉 대학교로 개명되고, 오늘날에는 뉴욕대학교의 일부로 편입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 역시 알게 되었다. 그가 대단히 훌륭한 '리버테리언 연구 저널(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의 편집자이며, 또 류 락웰(Lew Rockwell)이 그 당시 기준으로는 최근인 1982년에 설립한 미제스 연구소의 학술 편집장인 것 역시 서신을 통해서 간신히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그 당시에 나는 머레이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둘다 준비되지 않은 채, 머레이의 대학교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나는 어땠냐면은, 외관상으론 북독일 맥주 광고모델로 나올 법한 젊고 키크고 체격이 탄탄한 "북쪽에서 온 멋진 금발머리" 사내 였다. 하지만 사회성과 유머감각이 없는 건조한 사람이었으며, 직설적이고, 빈정대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과 대립을 일삼는 면모가 다분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가히 완벽한 독일 국방군(Wehrmacht) 인재였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반면 머레이는 우디 앨련의 표현을 빌린다면 '대도시의 신경증환자(big-city neurotic)' 였는데, 나보다 한 세대나 나이가 많았고, 키작고 뚱뚱한 저질체력에, 글을 쓰는 것을 제외하곤 정말로 모든게 서투른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교적이고, 정말 웃겨서 함께 하면 늘 즐거운 유형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강경한 글에서와는 달리) 그는 다른 사람과 대립하는게 싫어서 언제나 양보할 줄 알았으며, 마음씨가 곱고 심지어 남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기도 했다. 아마 그가 독일인 이었다면 결코 훌륭한 독일 군인이 될 순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를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사실, 우리는 한쌍으로 치부하기에는 꽤나 기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길고 특별한 관계를 생각 해볼때, 특히 1933년부터 45년 사이 12년 동안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정당 통치 기간을 고려해 본다면, 젊은 독일인이었던 나는 미국의 보다 나이 많은 유대인을 만나는 것에 있어서 이 역사가 우리 둘 사이의 잠재적인 긴장의 원천이 되지 않을까 상당한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우선 종교에 관해서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둘다 불가지론자였고, 종교사회학과 비교종교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머레이는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동안 불행히도 완성하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인 경제사상사 연구를 통해, 역사에서 종교가 가지는 역할에 대한 나의 이해를 엄청나게 심화시켜주었다.

더군다나 머레이와의 수많은 대화에서, 나는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이론을 수정주의 역사학을 통해 보완햐는 것의 중요성 역시 배웠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건과 작금의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진정한 현실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그리고 여전히) 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모든 학교와 대학에서 가르친 '공식적 역사', 즉 (a) 추악한 독일 역사의 계승자인 독일인으로서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강요하고, (b) 미국과 미국의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 체제가 적어도 식빵이 개발된 이후, 아니면 그 이전부터 '가장 위대한 체제'라는 믿음을 주입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패배주의적이고 황폐화된 역사관을 가지고 성장했던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독일식 역사교육을 받은 나는 모든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세계 정세, 그리고 미국과 독일 역사에 대해서 대단히 순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머레이는 내가 (심지어 베트남전 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장밋빛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주었고, 처음으로 내가 독일인이라는 것에 만족하고, 심지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다. 그리고 독일과 독일국민의 운명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발전시켜주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놀랐던 것은, -그리고 내가 머레이를 처음 만남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기쁘고 엄청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머레이가 엄청난 독일 숭배자 였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 수학, 과학, 공학, 학문적 역사, 그리고 문학에 대한 독일의 공언을 잘 알았고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그가 사랑했던 스승 미제스 역시 원래 독일어로 글을 썼으며, 독일문화의 산물이었다. 