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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재전환의 문제

해외 칼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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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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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P. Murphy
*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뉴욕대학교 경제학 박사)
* 前 텍사스 공대(Texas Tech) 자유시장 연구소 조교수

주제 : #다른경제학파

원문 : The Reswitching Question (게재일 : 2003년 1월 24일)
번역 : 박종식 (경희대학교 철학 석사)



오스트리아학파는 대체로 '과학적' 경제학의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오스트리안들은 그들의 이론이 주류 경제학 저널에서 조금이라도 언급된다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기뻐해야 할 것이다. 나는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이 "약술"(A Summing Up)이라는 이름을 붙여 <계간 경제학지>(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에 투고한 논설문을 검토하면서 이런 태도를 가졌다.

역사적 배경

이 논설문은 미국과 영국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자본 그리고 이자이론에 대한 격렬한 논쟁, 즉 케임브리지 자본 논쟁에 대한 새뮤얼슨의 논평이다. 이 유명한 논쟁에서, 신고전학파는 이자가 자본의 한계생산성에 대한 수익(return)이라는 정통적인 관점을 옹호했다.

다른 한 편으로, 이른바 신리카도주의자들은, 이자가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생산의 기술적 조건들에 의해서 그리고 소득의 분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신고전학파의 주장은 암묵적으로 이자의 지급이 생산적인 노동자들이 수령하는 임금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내포하는데, 특히 신리카도주의자들은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신리카도주의자들에 따르면, 신고전학파의 견해와는 달리, 자본가들에게 이자가 흘러들어가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떠한 사회적 목적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지 않고, 그저 노동계급을 착취할 뿐이다.

그래서 이 논쟁이 오스트리아학파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우선적으로, 이 논쟁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이자이론, 즉 이자의 지급을 자본재의 한계생산성에 귀속시키지 않는 이론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커즈너(Israel Kirzner)가 설명했듯이:

미제스의 순수 시간선호 이론에 있어서 … 자본 생산성은 이자에 있어서 필수적이지 않고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도 않은 원인이다. 이자는 어떤 추가적인 생산물의 가치로서가 아니라, "1. 소비자에 의해 주어진 예상 수령액에 대한 2. 이른 시기에 형성된 가치평가들의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케임브리지학파는 미제스의 이자이론이 이자를 추가적으로 생산된 생산물과 등치시킨다는 이유로 비난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착취에 대한 비난에 반대하며 이자를 옹호하는 신고전학파의 입장은 잘못된 이론에 근거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점에서, [자본가-기업가에 대한 이자 지급을 옹호하는] 도덕적 논거의 기초로서 이자에 대한 더 정확한 과학적 해명을 제공하는 것은 오스트리아학파의 역할이다.

이러한 폭넓은 사안들 외에도, 새뮤얼슨의 논설문은 오스트리아학파와 더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왜냐하면 새뮤얼슨은 '재전환'(reswitching)1에 대한 자신의 논거들이 오스트리아학파의 견해에 진지한 반론을 제기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뮤얼슨이 논설문의 개시 단락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매우 낮은 이자율 하에서, 매우 높은 이자율에서만 실행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생산요소의 조합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재전환 현상은 단순한 현학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제본스, 뵘바베르크, 빅셀 그리고 다른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단순한 설화들(그들에 따르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소비를 자제하는 것에 의해 이자율이 하락함으로써, 생산방식은 이를테면 좀 더 '우회적'이고, '기계화'되고, '생산적'이게 된다)이 보편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학파가 패배했고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했다는 엉터리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사회주의 경제계산 논쟁과 마찬가지로, 경제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스트리아학파에 대한 새뮤얼슨의 반대에 대체로 동의하는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주류 신고전학파 사고방식을 몹시 대표하는] 마크 블라우그(Mark Blaug)는 재전환 현상의 가능성이 오스트리아학파의 자본이론을 궁극적으로 폐기하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우리가 곧 살펴보게 될 것처럼, 이는 완전히 근거 없는 억측이다.

재전환

기술재전환은 하나의 생산양식이 높은 이자율에서 더 수익적이고, 중간 정도의 이자율에서는 수익적이지 못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매우 낮은 이자율에서는 다시 수익적인 현상을 가리킨다. 새뮤얼슨은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단순화된 예시를 사용한다:

한 단위의 특정한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들이 오로지 두 개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기술 A는 첫번째 기간에는 0 단위의 노동 투입량을 요구하고, 두번째 기간에는 7 단위의 투입량을, 그리고 세번째 기간에는 0 단위를 요구한다. 세번째 기간이 끝난 뒤에야 한 단위의 산출물이 생산된다. (우리는 어떠한 추가 투입량도 요구하지 않는 마지막 세번째 기간을 미완성된 자본재가 산출된 재화로 '숙성'되기 위한 대기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술 B는 첫번째 기간에는 2 단위의 노동 투입량을, 두번째 기간에는 0 단위를, 그리고 세번째 기간에는 6 단위를 요구한다. 그리고 나서 한 단위의 산출물이 생산된다.

