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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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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를 위한 의회에서의 투쟁

해외 칼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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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4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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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 Paul

공화당 소속으로 텍사스주 연방 하원의원을 23년 동안 역임한  론 폴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의 챔피언이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산부인과 의사였던 그는 머레이 라스바드의 <미국의 대공황>을 읽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일관된 자유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미제스 연구소가 1982년에 창립될 당시 초기 구성원 중 한 명이었으며, 현재도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및 이사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자유당(Libertarian Party) 후보로 출마했으며, 2008년, 2012년 공화당 대통령 선거 경선에 도전하며 자유주의 열풍을 일으켰다. 2013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론 폴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제 : #금본위제

원문 : End The Fed
편집 : 전계운 대표


과 관련된 주제는 건전통화를 회복하는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금이 통화의 질을 보증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시장경제의 구조 내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금은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에 의해서 선택되었다. 그 이유는 이해하기 쉽다. 금은 건전한 통화의 속성-가분성, 휴대 편리성, 단위당 높은 가치, 내구성, 균질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금본위제도를 언급할 때마다 내가 어떤 강박관념이나 집착증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질주의는 흔히 듣는 말이다. 사실상 나는 오직 사실만을 목격하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건전통화의 개념은 금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금본위 없이 건전한 통화가 존재할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존재할 수 있다.

시장에서 다시 한번 가장 적절한 통화를 선택할 수 있는-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나든지-시스템을 찬성할 것이다. 정부가 어떤 특정한 표준-중앙은행, 법으로 정하는 법화, 통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선택된 어떤 상품에 대한 특혜 등-을 규정하는 것은 반대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달러의 질이 아무리 낮더라도 달러는 화폐이다. 나는 항상 정부가 파괴한 것은 정부가 회복시킬 책임이 있다고 믿어 왔다. 1970년대 후반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헬름스(Helms)의원과 함께 금 위원회(Gold Commision)을 구성하기 위한 법안을 만들었는데 그 법이 카터 행정부 말기에 통과되었다. 금 위원회는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 구성되었다. 17명의 위원 중 레르만(Lehrman)과 코스타매그너(Costamagna)만이 금을 옹호하고 그 나머지는 연준 위원 및 재무부 관료등 금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었다.

재무부 장관 리건이 위원장으로 1981년 7월 16일 첫 회의를 주재하였다. 정말로 우습게 첫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되어 언론 미디어에 공개하지 않고 의사록을 기록하지 않았다. 모든 회의를 비밀리에 의사록도 없이 진행하려는 계획이 칼럼니스트 노박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알려지자 대중들이 크게 분노했다. 대중들의 압력으로 위원회는 공개 청문회를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하였다. 하원 은행 위원회 의장 루스(Reuss)는 한 회의에 참석했다가 격분하여 자리를 떠났다. 그는 단 1분이라도 금의 중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1975년 미국에서 또 다시 금 소유가 합법화 되기전에 루스는 금 소유가 합법화되면 금값이 온스당 5달러로 떨어지고 '금 옹호자'들은 금값을 온스당 35달러로 지지하는 정부를 환영해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물론 그의 예상은 틀렸다. 인위적으로 금값을 낮은 수준에 유지함으로써 달러의 가치가 일시적으로 유지되었을 뿐이다.

첫 청문회가 열렸을 때 금이 온스당 800달러를 상회했다. 루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한 참석자로부터 금을 옹호하는 뉴스레터를 받고 감정이 폭발하였다. 청문회를 떠날 때 그 뉴스레터를 구겨서 던져버리고 위원회의 목적을 공격하는 비난을 퍼부었다. 루스는 금 위원회에 조금도 찬성하지 않았지만 금이 연준 이사회의 '지혜'와 은행 위원회의 '현명한' 의장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제안에 가장 반대한 것으로 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에 아무도 진지하게 달러와 금의 관계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달러의 가치, 인플레이션, 그리고 매우 취약한 경제에 대해 깊은 우려가 있었다. 우려가 컸지만 오날날의 우려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1981년까지는 불환통화 지급준비금제도가 겨우 10년 동안 운영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불환통화 지급준비금제도에 따른 불균형이 38년동안 누적되어 왔다. 한편으로 1970년대의 고통스러운 조정은 일시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달러를 절하시킬 필요가 있었다. 변동환율은 다소불안정하지만 인위적인 고정환율보다 더 잘 유지될 수 있는 '시장' 매커니즘을 제공하였다. 즉, 투명한 시장 매커니즘은 매우 취약한 시스템을 지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금 위원회가 재무부에서 특별회의를 가진 후에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휴스턴 공화당 대표단이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휴스턴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기로 계획하였다.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레이건을 만나 휴스턴으로 가는 대통령 전용 비행기(에어포스원)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악관 건너편에 있는 재무부 건물에서 개최된 위원회 청문회 때문에 내 보좌관이 길을 건너 앤드류 공항으로 가는 대통령 전용 헬기(마린 원)을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타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청문회를 참석한 후에도 휴스턴 공화당 전당대회에 갈 수 있었다.

