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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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유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

해외 칼럼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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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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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arianism at the Brink | Mises Wire

Murray N. Rothbard
머레이 뉴턴 라스바드는 매우 지적이고 박학다식한 학자였으며, 주로 경제학, 정치철학, 경제사, 그리고 법학에 중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개발하고 확장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고, 1929년의 대공황과 미국의 은행사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을 응용하기도 했다. 라스바드는 경제를 통제하는 강제적인 정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의 독점적인 힘이야말로, 대중의 자유와 장기적인 복지에 대한 가장 거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으며, 모든 종류의 국가를 가장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집결된 ‘거대한 도적 패거리’로 정의했다.

주제 : #자유주의전략

원문 : Living in a State-Run World (게재일 : 1987년 12월)
번역 : 김경훈 연구원

  • 미국 미제스 연구소 편집자주: 보수주의자들은 종종 리버테리언들에게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많은 학자와 지식인은 행정부나 규제기관에서 직업을 얻는다. 리버테리언이 그러한 일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른가, 아니면 잘못되었는가? 누가 권력을 잡든 간에, 많은 자유시장 경제학자는 국가기관에서 일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자유지향적인 시민들 역시,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리고 일을 한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강제없는 사회(Society Without Coercion)"에서, 자렛 울스타인(Jarret Wollstein)은 리버테리언에게 대단히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국가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점은 두 가지 유형의 함정을 피하는 것이다: 첫째는 정부 소유의 거리를 걷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초순수주의 리버테리어니즘 혹은 분파주의(ultra-purist sectarianism / sectarians)이다. 둘째는 우리가 이상에 있어서는 리버테리어니즘을 지지하면서도,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강제수용소의 감독자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배신적 기회주의(sellout opportunism)이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론과 현실을 심각하게 분리시킨다. 그들에 따르면, 이상은 어떤 벽장이나 트로피 장식장에 몰래 숨겨두는 것이고, 일상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면에, 초순수주의자 혹은 분파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표현을 빌리자면 "빈틈없음(scrupulosity)"의 오류에 고통받으며, 세상을 등진 수행자가 되거나 순교자가 될 위험을 늘상 마주하며 스스로를 시험한다. 우리는 이 두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일종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종교로서의 도덕

이선 워터스(Ethan O. Waters)라는 가명을 쓰는 리버테리언 작가는 문제를 단순화한다. 그는 함정을 피하려고 애쓰는 대신에 받아들이려고 안달이다. 그는 우리가 도덕적 원칙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유를 위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자유의 배신자들에 대한 분노를 모두 포기하자는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냉철하고 초연한 "과학자"가 되어서, 효용주의적이고 비감정적인 근거로 자유를 제안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마 우리는 자칭 리버테리언들이 자유를 배신하거나 다른 혐오스러운 행동을 해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강제수용소의 감독관과 함께 가격체계와 노동분업이 가져오는 현실적인 혜택에 대해 상냥하게 토의해야 한다!

첫째로 지적해야 할 점은, 배신자와 변절자들에게 적대적이라는 이유로, 독실한(religious)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확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워터스 씨는 도덕적 원칙을 "종교적(religious)"이라고 매도하는 구식 유언비어를 채택하고, 그에 따라 부도덕한 행동에 대한 적대감에 "종교"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찍는다. 대신에 그는 우리가 부도덕이나 위선을 혐오하기 위해 종교적이 될 필요가 없으며, 혹은 친구나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화를 내거나 분개할 필요가 없다고 제안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워터스 씨가 바라는 열정없는 과학자의 이상은 사실 완전히 불가능하다. 나는 많은 과학자를 알고 있다. 나는 과학을 엉터리로 전락시키거나, 과학의 이상(예컨대, 진리추구)을 배신하는 것을 목격하고도 결코 분개하지 않고 초연함을 유지하는 과학자를 본 적이 없다.또한 워터스 씨가 나의 사랑하는 스승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주장을 들먹인 점에서 매우 화가났음을 밝히고 싶다. 미제스가 효용주의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자유에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모든 형태의 국가주의와 국가주의자들에게 똑같이 열정적으로 반대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미제스는 과학자였지만, 결코 냉혈한이 아니었다.

