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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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 과도한 이익이란 없다 (이윤과 손실의 사회적 기능)

해외 칼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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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11-2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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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wig von Mises | American economist | Britannica

Ludwig von Mises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20세기에 가장 명성이 높았던 경제학자이자 사회철학자 중 한 명이다. 길고 생산적인 삶을 살면서, 그는 개별 행위자가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하여 목적 지향적으로 행동한다는 근본적인 공리(axiom)에 바탕을 둔 통합된 연역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발전시켰다. 비록 그의 경제분석 자체는 —경제학자가 가진 가치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가치중립적(value-free)’이지만, 미제스는 인류의 영속적 발전을 위해 지속 가능한 유일한 경제정책이 무제한적인 자유방임(laissez-faire), 자유시장, 결코 방해받지 않는 사유재산권(the right of private property)의 행사, 그리고 정부의 역할을 그 영토 내의 시민과 재산의 보호로 엄격하게 제한함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주제 : #자유시장

원문 : In a Free Market, No Profit is "Excessive" (게재일 : 2017년 1월 17일)

이윤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실제 생산과 대중의 바람을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해 사용 가능한 물질적, 정신적 자원을 활용하여 이루어졌어야 할 생산 간의 차이, 즉 불균형이 생겼을 때에만 이윤이 생긴다. 이윤은 이 불균형을 제거하는 사람들이 받는 보상이다. 이윤은 이 불균형이 완전히 제거되는 순간 사라진다. 균일하게 돌아가는 가공적 경제모형에서 이윤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당연히 시간선호를 감안한 생산 보완요소들의 가격들의 합계와 상품의 가격이 일치하게 된다.

앞에서 말한 불균형이 클수록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얻는 이윤도 크다. 불균형은 때때로 과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윤에 '과도한'이란 말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람들은 기업에 사용된 자본으로 얻은 이윤을 가지고 그 이윤을 자본의 백분율로 측정함으로써 과도한 이윤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방법은 합자회사와 주식회사에서 관행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총이윤을 개별 동업자와 주주들에게 몫을 할당하는 데 적용된다. 이 사람들은 사업을 실현하는 데 기여한 정도가 각각 다르고, 자기들의 기여 정도에 따라 이윤과 손실을 나눈다.

그러나 이윤과 손실을 낳는 것은 사용된 자본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처럼 자본은'이윤을 낳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본재는 그 스스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죽은 것이다. 그것들이 좋은 아이디어에 따라 활용되면 이윤이 생긴다. 잘못된 아이디어에 따라 사용되면 이윤이 아니라 손실을 초래한다. 이윤 혹은 손실을 내는 것은 기업가적 결정이다. 궁극적으로 이윤이 창출되는 것은 기업가의 정신, 즉 정신적 행동이다. 이윤이란 시장의 미래 상태를 예측하는데 성공한 정신의 산물이다. 이것은 정신적이고 지적인 현상이다.