앤드류로 가는 마린원에서 자연스럽게 금본위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 론 금본위제도를 포기한 어떤 위대한 국가도 위대한 국가로 남지 못했죠?"라고 대통령이 물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헌법적 이념에 동의했음으로 확실히 금본위제도를 찬성하였다. 그러나 참모들이 대부분의 쟁점들에 대하여 실용적(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그의 판단이 또한 흔들렸다.  레이건 대통령으 의 친구인 금 위원회 위원 코스타매그너는 우리들의 반대 의견을 약간 수정하여 서명했다. 훗날 뉴욕 주지사에 출마한 레먼도 우리의 반대 의견에 찬성했다. 그 후에 나와 보좌관은 우리들의 반대 의견 복사본 한 부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을 기회를 갖기 위해 대통령과의 회합을 계획하였다. 그 회합은 특별한 목적 없이 계획되었으며 그 계획으로 대통령을 놀라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그 회합의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시 전화를 했다. 그 후 곧 바로 백악관 참모가 그 회의는 취소되었다고 통보했다. 결국 우리들의 반대 의견을 전달하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베이커와 특히 재무부 장관 리건이 금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나와 대통령과의 회합을 막았을 것이다. 리건은 모든 청문회가 의사록 없이 완전히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 사람이었다. 1982년 3월 31일 첫 번째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정치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운영된다. 참모가 집권자의 철학에 완전히 찬동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올바른 참모를 뽑는 책임은 궁극적으로 집권자에게 있다. 달러가 1970년대에 살아남아 위기를 일시적으로 모면한 후에 27년 동안 거대한 금융 거품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어 우리가 현재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금 위원회의 결과로 1981년에 우리가 정상상태로 돌아갔다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큰 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Rothbard)는 위원회에서 1930년대 공황은 금본위제도 때문이 아니라, 금본위제도를 오용함으로써 야기되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증언을 마치면서 만약에 금이 다시 통화본위가 된다면 시민들이 지폐를 금화로 받을 수 있는 금화본위제도(Gold Coin Standard)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앨런 그린스펀도 증언을 했는데 좀 더 현실성 있는 제안을 했다. 그는 금본위제도(Gold Standard)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조치로 금에 의해 뒷받침되는 국채의 발행을 주창하였다. 1981년에 그는 1960년대처럼 금본위제도를 강력히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1981년 후처럼 그렇게 반대하지도 않았다.

한스 센홀즈도 금 위원회에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그는 금본위제도를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이었지만 금본위제도가 조만간에 채택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센홀즈는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대중들이 곧 금본위제도로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한낱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 불환통화의 힘이 너무 크고 재정적자를 통한 정부지출을 대중들이 강력히 지지하므로 가까운 장래에 통화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

물론 1981년 정부의 재정적자를 통한 지출을 강력히 저지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지출하도록 가해지는 압력을 똑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인 금융 시스템의 구조조정과 관련이 있는 통화개혁을 진지하게 고려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문제를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직면해야 할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새로운 금 위원회가 구성 되지 않을 것이며 통화로서의 금에 관한 공개토론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배후에서 연준과 다른 몇몇 엘리트들이 본질적으로 불환통화임과 동시에 규모 면에서 국제적인 새로운 체제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고려하면 그것은 분명히 순탄하게 진행될 수 없다.

