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칼럼 및 번역자료 투고 요령 안내

[3편] 머레이 라스바드와 함께한 세월들 (라스바드를 통해서 진정한 성인이 되다) - 라스바드는 왜 아나키스트였나

해외 칼럼
인물
작성자
작성일
2020-08-21 13:27
조회
1215

Hans-Hermann Hoppe
한스-헤르만 호페는 살아있는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호페는 멩거, 뵘-바베르크, 미제스, 그리고 라스바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로-자유주의(Austro-libertarianism)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서,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인간행동학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적어도 지금까지는—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의_역사

원문 : Coming of Age with Murray (게재일 : 2017년 10월 16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1편] 호페와의 첫만남
[2편] 라스바드의 가난했던 삶
[4편/完]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싸운 라스바드

머레이와 내가 깨달아야 했던 것은,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좌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스스로 "반사회주의", "제한된 정부", "최소국가", "자유기업", "자유 우파",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라고 일컫는 사람들, 즉 '어용 자유주의자(Beltway-Libertarians, Beltway는 미국의 정치적 중심지인 워싱턴 DC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로, 정치적 특권층을 비꼬듯 말함)'가 오스트리아학파와 리버테리어니즘의 가장 큰 적수였다. 머레이 라스바드는 어용 자유주의자들이 일관성이 없는 지적인 헛소리만 한다는 점을 명백한 논리로 증명하였고 그들을 (마치 미제스가 밀턴 프리드먼과 그의 몽펠르렝 소사이어티 동료들에게 평한 것 처럼) '사회주의자 무리(a bunch of socialists)'로 단정지었기 때문에, 어용 자유주의자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럼에도, 머레이가 주장하듯이, 국가, 즉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심지어 국가에 대한 사건들에도)의 궁극적 의사결정권을 가진 독점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모든 사유재산은 국가재산으로 대체되어 사실상 폐지된다. 국가체제 하에서 사유재산은 '정부의 승인하에' 잠정적으로 개인들에게 부여될 뿐이다. 국가는, 어느 국가라도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로 정의되는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국가기관은 사유재산 및 사기업과는 '인간행동학적으로(praxeologically)' 양립할 수 없다. 국가는 정말로 사유재산의 안티테제이다. 사유재산과 사기업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논리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머레이는 추호도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머레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비타협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론상으로 타협은 용납할 수 없다. 물론 타협은 일상생활에서 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론적 차원에서 타협은, 궁극적인 죄악이다. 엄격하고, 절대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예컨대, 1+1=2 와 1=1=3 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제안을 절충하여 2.5로 받아들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거짓이다. 진실과 거짓의 '중간에서의 만남'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머레이의 비타협적인 급진주의에 대해 랄프 레이코(Ralph Raico)가 말해준 한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랄프를 인용하자면:

"머레이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만난 당일, 미제스 세미나가 끝난 후에 바로 그 사실을 알수 있었다; 나는 미제스 세미나에 내 친구 한명과 초대를 받고 참석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머레이는 나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미제스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있었고, 머레이는 당연히 우리의 열정을 보고 기뻐했다. 머레이는 우리에게 미제스가 경제사상사 전체에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정치에 관해서, 머레이는 음모를 꾸미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글쎄, 정치에 관한 한, (나를 포함한) 우리들 중 일부는 미제스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좌파라고 생각해." 머레이는 우리가 만난 가장 특별한 사람 중 하나였다."

머레이와는 달리, 머레이로부터 본질적으로 많은 것을 배운, 특히 그의 명저 <인간, 경제, 국가>를 공부한 꽤 많은 사람들이, 지젹 타협을 거리낌 없이 하곤 한다. 그들은 지적 '유연성'과 '관용성'을 가진 덕택에 풍부한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머레이 라스바드의 스타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머레이는 소위 '제한된 정부-자유시장" 추종자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배제되거나,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근본적으로 류 락웰이 미제스 연구소를 설립하기 전까지 어떠한 제도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싸우는 투사로 남았었다.

나는 이 '라스바드 공포증'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내가 머레이의 지적인 아들로서, 또 다소 '고집스럽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나는 즉시 그와 같은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라스바디안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현실적 교훈을 재빨리 터득하게 되었다.

머레이로 부터 배운 또 다른 교훈은 겸손함이었다. 머레이는 움직이는 도서관과 다름 없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문헌을 읽고 소화했지만, 결과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독창적인' 주장을 한다고 말하는 것을 항상 꺼리고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독창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많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임을 알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머레이는 자신의 업적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공을 돌리는 데 매우 관대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질문에 조언을 해주는 것도 너그러웠다. 사실, 상상 가능한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그는 당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서 광범위한 설명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가장 성적이 안좋은 학생들에게도 발전을 위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 역시 항상 머레이처럼 겸손하고자 했지만, 그가 한 것만큼 겸손해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머레이의 겸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잘못에 가까울 정도로 심하게 겸손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브루클린 폴리테크닉의 그의 학생들은 대부분 공학 전공자들(혹은 머레이가 뉴욕대학의 미제스 학생들을 '포장 전공자들(packaging majors)'이라고 묘사한 것처럼)은, 머레이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수업 중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머레이가 잠시 뉴욕을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수업을 대신할 때, 머레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을 나에게 듣고서야 그들의 유쾌한 교수의 실체에 대해 깨달았고 크게 놀랐었다. UNLV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거의 머레이의 비공식 에이전트로 적극적으로 그의 업적을 홍보하는 동안에도, 머레이는 자기를 비하하는데 끊임이 없었다. 그가 사회과학에서 상상가능한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글을 썼음에도, 그는 학생들의 학기말 논문을 지도할때, 특정한 요청이 있을 때만 그 주제에 관련된 자신의 글을 언급할 뿐이었다.