이윤을 과도하다고 비난하는 무지함은 쉽게 볼 수 있다. c만큼의 자본을 가진 기업가가 p의 양만큼 생산하여 비용을 초과한 잉여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가격s로 팔아 결과적으로 n퍼센트의 이윤을 얻었다. 만약 기업가가 덜 유능했다면 그는 똑같은 양의 p를 생산하는 데 2c의 자본이 필요했을 것이다.  사용된 자본에 대한 이자가 두 배가 되기 때문에 생산비용이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데, 좀 더 쉬운 설명을 위해 이 사실은 무시하기로 하자. 그러나 여하튼 가격 s는 c가 아닌 2c와 비교될 것이고, 따라서 이윤은 사용한 자본의 2분의 n퍼센트가 될 것이다. '과도한' 이윤은 '적당한' 수준으로 줄게 될 것이다. 왜? 기업가가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효율성 부족으로 인해 자본 c가 남아 있어 다른 상품의 생산에 사용할 수 있었다면 동료들이 누릴 수 있었을 이익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윤이 과도하다고 효율적인 기업가에게 차별적인 차별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처벌함으로써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해를 가한다. 이윤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잘 봉사한 데다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다. 모든 생산 활동의 유일한 목표는 가능한 최대의 산출을 낼 수 있도록 생산요소를 투입하는 것이다. 한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투입이 적으면 적을 수록 희귀한 생산 소는 다른 상품의 생산에 더 많이 활용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점을 기업가가 더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록 그는 비난을 더 많이 받고 더 많은 세금을 부과 당한다. 생산 단위당 비용의 증가, 즉 낭비가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이와 같이 생산의 과정, 그리고 이윤과 손실의 기능 및 성격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증거는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속설, 즉 이윤은 생산비용에 더해진 것이며 오로지 판매자의 결정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된다는 속설에 있다. 이 믿음 때문에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게 된다. 많은 정부가 납품되는 품목의 생산비용에 일정률의 이윤을 붙인 가격에 따라 납품업자와 계약을 맺는 것도 바로 이 믿음 때문이다. 그 결과 납품업자가 잉여금을 많이 가지며 가질수록 그늠 점점 더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형태의 계약 때문에 미국은 양 세계대전에서 지출해야 했던 금액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러나 관료들, 이런저런 전쟁기관에서 근무한 경제학 교수들은 이 문제를 현명하게 다루었다고 자랑했다.

모든 사람들, 비기업가뿐만 아니라 기업가들도 다른 사람들이 번 이윤을 비난한다. 시기심은 인간의 공통된 약점이다. 사람들은 자신들도 성공적인 사업가들이 보인 예견력과 판단력을 가졌다면 그런 이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린다.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인식할수록 그들의 적개심은 더욱더 격렬해진다.

성공한 기업가가 팔려고 내놓은 상품을 얻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이 없다면 이윤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품에 경쟁적으로 몰려든 바로 그 사람들이 사업가를 비난하고 그들의 이윤을 부당이득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심의 의미론적 표현을 애써 벌은 소득과 불로소득간의 차이에 대한 세간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표현은 교과서에, 법적 용어에, 행정절차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뉴욕 주 소득신고서 양식 201호에 '소득;은 고용인이 받은 보수만을 의미하며, 전문성을 활용하여 얻은 수입을 포함한 기타 모든 수입은 불로소득임을 암암리에 의미하고 있다.  주지사가 공화당원이고 주 의회가 공화당 다수인 주에서 이런 용어가 쓰여지고 있다.

이윤이 고용인들에게 주는 봉급을 넘지 않는 한 여론도 너그럽다. 모든 초과액은 부당하다고 거부된다. 조세의 목적은 지불능력 원칙하에 이 초과분을 몰수하는 것이다.

이윤의 주 기능 중 하나는 대중의 만족을 위해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자본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자본의 통제권을 넘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윤을 더 많이 낼수록 그에 따라 그의 재산도 점점 더 불어나게 되고, 사업상의 활동에서 그의 영향력도 점차 커진다. 이윤과 손실은 소비자들이 자기들에게 가장 잘 맞추는 사람의 손에 생산 활동의 지휘권을 넘기는 장치다. 이윤을 줄이거나 압수하려고 취하는 조치는 어떤 것이든지 이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러한 조치들은 소비자들이 생산과정을 제어하는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의 기계가 비효율적으로 작동하고 대응력도 떨어지는 것이다.

일반인들의 질투심은 기업가들의 이윤이 마치 온전히 소비를 위해 사용되는 것처럼 여긴다. 물론 이윤의 일부는 소비될 것이다. 그러나 이윤 중의 아주 일부만을 소비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다시 기업에 재투자하는 기업가들만이 사업 영역에서 부와 영향력을 획득한다. 소기업을 대기업으로 만드는 것은 소비가 아니라 저축과 자본축적이다.




태그 : #기업가 #기업가정신 #간섭주의 #경제적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