미국이 2차 대전 후에 경험한 바와 같이 금융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가장 큰 힘을 가진 나라들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의 군사력은 계속 패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제력은 여전히 세계 제일이지만 추세를 보면 그것이 계속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경제력과 건전한 통화가 없으면 군사력도 점차 쇠퇴할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의 금 위원회보다 더욱 진지한 두 번째의 금 위원회를 보지 못하더라도, 불환화폐와 상품화폐 사이에 지적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그 중의 승자는 우리의 경제적 운명과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결정할 것이다.

1970년대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멈추고 달러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그 과업을 상당히 달성하였다. 그러나 1982년 연준은 또다시 통화 수문을 열어 붐-버스트 사이클을 야기했다. 어떤 면에서는 연준이 통화공급 계획을 빈번히 수정하는 등 매우 복잡하게―대중들이 파악하기 어렵게―통화량을 관리함에 따라 대중들이 오도되어 그릇된 안정감을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린스펀을 경제의 거장(maestro)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공화당과 민주당을 막론하고 치솟았다.

그린스펀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맞이하고 있다고 믿었다. 심각한 불황도 현명한 통화정책으로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현명한 통화정책’은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건전한 통화 또는 금리 및 신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경제 계획가들은 통화를 인플레이션(증가)시키고 금리를 조작하며 통화발행을 통하여 국채를 상환하는 일에 결코 비용이 초래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상 경제를 관리함에 있어서 이러한 ‘궤변’은 단지 불가피한 결과들을 지연시켜 장기적으로 그것들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금 위원회의 놀라운 성과 중의 하나는 우리들의 소수의견 보고서였다. 그것은 출판되어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 금 위원회 위원 중에서 단지 세 사람만이 거기에 서명했으나 전체 위원들이 의회에 금화를 주조하도록 권고하였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금을 소유하는 것이 다시 합법화되었기 때문에 전국의 금본위제도 옹호자들을 추인하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팔리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크루거란드(Krugerrand) 금화와 경쟁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달러(액면) 금액이 새겨지지 않은 금화를 법화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사람들이 돈을 무게로 생각하기를 원했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법정통화법을 폐지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금화를 액면가로 유통시킴으로써 금화의 법화적인 지위를 시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액면가가 적혀있지 않은 금화를 법화로 삼자는 주장의 가닥을 놓쳐버렸다.

금 위원회에서 우리들이 노력한 결과로 1985년 마침내 주화법(coin bill)이 통과되었을 때에는 나는 더 이상 의회에 있지 않았다. 주화법 초안을 제안했으나 1984년 말 의회를 떠났다. 그 후에 은화(Silver Eagle)를 주조하기 위한 별도의 법이 제정되었다. 주화법은 1온스, 1/2온스, 1/4온스, 1/10온스 네 가지의 금화를 주조하도록 승인하였다. 1온스 동전은 50달러, 1/2온스는 25달러, 1/4온스는 10달러, 1/10온스는 5달러 법화였다. 산수 계산을 조금만 해보면 1/4온스 10달러 동전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법안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사람들은 그것이 혼동되기를 원했다. 1달러 법화가 된 1온스 은화는 연준 지폐, 구 은화, 20달러 금화(Double Eagle)와 비교할 때 달러를 정의하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주화들을 법화로 만드는 것은 터무니없고 비합리적이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50달러 채무를 금 1온스나 은 달러로 지불하지 않았다.

미국 국세청은 사람들이 소득 및 거래금액 등을 세금 목적으로 새로운 주화의 액면가로 환산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모험적이고 용감한 헌법주의자들이 라스베이거스에서 이 법에 도전하여 근로자들에게 금화 및 은화를 지불하고 세금을 훨씬 낮은 수준으로 신고했다. 많은 사람들이 낮은 최저임금 때문에 세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 사건은 법정에 이의가 제기되었으며 절대다수가 없어 평결을 내리지 못한 배심원단에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피고인들이 ‘승리’했다. 우리의 법정통화법이 비합리적이며 ‘달러’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배심원단은 피고인들이 사기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법이 혼란스러운 사실을 확신하였다.

이 사건의 최종 결론은 아직 듣지 못했다. 금 및 은화의 문제가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기쁘고 경제가 붕괴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대응하면 좋은 선례는 아주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법정은 남북전쟁 시기와 1930년대에 그랬듯이 통화문제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항상 전제주의자들의 편을 들어왔다. 연준 폐지 혁명이 어떤 성과를 거둘 때까지는 정부가 새로운 금화나 은화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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