그러나 머레이의 극단적인 겸손함은 또 다른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우리가 라스베가스로 이주할때, 우리는 UNLV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보루로 개조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었다. 당시 UNLV의 농구팀, '러닝 리벨스(Runnin’ Rebels)'는 제리 타르카니안(Jerry Tarkanian) 감독의 지휘하에 전국구 강팀으로 위상이 높았다. 약간 안좋은 추문이 있긴 했지만 결코 무시는 할 수 없는 팀이었다. 우리는 UNLV에서 경제학의 "러닝 리벨스"가 되길 희망했다. 그러한 발전을 기대하며 오스트리아학파를 추종하는 몇몇 학생들이 UNLV의 경제학과로 편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금새 무너졋다. 우리가 UNLV에 도착했을 때, 경제학과의 구성이 크게 바뀐 상태였고, 민주적 다수결 원칙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학파로부터 학문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리가 임용되고 불과 1년 후에 부서 대다수가 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마르크스주의자를 새로이 임용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머레이에게 이 임명을 막기 위해 대학 상층부에 간섭하고, 그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라고 촉구했다. 제리 타르카니안을 제외하고, 머레이는 UNLV에서 전국적 명성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제로 UNLV 유일의 석좌교수였다. 우리는 UNLV 총장과 안면이 있었고, 사회생활 차원에서 교제하고 있었으며, 그와 꽤나 친밀한 사이였다. 이에 따라 나는 부서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현실적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머레이가 자신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이 기회를 놓친 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UNLV 경제학과는 오스트리아학파 혹은 오스트리아학파에 우호적인 학파를 제외한 다른 학파의 사람들을 계속 고용했다. 이는 학생들에 대한 학대이자 차별이라 할 수 있겠다. 경제학과와 (경제학과가 속했던) 경영대학장은 나에게 종식 재직권(테뉴어)을 부여하는 걸 거부했다.(하지만 그들의 결정은 대학 교무처장과 총장에 의해 기각되었다. 더불어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와 여러 대학 기부자들의 개입 역시 있었다.) 경영대학장은 머레이의 연례교수평가를 (대학 행정처가 그를 해고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터무니없게 심술궂고 모욕적으로 작성했다. 이런 시련의 결과, 우리에게 두번째 기회가 생겼다. 우리는 경제학과를 분할해 문과대학에 별개의 경제학 과정을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교무처장과 논의했다. 이버에는 머레이 역시 개입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유리한 추진력을 이미 초기 시절이 지난 이후 상실되었고, 저항의 조짐이 보이자 머레이는 재빨리 체념하고 포기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고, 우리의 분리주의 계획은 곧 실패로 끝났다.

이제 이 말만 하고 UNLV에서의 우리의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자 한다: 1995년 머레이가 죽은 후, 나는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변하는 환경이 되어가는 UNLV에서 10년 동안 더 일했다. 한때나마 보호적이었던 대학 행정부는 바뀌었고, 나는 더욱 인정받지 못하게 됬다고 느꼈다.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큰 인기를 끈 것 역시 내 강의의 '위험성'의 증거가 되어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2004년에 나는 스캔들에 휘말렸다. 한 강연에서 나는 동성애자들이 그들의 특징적인 2세 생산 능력 부재로 인해, 평균적으로, 시간선호가 더 높다고, 즉 현재지향성이 이성애자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울보같은 한 학생이 이에 문제를 제기했고. 대학의 소수자우대정책 담당관(말하자면 공산당 정치장교와 같았다.)은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 대한 공식적 징계절차를 개시했다. 그들은 만약 내가 즉각적이고 공개적인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징벌적 조치가 있으리라 위협했다. '비타협적인'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 이후 나는 1년동안 행정적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엔 '사상 경찰'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반대로 대학 행정부가 당혹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1년후, 나는 내 자리를 사임하고 UNLV와 미국을 영원히 떠났다.

머레이로 돌아와서: 당연히, 나는 UNLV에 실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지속적인 협력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쩌면 머레이가 옳았고, 나보다 현실적이었으며, 젊은 내가 너무 많은 낙관주의에 취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머레이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큰 그림을 그리는 넓은 시야이다.




태그 : #일대기 #인물평가 #라스바드 #호페 #보수어용세력(가짜자유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