노직 문제

[미국 미제스 연구소 편집자주 :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은 리버테리언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 Nozick)이 그의 집주인에 맞서 아파트 임대료를 줄여달라고 케임브리지 임대관리위원회에 성공적으로 항소를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로버트 노직은 임대료에 대한 정부 규제를 악용하여 그의 집주인으로부터 약 3만 달러 가량을 보상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터스 씨는 도덕적인("종교적인") 리버테리언들이 로버트 노직을 "배신자(apostasy)"라고 비난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헛소리. 로버트 노직은 배신자가 아니라 "위선자(hypocrisy)"이다. 노직이 결코 그의 리버테리언 견해를 철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직은 그저 리버테리언 원칙에 따라 삶을 살지 않을 뿐이다. 또 워터스 씨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리버테리언이 노직의 행동에 "화를 내고, 분노하고, 격노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리버테리언들의 적절한 반응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내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야 겠다.

[역주: 로버트 노직은 2014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1989년작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The Examined Life)"에서,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힘센 소수에 의한 횡포를 우려하면서, 개인의 자유가 때때로 집단주의 정치를 통해서만 완전히 실현될 수 있고, 부 역시 더 많은 사람의 자유를 잠재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당하게 재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본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의 기초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러나 라스바드가 이 글을 쓰던 시점인 1987년까지만 해도 로버트 노직은 리버테리언으로 알려져 있었다. 로버트 노직의 분열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한스-헤르만 호페가 쓴 "자유의 윤리" 서문을 참고하라.]

나는 오랜 세월을 노직 연구자로 살아왔으며, 노직의 행동은 나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았다. 노직의 가치척도에서, 자유와 비침해라는 추상적인 원칙보다 "너의 집주인을 엿먹여라(screwing your landlord)"라는 동북부 미국의 오랜 격언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놀랍지 않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리버테리언들이 "리버테리언 사회에서 노직을 왕따시키려고" 한다는 워터스 씨의 불평이다. 자, "리버테리언 사회"에서 로버트 노직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가? 본질적으로, 1974년에 발표된 노직의 대표작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가 1975년의 미국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칭송받은 이후로, 노직은 리버테리언 사회에서 어울리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노직은 여러 주제에 폭 넓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고,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를 발표한 이후에는 다른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으며, 리버테리어니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우리처럼 리버테리언 원칙에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특히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사람들에게, 이처럼 흥미를 잃는 것은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 하지만 노직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의 성품과 저술방식에 바탕을 둔 노직에 대한 나의 견해는, 노직이 자기 책의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자기 자신의 번쩍이고 걸출한 사고과정을 통해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를 훨씬 더 중요시 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이라면, 분명 예전에 쓴 책에서 주장한 것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고, 그가 싫어하는 집주인을 리버테리언 원칙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엿먹이면서 행복을 느낀다는 점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워터스 씨가 제기한 실질적인 주요 질문을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노직이 집주인을 괴롭히는 것에 분개한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정부 소유의 거리를 거닐거나, 정부 소유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것과 동일한 문제를 가지기 때문에 분개하는가? [역주: 즉, 노직이 정부의 임대료 통제정책을 악용해서 부당한 수익을 취하는 것은, 정부 소유의 거리를 걷는 것과 같은 부류의 도덕적인 문제인가? 정부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정부의 기능을 불가피하게 활용하는 것은 같은 부류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워터스 씨의 근본적인 실수는 우리가 불가피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과, 그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악화시키는 것을 혼동한다는 점에 있다. 간단히 말해, 만약 한 리버테리언이 정부가 임대료를 통제하는 아파트에 살고, 그에 따라 시장보다 낮은 임대료를 납부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노직과 나는 정부가 임대료를 통제하는 것에 어떤 책임도 없다. 노직과 우리 모두 그러한 법의 틀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직이 정부가 소유하는 거리를 걷고, 정부가 소유하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조금을 받아 생산된 빵을 사먹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가 임대료가 통제되는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중 어느 것도 노직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부가 임대료를 통제한다는 이유로 더 싼 아파트를 포기하고, 정부의 규제 하에 재배된 음식을 먹는 것을 거부하고, 정부가 독점하는 우편 서비스의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순교자인 척 할 뿐이다. 우리의 의무는, 이러한 국가주의적 상황을 완화시키고 제거하는 것 뿐이다. 또 사실 우리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 나 역시 임대료가 통제되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정부의 임대료 관리 제도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주장하고, 촉구했다. 내가 정부의 임대료 통제 정책의 혜택을 받으면서 임대료 통제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은 위선이나 배신이 아니며, 단지 합리적이고 분별력있는 행동이다.

