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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머레이 라스바드와 함께한 세월들 (라스바드를 통해서 진정한 성인이 되다) - 라스바드의 가난했던 삶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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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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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Hermann Hoppe
한스-헤르만 호페는 살아있는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호페는 멩거, 뵘-바베르크, 미제스, 그리고 라스바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로-자유주의(Austro-libertarianism)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서,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인간행동학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적어도 지금까지는—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의_역사

원문 : Coming of Age with Murray (게재일 : 2017년 10월 16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1편] 호페와의 첫만남
[3편] 라스바드는 왜 아나키스트였나
[4편/完]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싸운 라스바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상식 때문에, 머레이(그리고 나)같은 수정론자들은 "미친 음모론자" 라는 경멸적인 수식어로 일컬어지곤 한다. 이런 반응에 대해 머레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첫째, "까놓고 말해서, 비록 누군가가 진짜 정신병자로 증명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그 사람의 연구성과(당신의 돈을 도둑질하는 어떤 세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함)를 부정하는 증거로 받아질 수 없다." 그리고 더 체계적으로, 둘째, "물론 많은 사람이 믿는 음모론일 수록 그것은 사실일 가능성은 적어진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음모론 체계가, 어떤 강력한 음모론자 그룹에 의해 구성된 가짜라고만 단정하는 것 역시 너무 순진하다." 어떤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그룹을 구성해 은밀한 계략을 꾀한다는 것은 실존하는 사회적 현실이다. 그런 음모적 계략들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공모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건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 혹은 그룹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와 반대로 가정하는 것, 즉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우연의 연속으로 일어났다는 생각은 정말로 순진하고 믿을 수 없는 견해이다.

더군다나, 내가 현실세계와 문제들에 대한 완전하고 진정으로 현실적인 관점을 얻기 위해, 오스트로-리버테리언 이론을 수정주의 역사로 보완해야할 필요성을 머레이로부터 배울 때, 나는 또한 사람, 행동, 그리고 사건에 대한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 및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그에게서 끊임 없이 훈련 받았다. 순수이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진실 혹은 거짓, 옳음과 틀림, 그리고 (합목적적 기준에서) 효율과 비효율 등에 대해 다소 분명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행동과 사건들은 어떤 순수이론적 판단을 내놓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범주에 속한다. 우리가 정치인과 정부기관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좀 더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둘러 쌓여 있다.) 그들은 우리의 동의를 받지 않고, 심지어 우리가 명시적으로 반항할 경우에도, 우리의 재산과 삶의 모든 영역에 체계적인 영향을 미치고 강요한다. 요컨대,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엘리트 지배자들의 지배에 당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최선의 영역인 순수이론 영역에만 전념해서 탐구하기는 어려우며, 우리의 (질문과) 판단은 대개, 기껏해야 차선에 관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차선의 탐구는 진실, 옳음, 효율 등 최선의 영역에서 다루는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사람들이 정치적 결정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틀렸고, 어떤 것이 효율적인지 묻고, 어떤 정치인이 더 정의로운지 물을 때, 모든 정치적 결정과 정치인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악이고, 완전히 틀렸고, 완전히 비효율적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런 대답들은 과학적으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 질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이해하기 힘들거나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여러 범주들에 대한 비교평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혹은 미래에 대한 사실들을 분석한다고 해서 옳음 혹은 그릇됨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결코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참, 옳음, 그리고 효율은 (선험적 차원에서) 그 기준이 명확하게 고정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또 논리적 혹은 경험적인 증거 중 무엇에 기반했던지 상관 없이, 그러한 선험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부터 근접하거나 보다 동떨어져 있는 차선책을 추적하기 위하여 이성은 반드시 사용되어야 한다. 이는 기업가정신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기업가정신이 과학은 아니지만 기술인 것처럼, 이런 정치적 문제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어려운 기술이다. 기업가들 중 누구는 금전적 이익을 보고, 또 다른 누구는 손실을 입는 것 처럼, 어떤 사람이 정치적 사건을 잘 판단한다면 현명하고 신중한 판단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명성을 잃게 된다.