이제 문제는 이러하다. 주어진 임금율과 산출물의 가격을 고려할 때, 이 두 기술들 중에서 무엇을 사용해야 하는가? 해답은 이자율에 있다. 이자율이 100%보다 더 높다면, 기술 A가 더 수익적이다. 50-100% 사이의 이자율에서는 기술 B가 우월하다. 그런데 이자율이 50%보다 낮다면, 다 기술 A가 더 수익적이게 된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직관은 다음과 같다. 기술 B는 초기 지출로 2 단위의 노동을 요구하는데, 이자율이 매우 높다면 다른 고려사항들이 덜 중요하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매우 낮은 이자율 하에서 기술 A가 7 단위의 노동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기술 B는 8 단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기술 B를 다시 비수익적으로 만든다. 오로지 중간[정도]의 이자율에서만 기술 B가 더 수익적이다.)

[역주: 이자율 x에 대해서, 기술 A를 적용했을 때, 노동으로 환산된 생산물의 가치는, 생산이 완료된 시점에서 {[0(1+x)+7](1+x)+0}(1+x)고, 기술 B를 적용했을 때는, 생산물의 가치가, 생산이 완료된 시점에서 {[2(1+x)+0](1+x)+6}(1+x)다. 그래프 상에서 두 함수를 표현하면 x가 -1, 1, 1/2일 때 교차한다. (두 방정식을 연립하면, 2x^3-x^2-2x+1, 즉 (x-1)(x+1)(2x-1)이 된다.) 그러므로 x > 1일 때, 그리고 -1 < x < 1/2는 기술 A가, 반면에 1/2 < x <1일 때와, x < -1일 때는 기술 B가 더 생산적이다. 이때 X를 양수로 한정한다면, 이자율이 100%(즉 x= 1)를 초과했을 때와 50%(즉 x= 1/2) 미만일 때는 기술 A가, 이자율이 두 수의 사이에, 즉 50% 초과, 100% 미만에서는 기술 B가 더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재전환의 함의?

재전환의 이러한 예시는, '우회생산'(우회생산)의 측면에서, 혹은 지본집약도에 대한 순수하게 물리적인 관점에 기초하여 생산과정을 순위매기는 것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만약 이자율이 초창기에 110%였다면, 기업가는 기술 A를 이용했을 것이다(산출 재화를 어쨌든 판매하는 것이 여전히 수익적이라면).

이제 만약 이자율이 75%로 떨어졌다면, 기업가는 더 값싼 생산방식인 기술 B로 전환할 것이다. 혹자는 뵘바베르크주의 관점에 입각하여, 이것이 기술 B가 더 우회적임을 입증한다고, 또 노동 투입이 경쟁적인 기술 A에 비하여 기술 B에 더 오랜 시간 투자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조급한데, 왜냐하면 이자율의 추가적인 감소, 예컨대 20%까지 감소한다면 기술 A가 다시 한번 더 수익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기술 중에서 무엇이 더 자본집약적인지 판단하는것은, 이자율을 먼저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는 자본재들이 서로 이질적인 상황에서, (결국 이자율에 의존하는) 화폐 가격들의 단순한 합계에 의지하지 않고서 총 자본의 수량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더 일반적인 관찰과 꽤 유사한 상황이다.

오스트리아학파는 틀렸는가?

재전환은 오스트리아학파 자본 그리고 이자이론의 결론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전혀 아니다! 새뮤얼슨의 예시는 그저 특정한 재화를 생산하는 오직 두 가지 방식만이 존재하는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에서는, 새뮤얼슨이 신나게 지적하듯이 "사회는 미래의 더 많은 소비재를 얻기 위해 현재의 소비재를 희생시킴으로써 더 높은 이자율에서 더 낮은 이자율로 이동한다…"는 상식적인 견해는 확실히 효력을 잃는다.

