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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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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중요한가? (2편)

해외 칼럼
경제학
작성일
2022-11-11 18:52
조회
447

Lew Rockwell - Wikiwand

Llewellyn H. Rockwell Jr.
가장 영향력있는 자유주의자 중 한 명인 류 락웰은 미제스 연구소의 창립자 겸 회장이며, 류락웰닷컴의 운영자이다. 일찍이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졌던 락웰은 대학을 졸업하고 자유주의 출판사인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에서 근무했는데, 그곳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저술을 편집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접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머레이 라스바드를 만나 완전한 아나코-캐피탈리스트가 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자유의 수호자 론 폴의 비서실장으로 재직했다. 1982년에는 마침내 미제스 연구소를 창립하면서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 운동을 주도하는 활동가로 자리잡았다.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 개요

원문 : Why Austrian Economics Matters
번역 및 편집 : 전계운 대표
  • 본 글은 류락웰이 팜플렛으로 인쇄한 내용과 위의 링크를 맥락에 맞게 편집한 글입니다.
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중요한가?(1편)

사회주의 계산 문제

경기변동 논쟁 당시에 미제스와 하이에크도 사회주의에 대한 논란에 휘말렸었다. 1920년에 미제스는 가장 중요한 기사 중 하나인 ‘사회주의 연방에서의 경제 계산(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을 썼고 뒤이어 <사회주의>(Socialism)도 썼다. 그때까지도 사회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있었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 자유 가격과 사유재산이 없다면 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지 설명하는 데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미제스는 합리적인 경제 계산에는 손익 계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만일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손실을 입게 되면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호가 없다면 경제 행위자는 자신의 결정이 타당한지 평가해볼 방법이 없다. 즉, 그는 자신의 결정 혹은 생산 결정의 기회비용을 평가할 수 없다. 가격과 손익 평가는 필수적이여야 한다. 미제스는 이러한 가격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 내에서 사유재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이 공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본재를 사거나 팔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재에 가격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격이 없으면 이윤-손실 평가도 없다. 이윤과 손실 없이는 실물경제가 존재할 수 없다. 공장을 새로 신설해야 하는가? 사회주의하에서는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모든 것을 어림짐작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미제스의 에세이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 논쟁을 촉발시켰다. 사회주의자 중 한 명인 오스카 랑케는 경제 계산을 위해 가격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중앙계획자들이 마음대로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소비자들의 수요를 알아내기 위해 상점에서 서 있는 고객들의 줄을 지켜볼 수 있으며, 중앙계획자들이 생산의 신호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제스는 ‘시장 놀이’도 효과가 없으며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내부 모순으로 인해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계산 논쟁을 계기로 미제스의 주장을 사회에서 지식의 사용에 관한 자신의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확장했다. 하이에크는 시장 과정에서 생겨난 지식은 어떤 사람이든 얻기 어렵고 특히 중앙 계획가도 그러하다고 주장했다. 번영하는 경제를 위해 필요로 하는 수백만 개의 결정을 한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지식 문제 이론은 하이에크의 남은 학문적 생애를 지배한 사회질서 이론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미제스는 나치로부터 탈출한 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소수의 자유시장 기업가를 만났는데 이 중 가장 호의적이었던 사람은 로렌스 페르티그(Lawrence Fertig)였다. 그곳에서 페르티그는 미제스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도왔다. 대부분의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페르티그의 공헌을 인정하고 있다. 밀턴 프리드먼이 말했던 것처럼 이 나라에서 아무도 미제스만큼 자유 시장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암흑기였다. 그는 마땅히 받아야 할 유급 대학교수직을 얻기 어려웠고 그로 인하여 미제스의 사상을 더 많은 청중들에게 알리기 어려웠다.

미국 망명 직후에 미제스는 독일어로 완성된 <인간 행동>을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다시 쓰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책에서 미제스는 사회과학 전반과 특히 경제학의 철학적 토대를 세심하게 재구성했다. 미제스의 <인간행동>은 중요한 공헌으로 입증되었다. 경험주의의 나이브한 학설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미제스의 '인간행동학' 혹은 인간 행동의 논리는 계속해서 학생들과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케인스주의의 오류와 역사학파의 거짓 주장을 몰아내고 오스트리아학파의 부흥을 가능하게 했다.

부흥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가격 체계는 왜곡되어있고, 자유시장은 비합리적이고, 주식 시장은 야성적 충동으로 움직이고, 민간 부문은 신뢰할 수 없고, 정부는 경기가 침체에 빠지지 않도록 계획을 할 수 있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은 반비례한다는 케인스주의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저명한 경제학자를 찾기 어려웠다.

한 명은 예외였는데, 1960년대 초 <인간, 경제, 국가>라는 방대한 경제전문서를 쓴 미제스의 또 다른 위대한 제자인 머레이 N. 라스바드였다. 라스바드는 이 책에서 오스트리아 학파 사상에 자신의 공헌을 추가했다. 마찬가지로 미제스의 다른 중요한 제자인 한스 F. 센홀츠와 이스라엘 커즈너의 연구도 이 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헨리 해즐릿은 당시 뉴스위크에 주간 칼럼을 쓰면서 오스트리아학파를 알리기 위해 누구 못지않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자신도 오스트리아 학파에 공헌을 했다.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케인스학파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1974년 하이에크가 미제스와의 경기변동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오스트리아학파와 자유시장경제학 전반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 세대의 대학원생들이 미제스와 하이에크의 저작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연구 프로그램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오늘날 오스트리아학파는 미제스 연구소의 저작들에서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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