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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세계 최초의 리버테리언, 노자와 장자: 자생적 질서와 인위적 질서

국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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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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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

전용덕
* 미제스 연구소 아카데미 학장
* 경제학 박사 (대구대학교 무역학과 명예교수)

주제 : #정치철학과_윤리학

편집 : 김경훈 연구원
  • 편집자주: 이 글은 2007년에 출간된 전용덕 미제스 연구소 아카데미 학장의 저서 <권리,정부,시장>의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세계 최초의 리버테리언, 노자와 장자: 목차 <펼치기>

(4) 자생적 질서와 인위적 질서

1) 두 가지 질서: 자생적 질서와 인위적 질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법과 정부가 없는데도 과연 세상에 질서가 유지되겠는가. 정치철학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질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질서가 생겨나는 과정과 운행 법칙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질서가 있다.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와 인위적 질서가 그것이다. 자생적 질서란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질서를 만들고자 노력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질서를 말한다. 시장에서 오랜 자율적인 거래를 통해 거래를 스스로 규율하는 질서가 생겨나는데, 이 때 생겨나는 질서가 자생적 질서의 대표적 예라고 하겠다. 구체적으로 고대에 생겨난 아주 간단한 형태의 법은 모두 민간들의 자율적 거래에 의해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기록한 것으로 자생적 질서의 적절한 예이다. 자연계에서 생존 경쟁의 결과로 이루어진 질서는 자생적 질서의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반대로 인위적 질서란 인간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질서로, 군대나 어떤 조직의 상하 관계나 조직을 규율하는 규칙이 인위적 질서의 예라고 하겠다. 법을 예로 들어보면 시민법(civil law) 또는 보통법(common law)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질서라 하겠고, 오늘날 국회에서 입법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많은 법(legislative law)이나 규칙, 특히 경제 관련법은 인위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대부분 인위적 질서에 가깝다고 하겠다.

두 질서는 고유한 특징에 따라 사용처가 다르다고 하겠다. 자생적 질서는 질서 참가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속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다양한 계층을 조직하는 경우에 적절하다고 하겠다. 국가와 사회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반대로 인위적 질서는 군대와 같이 단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계층이나 집단을 조직하는 경우에 적절하다고 하겠다. 만약 두 질서의 고유한 특징과 발생 과정을 무시한다면 조직이나 사회의 목적에 맞는 질서의 구축을 통한 번영과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혼란과 쇠퇴가 반복될 뿐이다.

자생적 질서관은 아담 스미스를 시조로 일찍이 하이에크, 미제스 등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설파한 질서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이에크보다 아주 오래 전에 동양에서 노자와 장자는 천지 자연의 질서가 자생적으로 생겨난다고 보는 자생적 질서관을 주장했다. 노자와 장자의 ‘도’는 자연적 질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보겠지만 도는 자연을 본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경 ‘제25장 유물혼성’(有物混成)에서 노자는 ‘도’가 ‘자연’을 본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자생적 질서 또는 자연적 질서를 주장하고 있다. “뒤범벅으로 된 한 물건이 있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났으니, 고요하고 쓸쓸하여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건만, 홀로 우뚝 서서 영원히 변함이 없으며,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 잠시도 게으르지 아니하니, 가히 써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 하겠다. (중략) 그러므로 도는 큰 것이다.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 또한 크니, 이 세상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어서, 왕도 그 하나를 차지하거니와,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정치를 행함에 있어서 자연을 본받을 것을 강조하고 있으니 정치 철학의 기본을 자생적 질서로 할 것을 역설한 셈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인위적 질서인가. 노자와 장자는 공맹의 ‘덕’과 ‘인의예악(仁義禮樂)’은 인위적 질서의 전형으로 보았다. 도덕경 ‘제38장 상덕부덕’(上德不德)에서 자생적 질서인 도와 인위적 질서인 인의예악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생겨나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생겨나고,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생겨나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생겨난 것이다. 대저 예란 것은 진심과 신의가 엷어진데서 생겨난 것으로 어지러움의 시초이다.” 노자는 자생적 질서를 잃고 난 후에 인위적 질서가 생겨났다는 것을 이 글에서 보여주었다. 자생적 질서와 인위적 질서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노장의 혜안이 빛나는 것으로 서양 리버테리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2) 자생적 질서의 세상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대부분 자생적 질서보다 인위적인 질서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자생적 질서가 잘 유지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 과연 “자생적 질서만으로 세상이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노자와 장자는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를 보기로 하자. 인위적 질서 없이 자생적 질서만으로도 질서가 잘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노자는 도덕경의 여러 곳에서 설파하고 있다. 노자는 ‘제37장 도상무위’(道常無爲)에서 질서의 형성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도의 본체는 함이 없되, 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군주가 만일 능히 이를 지킨다면, 모든 백성들은 저절로 화육된다. 화육되고서도 욕심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내 장차 이름도 없는 나무등걸로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도 없는 나무 등걸이라면, 그들 또한 욕심 내지 않을 것이니, 욕심 내지 않아 마음이 고요해지면, 천하는 장차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도는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만물을 생성하고 화육하는 것이야말로 도가 하는 일이다. 즉, 도가 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생적 질서가 생겨나고, 자생적 질서에 의존하여 만물이 운행하게 하면 세상은 매우 평화롭고 번창할 것이라는 것이 노자가 ‘제37장’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바이다. 비록 정부가 있다하더라도 크고 간섭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생적 질서가 생겨나고, 그렇게 되면 세상은 매우 평화롭게 번창할 것이라는 것이 노자와 장자의 질서관이라고 하겠다.