노직이 저지른 도덕적인 실수(워터스 씨를 도발하기 위해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도록 하자)는 단순히 임대료 통제 하에서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훨씬 더 나아갔다는 것이다. 노직의 행동이 부도덕한 이유는, 그가 국가에게 자기 월세를 더 낮춰달라고 요청함으로써 그의 집주인을 적극적으로 압박했다는 점에 있다. 내가 보기에 그냥 임대료 통제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랑 정부한테 임대료를 통제해달라고 요청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국가가 만든 매트릭스 안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이용하고 동료들에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따라서 후자는 공격과 절도를 개시하거나 방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를 위해 일한다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노직 사건에 우리가 적용해야 하는 기준은 상당히 파악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공무원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가? 정부보다는 민간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 리버테리어니즘 뿐만 아니라 실용적으로 보아도 훨씬 더 나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당신의 직업 분야를 독점하였거나, 사실상 독점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실질적인 대안이 없다면?

소련을 예시로 들자. 소련 정부는 사실상 모든 직업을 국유화하고, 여기에 어떤 민간 고용주도 없다. 우리는 모든 러시아인이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들이 "범죄자"라고 비난해야 하는가? 따라서 모든 러시아인에게 자살을 권장하는 것이 유일하게 도덕적인 행위인가? 물론 이는 바보같은 짓이다. 사람들에게 순교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도덕적 체계는 있을 수 없다.

미국은 소련만큼은 아니지만, 사실상 정부에 의해 독점된 많은 영역을 가지고 있다. 고도로 규제되고 카르텔화된 직종에 종사하지 않는 한, 의료행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다면, 법적으로 공립대학은 아니더라도, 재정적으로 정부에 의해 소유되지 않은 대학을 발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 소유의 기준을, 소득의 50% 이상을 정부로부터 받는 것이라 규정한다면, "사립대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한두 개의 작은 대학만이 그러할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의 폭동 기간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의 학생들은 소위 "사립대학" 수입의 50% 이상이 정부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들이 정부 소유의 대학에서 종사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분파주의적이다.

정부가 만든 매트릭스를 일상생활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합리적이다. 문제는 국가주의 매트릭스를 보다 악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나의 경력을 예시로 들어보자. 나는 "사립대학"인 브루클린 폴리테크닉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가르쳐왔다. (그러나 나는 사립대학의 수입의 절반 이상이 정부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딱히 놀라지 않았다.) 브루클린 폴리테크닉은 오랫동안 파산 직전에 놓여 있었고, 몇 년 전에 뉴욕 주립대학교 체제와의 합병을 통해 그 자신을 "국영화"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였다. 한동안, 이 합병의 성사여부가 불확실하였기 때문에, 모든 교수진이 뉴욕의 주도 올버니에서 우리 학교와 뉴욕 주립대 시스템의 합병을 위해 시위를 하거나 로비를 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주변에 국가주의를 "더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리버테리언은 국가주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고, 리버테리언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정부를 위해 즐겁게 일할 수 있는가? 당치도 않다. 우리는 두가지 유형의 국가 활동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a) 시장의 민간기업이 수행할 경우 완전히 합법적인 활동

(b) 리버테리언 사회에서 비도덕적이고, 범죄적이며, 불법으로 간주되는 활동

어떤 상황에서도 리버테리언은 후자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리버테리언은 강제수용소의 책임자나 공무원, 국세청 공무원, 병무청 공무원, 혹은 사회와 경제를 규제하는 기관의 공무원으로 근무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러한 기준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나의 오랜 친구는 아나코리버테리언이자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데, 중앙은행의 경제학자라는 중요한 직책을 수락하였다. 이것은 합법적인가, 불법적인가? 아니면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 자, 중앙은행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중앙은행은 국가화폐를 창조하는 독점적인 화폐위조범이다. 중앙은행은 카르텔화, 특권층 형성, 그리고 은행의 구제를 감당한다. 중앙은행은 화폐와 신용, 가격 수준, 더 나아가 경제 자체를 규제하거나 규제하고자 시도한다. 중앙은행은 단순히 정부기관인 것을 넘어서, 그 기능 자체가 비도덕적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한다. 물론, 나의 친구가 도덕적인 문제를 이러한 방식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우리가 국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도덕적이고 합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고수해야 할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자유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고 활동하는 것

(2) 주어진 매트릭스 속에서 살아가면서, 국가주의를 확대하는 활동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것

(3) 부도덕하고 범죄 그 자체인 국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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