물론 머레이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그는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동안 신좌파의 반전주의 입장을 실제보다 더 원칙적인 것으로 오판했고, 그 후에 그는 실수였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머레이보다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는데, 바로 그의 아내 조이였다. 조이의 판단은 머레이보다 더 뛰어났고,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머레이보다 더 건전하고,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명명백백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이것으로 나는 머레이와의 오랜 인연으로 배운 둘째 큰 교훈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수정주의의 첫째 교훈은, 학문적 실천과 방법에 관한 것이었지만, 둘째 교훈은 실존적 문제에 관한 것 이었다.

머레이를 만나기 전에, 나는 물론 그가 좌익과 리버럴들이 장악한 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급진주의자임을 알고 있었고, 나는 이것이 약간의 희생, 즉 라스바디안이 되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나 자신 역시 이런 대가를 감당하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이 대가가 얼마나 뼈 아픈 것인지 알고 꽤 놀랐다. 나는 머레이가 재직했던 브루클린 폴리테크닉이 사실 별로 좋은 학교가 아니었음은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는 머레이가 좋은 근무환경과 높은 보수를 누리고 있을 것을 기대했다. 게다가 그 당시 나는 여전히 미국을 자유기업체제 최후의 보루이자 방벽이라고 멋대로 상상했고, 따라서 자본주의 최고의 지적 챔피언이자 마르크스에 대한 인간화된 안티테제 그 자체인 머레이가, 확실히 학계 밖에서, 상업과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높은 존경을 받고, 어느 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리리라 생각했다.

사실은 달랐다. 브루클린 폴리테크닉에서 머레이는 한 역사담당 교수와 사무실을 공유했는데, 작고, 지저분하고, 심지어 창문 하나도 없었다. 독일에서는 전임 교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려 연구 보조원들도 머레이 보다는 나은 환경을 제공 받았다. 또한 머레이는 그 학교의 전임 교수 중에서 가장 낮은 급여를 받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당시 내가 독일국립과학재단에서 받던 하이젠베르크 연구기금이 머레이의 대학 급여보다 상당히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이점에 대해 밝히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맨해튼에 있던 머레이의 아파트는 책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햇빛이 잘 들지 않고 황폐한 공간이었다. 확실히 내가 상상했던 펜트하우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다행히도 이러한 상황은 1986년, 머레이가 60세의 나이로 UNLV의 교수로 임용되고 라스바드로 이사가면서 크게 개선되었다. 내 월급이 UNLV에서 이전보다 줄어들었던 반면, 머레이의 소득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10만 달러를 넘진 못했다. 라스 베가스에서 머레이는 넓지만 검소한 집을 한 채 할 수 있었다. 머레이는 UNLV의 석좌교수로 재정지원을 받았지만, 연구 보조원이나 개인 비서를 고용하진 않았다.

그러나 머레이는 자신의 환경에 불평하거나, 어떤 쓰라림도 느끼거나,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고, 항상 즐겁게 모든 것을 견기도 대신에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이 것은 내게는 정말 배우기 어려운 교훈이었고, 나는 여전히 때때로 그것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건 그렇고, 조이와 머레이가 아직 사귀고 있을 때, 그들이 왜 처음에 서로에게 끌렸는지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를 나에게 해준적이 있었는데, 조이는 머레이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들었고, 머레이는 조이가 유대인이 아니라서 좋았다고 했다. 얼마 안가 그들은 둘다 그들의 기대가 틀렸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심지어 머레이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지적인 수호자로서 그의 눈부신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결코 어떤 상을 받거나,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그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위대한 미제스도 그것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만 해도 자유시장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다고 나불거리는 싱크탱크, 재단, 사업 협회, 연구 센터, 대학 등의 기관이 수십 여개가 존재했음에도, 아무도 머레이에게 어떤 중요한 상이나 명예로운 기념상을 수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정책제안을 하는 것 이상의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과 부상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한계 세율을 35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낮추거나, EPA의 예산을 몇퍼센트 삭감하는 일을 추진한 '참으로 대단하고 용감한' 사람들, '자유'와 '자유기업'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사랑'을 크고 힘있게 표현한 사람들 말이다.

이 중 어느 것도 머레이를 조금도 동요하게 만들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여전히 그로 부터 배워야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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