그런데 뵘바베르크 혹은 하이에크가 단 한번이라도, "우리의 결론이 틀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물론 아니다! 수 많은 반대의견에 대응하여, 뵘바베르크는 그의 논지가 "현명하게 선택된 생산의 우회적 방식의 선정 혹은 확장은 일반적으로 더 큰 생산성으로, 즉, 똑 같은 생산요소들을 지출하면서도 더 큰 혹은 더 나은 재화의 생산으로 귀착된다고 주장"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자본과 이자 2권, p.2)

풀어서 설명하자면, 뵘바베르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만약 기업가에게 주어진 산출물을 생산할 더 많은 시간을 내어준다면, 대체로 기업가는 노동과 원자재를 더 적게 투입함으로써 주어진 산출물을 생산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을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에게 동일한 수량의 노동과 원자재를 내어준다면, 그는 일할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질수록 더 큰 산출물을 생산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는, 저축의 효과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기본적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현재의 개인들이 소비재를 (한계[수량]에서) 희생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희생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에 비해 더 많은 도구, 기계, 그리고 공장 등의 창출이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결국 노동은 더 생산적이게 된다. 새로운 자본재가 창출되고 경제에 통합된 이후에, 평균적인 산출물(즉, 소비[가 가능한 산출물의 양])은 저축이 증가하지 않았을 때 산출물이 증가했을 때 보다 더 증가한다. 뵘바베르크는 이러한 서술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주어진 어떤 시간에서라도, 그비록 기술적으로는 효율적이되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생산방식, 즉, 현존하는 시장이자율에서는 수익성이 없지만 더 낮은 이자율에서는 수익적으로 바뀌는 시간-소비적 생산은 "덩그러니 놓여"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뮤얼슨의 모형은 이 점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가? 다시 말해, 새뮤얼슨은 오로지 두 생산기술만 존재하는 허구적 세계와 대비되는 현실 세계에 대한 뵘바베르크 등의 설명이 "단순한 설화"에 불과하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인가?

아니,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가설적 모델을 통해 어떻게 이자율의 하락이 더 낮은 자본량과 더 낮은 일정한 소비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 후, 그가 말하기를: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경험적으로 드문지의 여부는 답하기에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현대의 혼합경제는,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매우 많은 대안적 기술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일하게 수익적인 새로운 방식들이 소진되면서 "수확체감" 곡선에 따라 작동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풀어서 말하자면, 새뮤얼슨은 우선 뵘바베르크 등이 틀린 가설적 세계의 논리적 가능성을 입증하기는 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뵘바베르크 등이 정말 정확하다는 것을 시인한다.

결론

어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주어진 문제에 관하여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하곤 한다. 새뮤얼슨이 논설문은 사실상의 패배선언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찍이 재전환이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그는 '콥-더글러스'(Cobb-Douglas) 생산 함수를 가정해왔지만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나서, 새뮤얼슨은 재전환이 결국 논리적 가능성에 불과하다는 주류 경제학적 신앙고백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었고, 그러한 가능성을 증명하기에 적당한 술수를 예시로 삼았다.

따라서 새뮤얼슨이 자기가 재전환의 논리적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어떤 식으로라도 오스트리아학파 이론을 반박한다고 생각한 것은 전적으로 틀렸다. 새뮤얼슨의 생각과는 반대로, 오스트리아학파는 단 한번도 재전환이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사실, 주류 경제학의 도전에 응해야 하는 상황에 억지로 놓이게 되지 않는 이상, 보통 오스트리아학파는 그러한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는다(새뮤얼슨은 뵘바베르크가 "유사수학적 공식이 경제학적 문제들에 대한 참된 본질 그리고 인과성을 파악하는데 실패한다는 구태적인 19세기의 관념"에 집착한다고 비판하면서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러한 경향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기술재전환의 가능성은 경제학을 주관적 가치판단이 아니라 순수한 물리적 사실들 위에 기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성을 가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뵘바베르크의 분석 중 많은 부분도 이러한 접근법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해야 한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학파의 자본 그리고 이자이론의 기본적 결론은 새뮤얼슨의 비판들에 훼손당하지 않았는데, 대체로 새뮤얼슨은 오스트리아학파의 핵심주장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나는 뉴욕대 경제학과의 알베르토 비신(Alberto Bisin) 교수와 이 주제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는 재전환과 자본역전(capital reversal)이, 후방굴절형 노동공급곡선(backward bending labor supply curve)의 가능성 만큼이나 신고전학파의 이론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나 역시 좁은 식견이기는 하지만 이에 동의한다).




태그 : #주류경제학비판 #자본과_이자 #생산이론

  1. 재전환은 케임브리지학파가 신고전학파의 자본과 이자이론을 비판하며 제시한 현상이다. 신고전학파의 이론에 따르면, 이자율이 하락하면 일반적으로 자본가는 점점 더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선택할 것이다. 이자율, 즉 자본을 조달하는 비용이 싸지는 상황에서는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케임브리지학파는 그런데 이자율과 자본의 수량 사이의 역관계가 엄밀한 인과관계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즉 우하향하는 수요-공급 곡선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이자율의 변화가 자본수요의 증가를 나타내야 하는 경우에도 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이자율이 계속 하락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본집약도가 낮고 노동집약도가 높은 생산기술을 채택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