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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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라스바드가 현실 정치에 미친 중대한 영향력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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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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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 Paul

공화당 소속으로 텍사스주 연방 하원의원을 23년 동안 역임한  론 폴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의 챔피언이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산부인과 의사였던 그는 머레이 라스바드의 <미국의 대공황>을 읽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일관된 자유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미제스 연구소가 1982년에 창립될 당시 초기 구성원 중 한 명이었으며, 현재도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및 이사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자유당(Libertarian Party) 후보로 출마했으며, 2008년, 2012년 공화당 대통령 선거 경선에 도전하며 자유주의 열풍을 일으켰다. 2013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론 폴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제 : #인물평가

원문 : The Political Importance of Murray Rothbard (게재일 : 1998년 1월 8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리버테리언 운동에 있어 머레이 N. 라스바드 교수의 영향력은 더 이상의 과장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다.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진정한 거인이며, 1971년에 그의 위대한 스승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영면한 이후 줄곧 어마어마한 정치운동을 주도해 왔다. 우리 모두 라스바드에게 막대한 빚을 졌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미제스와 연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라스바드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경제학자임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정치적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하게 틀린 주장이다.

라스바드는 오늘날 리버테리언 운동의 창시자이며, '미국 자유당(Libertarian Party)'의 창당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라스바드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제3의 길 운동을 고무시킴으로써 리버테리어니즘의 기반을 구축했다고 평할 수 있다. 나 역시 정치활동을 하면서 라스바드의 명쾌하고 빛나는 작품들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내가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라스바드는 "세금은 도둑질이다(taxation is theft)"라고 말하며 자신의 책을 인용하는 최초의 정치인이 탄생했다는 점에 놀라움과 기쁨을 표현했으며, 나 역시 내가 오랫동안 동경하고 공부해온 사람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말을 듣고 감격했다.

미국 정치를 둘러싸고 있던 오래된 아우라가 20세기에 들어 역전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로, (아마 이란-콘트라 사건도 한동안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정치인이 선거 운동에서 내거는 공약이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라스바드는 1979년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미국의 자유가 단기간 내에 승리할 수 있다는 가장 큰 희망"을 준다고 말하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정부 자체가 대체로 타락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평하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매우 시의적절하게 대중의 '정부에 대한 믿음'을 파괴한 것이다.

더 이상 정치인이나 정부를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정부는 국민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18세기의 미국인과 미국 혁명가들이 가졌던 정부에 대한 건전한 불신을 우리는 회복하게 되었다. 자유를 위해서, 이러한 적대감이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하다. 팩트는 그러한 이미지와 실상이 정 반대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레이건 대통령이 건전한 재정을 유지하고 예산을 삭감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예산을 유지하고 재정적자를 편성한 장본인이다.

진실을 감추려는 기득권 언론과 현실을 얼버무리는 학자들을 본다면, 보통 사람들이 정치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주된 책임은 학자들에게 있다. 사실을 감추고 현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퍼트리는 학자들을 우리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주류 학계는 잘못된 구태의 학설이나 국가주의적 이상에 집착하며, 지배적인 통설에 대한 도전을 침묵시키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대공황 이전 허버트 후버 시대에 대한 라스바드의 수정주의적 접근이 그러하다. 연구를 시작했던 당시에 라스바드가 마주한 사회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에 반대했던 공화당원들은 그 기간 동안 발생한 정부권력의 엄청난 팽창을 이유로 민주당을 비난했다. 반대로 민주당원들은 뉴딜정책을 자랑스러워 하며 이를 자신들의 공로로 삼았다. 보수주의자들은 후버의 유일한 문제가 "공화당 다수의 의회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배우며, 민주당 지지자들은 루즈벨트가 그러했던 것 처럼 "자유시장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모든 위기"를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고 학습받는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새로운 역사학적 재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는 점에서 악명높다. 특히 그러한 개정이 정부계획보다 자유시장을 더 선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적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아무리 거짓이라 할지라도 국가를 수호하려는 정당들의 마음 속에서 대대로 굳어져온 역사해석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라스바드는 1963년에 "공화당 대통령 허버트 후버가 뉴딜정책의 창시자이며,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사실 전임자가 제시한 정책을 세부화 했을 뿐이다." 라고 발표했다.