머레이는 독일 음악을 사랑했고, 독일 바로크 양식 교회를 사랑했고, 바이에른 비어가든의 분위기를 사랑했고, 독일인의 전통인 "교회에서 비어가든까지 함께가는" 걸 사랑했다. 그의 아내 조이 역시 독일 혈통이었고, 처녀 때 이름은 조앤 슈마허였다. 조이는 리하르트 바그너 소사이어티의 일원이자 평생을 오페라광으로 살았다. 그리고, 내가 곧 만나게 될 머레이의 친구들 역시 대부분이 독일 숭배자임이 밝혀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했던 것이 위대한 고전적 자유주의자 역사학자인 랄프 라이코(Ralph Raico) 였는데,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았겠지만 슬프게도 거의 1년 전에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나는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있던 머레이의 아파트에서 열린 파티에서 랄프를 처음 만났는데, 이는 내가 뉴욕으로 도착한지 몇달도 되지 않아서 였다. 그 역시 나처럼 신랄하게 비꼬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고, 수년 동안 우리는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 다양한 미제스 연구소 행사에서 만난 많은 기억들 외에도, 나는 우리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함께 여행을 한 것이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이탈리아 북부의 독립을 지지했던(지금은 아닌) '북부동맹(Lega Nord)'과 그들의 후원자들이 개최한 밀라노의 컨퍼런스에 갔을때, 몇몇의 자칭 "반-파시스트" 시위자들이 나타나-누가 그걸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참 재밌게도 큰 소리로 우리를 '리버테리안-파시스트(libertari-fascisti)'라고 비난했다. 또한 랄프는 나에게 1차세계대전, 전간기, 그리고 2차세계대전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에 대해 소개해준 사람이었고, 독일 자유주의의 역사와 19세기 독일의 급진적 리버테리언 대표자들이 오늘날의 독일에서 거의 잊혀진 것에 대해 알려준 사람 역시 랄프였다.

그건 그렇고, 류 락웰 역시 그의 독일 숭배를 정말로 빠르게 표출한 사람이었다. 1985년 가을에 우리가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메르세데스 190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몇년간 그는 미국산 픽업트럭을 모는 타락의 길을 걷곤 했지만, 결국 BMW가 생산한 미니쿠퍼의 오너가 됨으로써 다시 독일차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하튼, 무엇보다도, 언제나 승리자들에 의해 쓰여지는 공식적인 역사를 결코 믿어선 안되며, 대신에 범죄를 수사하는 탐정처럼 모든 역사적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나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머레이였다.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첫째 근삿값으로, 돈을 갈망하는 동기를 추적해라", "이런 조치, 혹은 저런 조치는 누구에게 돈, 부동산, 그리고 권력을 손에 쥐게 해줄 것인가?" 대부분의 역사적 사례에 있어,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은, 당신이 찾고자 하는 역사적 진실, 혹은 특정 정책에 있어 매우 중대한 책임이 있는 행위자 혹은 행위자 그룹의 정체를 밝히는 방향으로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쉽지만, 답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 질문들에 답한다는 것은, 외관상으로 고상한 언변과 경건한 선전이 만든 거대한 연막아래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돈의 흐름과 후생수혜자들을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철두철미한 사실과 지표들을 이용해 범죄를 입증하고, 그것을 행한 범죄자들의 정체를 확인한 후 공표하는 작업이다. 머레이는 이런 어려운 일의 대단한 전문가였고, 심지어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사용할 수 없었을 때 그런 일을 했다. 머레이에게 배운 바에 따르면, 이런 탐정같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문서와 주류 미디어를 넘어서야 한다. 유명한 사람들, 학계의 스타들과 명망있는 일류 저널, 요컨대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흔히 아웃사이더, 극단주의자, 비주류 왕따들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 존경할 가치가 없고, 개탄스럽다고 지탄받는 사람들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무명의 출판물들을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당장 오늘까지도 나는 이 충고를 따르는 것에 늘 주의를 기울였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정말로 즐거워했다. 내가 자주 방문하는 웹사이트와 북마크 목록을 본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특히 기성체제 지지자나 좌파들은 충격을 받고 혐오감에 몸서리를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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