노자는 도덕경 ‘제40장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에서 “돌아감은 도의 움직임이요, 약함은 도의 작용이니,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무위자연의 도는 원래 동적인 것이 아니라 정적인 것이며, 도의 작용은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제40장은 자생적 질서의 움직임과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또 ‘제45장 대성약결’(大成若缺)에서는 “맑고 고요함은 천하의 정도가 된다.”고 하였다. 도덕경 제40장과 제45장을 종합하면 도 즉, 자생적 질서의 세상은 부드럽고 소극적이며, 맑고 고요하다는 것이다.

자생적 질서가 인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노자는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도덕경 ‘제75장 민지기’(民之飢)에서 “대저 오직 삶에 대하여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삶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여 자생적 질서란 사람들의 삶에 인위적인 제약을 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이 말의 현대적인 의미는 사람을 불필요하게 구속하는 법이나 규제를 없애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의 삶이 자유롭고 번영하게 되어 소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자생적 질서를 위하는 길과 자생적 질서의 극한

이제 노자는 자생적 질서를 위하여 성인이 해야 할 바를 도덕경 ‘제64장 기안이지’(其安易持)에서 “만물이 있는 그대로를 도와서, 감히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노자는 ‘제2장 천지개지’(天池皆知)에서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처하여, 말없는 교화를 행하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제2장의 의미는 성인이 자생적 질서를 생겨나게 둠으로써 그러한 ‘행동이 없는 행동’이 큰 가르침이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제32장 도상무명’(道常無名)에서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써 단 이슬을 내리거니와, 백성들에게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고루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하여 위정자가 백성들에게 많은 법과 규제를 통해 명령하지 말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제57장 이정치국’(以正治國)에서 재삼 무위의 정치 즉, 자생적 질서가 가져올 결과를 역설한다.

자생적 질서의 극한은 인위적인 질서 구축자인 정부가 없어지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법과 규칙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자신이 스스로 만듦을 말한다. 노자는 정부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노자와 달리 장자는 법과 정부가 있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설파하고 있다. 정부가 있다하더라도 어떤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생적으로 질서가 생겨나고, 결과적으로 세상은 매우 평화롭고 번창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노자와 달리 자생적 질서의 극한으로 정부가 없는 상태, 즉 무정부를 제시하고 있다.

4) 인위적 질서의 등장과 폐해

만약 자생적 질서를 불신하고 나면 인위적 질서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인위적 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즉, 자생적 질서에 의해 생겨난 최소한의 법과 정부를 넘어서 많은 인위적인 법과 큰 정부가 실현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자는 ‘제18장 대도폐’(大道廢)에서 무위 자연의 자생적 질서가 쇠퇴함에 따라 공자와 맹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인 ‘인, 의, 충, 효’라는 인위적 질서가 생겨났다고 설파한다. 그리하여 제18장은 “위대한 도가 무너지고서 인과 의가 생겨나게 되었고, 지혜가 나오고서 큰 거짓이 생겨나게 되었고,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고서 효도와 사랑이 생겨나게 되었고, 나라가 혼란하고서 충신이 생겨나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장자도 인위적 질서에 대하여 노자와 매우 비슷한 생각을 보여준다. 인위적 질서는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것을 장자는 ‘제10장 거협(胠篋) 난성지지론’(難聖知之論)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인민들로 하여금, 목을 길게 빼고 발돋움을 하여 ‘뭔가 호기는 없을까’하고 늘 기다리게 하며, 혹 ‘이러이러한 곳에 현인이 있다’는 소리라도 듣게 되면 양식을 준비하여 아무리 먼 곳이라도 급히 찾아가게 하여, 안으로는 부모를 섬기는 일을 버리게 하고, 밖으로는 그 때까지 힘써 받들던 일로부터 떠나게 하여, 인민들의 발자국은 많은 제후의 나라들에까지 이어지며, 마차의 수레 자국은 천 리 밖 먼 곳까지 어지러이 뒤섞이게 되었다. 이것은, 인민을 다스리는 자가 지(知)를 좋아하기 때문에 생긴 잘못이다. 인민을 다스리는 자가 이처럼 지를 좋아하여 도를 무시하면, 천하는 크게 혼란해져 버릴 것이다. (중략) 하・은・주 삼대 이후의 세상은, 오직 이러한 상태이다. 저 우직한 인민을 내버려두고, 혀끝만 잘 놀려대는 녀석을 기뻐하여 쓰며, 저 무욕・무위를 팽개치고, 마음에 걱정을 끼칠 뿐인 인의(仁義) 따위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만을 즐긴다. 저 장황함과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장자는 천하의 도 즉, 자생적 질서가 무너지면 공자와 맹자의 ‘인의예악’의 질서 즉, 인위적 질서가 천하를 혼란하게 만든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면 인위적 질서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가. 인위적 질서에 의한 혼란이 커지면 종국에는 전쟁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노자는 보여준다. 노자는 ‘제46장 천하유도’(天下有道)에서 “천하에 도가 있으면 달리는 말은 폐지되어 써 밭 갈지만,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전쟁터에서 새끼를 낳는다.”라고 하여 자생적 질서 하에서는 전쟁에서 달리던 말로 평화시에는 농사를 지어 부유하게 되지만, 천하에 도가 없는 상태 즉, 인위적 질서가 지배하면 종국에는 전쟁에 이르게 되어 평화는 파괴되고 사람들의 삶은 피폐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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