라스바드의 분석은 놀랍고 철저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성공하였다. 라스바드의 분석에 따르면 후버는 간섭주의자였다. 그는 정부의 강압을 통해서 완전고용, 노동조합의 생존과 영향력 보장, 가격조작, 임금통제, 이민자 추방, 기업 부도 방지 등을 시행했으며, 무엇보다도 통화 공급을 부풀리는 데 전념했다. 대공황이 지난 10년 동안 이루어져 왔던 과오투자에 대한 필연적 조정이라고 주장한 학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버는 이런 조치를 취했다.

라스바드의 이런 견해는 엄청난 역경에 마주했지만, 결과적으로 역사학자들이 후버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보수주의 운동의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친 영국의 역사학자 폴 존슨(Paul Johnson) 역시 라스바드의 후버 재평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 "모던 타임스(Modern Times)"에서, 존슨은 후버의 재정 및 통화 정책을 '천박한 케인스주의(vulgar Keynesianism)'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라스바드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뉴딜정책은 결국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루즈벨트가 권좌에 오르기 10년 전에 탄생했던 것이다. 후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라스바드는 직간접적으로 사람들이 정당들을 평가함에 더 객관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업적을 남겼다.

내가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몇 년 전에, 라스바드의 "미국의 대공황(America's Great Depression)"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나는 정치적 문제와 사상들을 정당정치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었으나, 라스바드를 통해서 생각을 고칠 수 있었다.

"미국의 대공황"은 내가 순수한 자유시장과 리버테리언 사고방식으로 전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책이었다. 라스바드가 제공한 지식을 통해서, 자유에 대한 나의 직관적인 충성이 단순한 아집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들과도 일맥상통한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치 진출을 결심하게 되었다. 라스바드는 나에게 평화적인 시장 활동과 국가의 강제 사이의 구분을 항상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내가 하원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정표로 작용하였다.

나는 라스바드같은 이론가의 빛나는 저작들을 정치적 행위를 통해 실천하고 싶었다. 놀랍게도 나의 견해에 대한 강력한 지지층들이 있었고, 4선 의원으로 내리 당선될 수 있었다.[역주: 2013년에 정계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론 폴은 총 11선 하원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라스바드는 전 생애에 걸쳐 방대한 작품들을 저술했지만,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접해본 사람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견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미제스처럼 국가를 "폭력적 억압의 사회적 기구"로 이해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국가의 역할을 가능한 최소화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에서나 급진적이고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오려면 일차적인 초점은 교육에 맞춰져야 한다. 이것은 라스바드가 일생을 바친 과제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하원의회에서 인턴, 직원, 그리고 의원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교육 행사에 대부분 기꺼이 참석했었다. 세미나에서 연설한 후, 그는 "우리의 생각이 내가 기대하거나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정치와 여론에 스며든 것 같다"며 기쁨을 표시하곤 했다.

또 라스바드는 교육 외에도 리버테리언 사회를 향한 정치적 행동에 직접 관여하는 것 역시 긍정했다. 그가 말했듯이: "국가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교육 이외의 다른 압박 수단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연방 금 위원회(U.S. Gold Commission)'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도움을 요청했고, 라스바드는 특히 중앙은행의 문제점에 관련된 19세기 미국 화폐사에 대한 눈부신 자료들을 제공해주었다. 금본위제와 중앙은행에 대한 그의 급진적 견해는 라스바드가 운동 안팎의 엄청난 압력에도 타협을 거부해온 사안이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가장 설득력 있는 통화 이론가이자 인플레이션 및 불태환화폐에 대한 일관된 비판자로 남아 있다. 우리의 화폐제도가 금본위제로 복귀한다면, 우리는 라스바드의 막대한 업적에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금 위원회에서 라스바드의 연구는 우리가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길을 정비했다. 내가 제안했던 금화 주조안이 금 위원회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스바드의 격려와 지지는 내가 자유당 소속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라스바드의 업적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미국의 자유와 번영의 꿈을 위해, 또 모든 인류를 위해 싸워야 할 탄약을 주었다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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