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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 와이어 7월호]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업적 평가는 주의가 필요하다

국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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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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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덕
1952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대학교 무역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퇴직하여 동 대학 명예교수이다. 한국 미제스 연구소의 학술분야를 총괄하는 아카데미 학장으로서, 자유주의 철학과 자유시장경제에 관한 연구, 강의, 발표 등에 관심과 노력을 쏟아왔다.

주제 : #인물평가

2023년 미제스 와이어 목차 <펼치기>

이승만 대통령을 정치와 안보를 넘어 경제에서도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역사가를 본다. 과연 그런 평가는 타당한가?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농업의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분배가 개선된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소작제 폐지로 인한 농업 생산성 증가는 농촌지역에서의 유휴 인력과 위장실업자를 도시 노동자로 전환할 수 있는 산업 예비군을 만들어 내었다. 그 이외에도 농지개혁이 1950-1960년대 한국 사회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작지 않았다. 앞에서 나열한 것들만 보면, 농지개혁은 이승만 대통령의 치적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농지개혁을 단순히 그의 치적으로만 간주할 수 없는 이유도 적지 않다. 정부는 농지개혁 과정에서 총상환량의 약 52.5%를 가져갔다. 정부가 농지개혁 과정에서 가장 큰 몫을 가져갔다는 점에 보면 농지개혁은 ‘농지 사회주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소작농지의 소유권의 정당성과 관련한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 노비제를 긴 기간에 걸쳐 시행했고 자작농마저도 1-2명의 노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것은 농지개혁 직전의 지주의 농지는 일정 부분 노비, 즉 소작농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미국의 흑인 노예를 생각해보자). 그러나 필자를 제외하고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문제제기를 하는 연구자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없었다고 이승만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정권의 저곡가 정책과 수입 농산물 등으로 농가 부채가 누적되었을 뿐만 소득 불평등도 악화되었다. 즉 1950년대 한국 농업은 위기였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의 성과가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농업이 위기였다는 것은 농업이 얼마나 큰 위기에 봉착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교육 관련 주요 사건은 초등교육 의무제 실현, 파괴된 학교 시설의 복구, 교육에 대한 국가권력의 중앙집중적 통제, ‘6-3-3-4’학제 확립 등이다. 이승만이 1954년부터 초등교육을 의무화(초등교육 의무화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찬·반 양론이 존재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점을 제외한다)한 것은 그의 공적으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시설의 복구나 신설 학교의 설립은 미국의 원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미국으로부터 많은 교육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 교육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평등주의 등의 이념이 지배적이었다. 이승만 자신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미국 교육의 혜택을 누구보다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 교육계가 자유와 민간의 역할을 중시하는 미국 교육의 사상 또는 이념을 일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살리도록 하는 데 공헌한 바가 없다. 그 이후 한국 교육은 점차 세 가지 이념이 더 지배적이 되어왔다.

이승만 정부는 노동자의 경영참가권과 이익균점권을 부정함으로써 형식적이지만 ‘자유기업주의’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1공화국 정부의 귀속기업체 매각은 당시에 국유나 공유로 운영되었던 귀속기업체의 경영을 크게 개선했다. 귀속기업체들이 사유화되면서 사유재산제의 기본 적인 틀을 더 확고히 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승만 정권은 1954년 개헌과 국무원 고시를 통해 국·공유화의 범위도 제도적으로 축소했다.

그러나 경제의 운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정부의 인위적인 저곡가, 저금리, 저환율, 원조물자의 수입할당, 원조자금의 배정, 융자의 집중지원 등을 통해 민간의 경제행위에 대해 정부의 간섭과 개입은 넓고 깊었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권의 자유기업주의는 일시적이었고 ‘간섭주의’가 만연했던 시대라고 규정해도 무리가 없다. 그 결과로 부정·부패의 만연, 정경유착, 계층 간 갈등과 혼란, 각종 비효율 등과 같은 정치·경제·사회적인 문제들이 표출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1953년 이후 추진한 산업정책은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이다. 여기에는 무역정책도 내포되어 있다.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의 핵심은 주요 생필품(3백(白)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설탕, 밀가루, 면방직)을 자체 생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산업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3백 산업 제품의 수입을 금지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자유무역과 수출촉진 정책-수입대체가 아니라-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유무역과 수출촉진 정책을 원하지 않았고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세 정책을 비교하면, 완전한 자유무역 정책이 최선이고, 그 다음으로 수출촉진 정책, 수입대체산업화 정책 등의 순서이다. 수출촉진 정책이나 수입대체산업화 정책, 둘 모두가 정부가 시장에 간섭한다는 점에서 중상주의의 일종이다. 그러나 수출촉진 정책은 수입대체산업화 정책보다 대외지향적이라는 점에서 경제성과가 월등히 우수하다. 만약 이승만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이승만 정권과 그 이후의 경제성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지만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인도와 한국을 비교하면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의 열등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산업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3공화국 이후부터 수출촉진 정책을 채택하여 빠른 경제성장을 실현했지만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시행했던 인도는 근래에 와서 그 정책을 포기하고 수출촉진 정책을 채택했다.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으로는 산업화를 통하여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환율의 과대평가, 저금리정책과 과도한 재정투융자, 전시 재정의 머니타이제이션(1956년까지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27-65%였고 1957년 이후에 그 율이 10% 이하로 낮아졌다), 조세부담률의 급격한 인상(1953년 13.4%에서 1960년에 29.4%까지 인상) 등이 1공화국의 또 다른 경제정책이다. 앞에서 언급한 정책들의 부정적 영향은 이승만의 치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직관이다.

서두의 역사가는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시장경제’를 신뢰했다고 평가한다. 그가 자유시장을 중요시 여기는 제도 또는 정책을 채택했다고 여겨지는 부문은 적고 간섭주의적 제도나 정책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이승만이 경제에 있어서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자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펼친 정책을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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