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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바드와 토마스 쿤: 경제학의 발전과 오스트리아학파의 미래

해외 칼럼
철학
작성자
작성일
2020-07-10 09:50
조회
737

David Gordon
* 미제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 <미제스 리뷰(The Mises Review)> 편집자

주제 : #철학과_방법론

원문 : Murray Rothbard and Thomas Kuhn (게재일 : 2020년 5월 1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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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철학(Friday Philosophy) <펼치기>


토마스 쿤(Thomas Kuhn)의 1962년작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는 머레이 라스바드의 명저 <경제사상사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관점(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내가 라스바드의 저술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엄청나게 배울 거리가 많고 통찰력이 있다.) 언뜻보기에 이는 정말 놀라워 보인다. 비록 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그가 과학이 현실세계에 대한 접근을 제공한다는 것을 부정했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진리가 논란이 많은 개념인 '패러다임(paradigm)'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스바드는 '과학적 실재주의(scientific realism)'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반드시 진리인 지식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라스바드는 어떻게 과학사에 대한 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실재주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는 쿤의 철학은 거부하지만, 과학사에 대한 견해를 상당 부분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라스바드가 설명하기를: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혁명의 구조>는 지속적인 진보, [역주: 과학이] '계속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onward-and-upward)' 접근법을 나에게서 앗아가버렸고, 모두에게도 그렇게 되어야한다. 쿤은 경제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 대신 철학자와 과학사가들의 표준적인 방식으로 물리학, 화학, 천문학같은 '견성과학(hard science)'에 초점을 맞추었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지적 담론에 입장시켰으면, 내가 좋아하는'과학사에 대한 휘그주의 접근(Whig theory of the history of science1)'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경제학을 비롯한 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역사가들이 지지하는 휘그주의 이론은, 과학사상이 꾸준하게 매년에 걸쳐 이론을 개발하고, 조사하고, 시험하는 방식으로 발전해나가며, 그리하여 1년 후, 10년 후, 아니면 한 세대 후에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며, 더 정확한 과학 이론을 가지게 된다는 관점이다.

19세기 중엽 잉글랜드에 만들어진 휘그주의 역사관은 상황은 항상 언제나 이전보다 더 좋아진다고 (그러므로 반드시 좋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휘그주의 과학사학자도 마찬가지이다. 보통의 휘그주의 역사학자에 비교하면, 휘그주의 과학사학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더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어떤 특정한 과학적 교리에서든 "더 늦게 나온 것이 언제나 더 낫다(later is always better)"고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정말로, (일반역사를 연구하던 과학사를 연구하던) 희그주의 역사학자는 역사의 어느 시점이던 상관 없이, "그 시점에 무엇이 있었던, 무엇이든지 옳았다"고 말하거나, 최소한 "아무리 못해도 이전보다는 나았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의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안일하고 짜증스러울 정도로 한 없이 낙천적인 낙관론이다. 경제사상의 역사기록학에 있어, 모든 개별 경제학자, 또는 최소한 모든 학파의 경제학자들이 미래를 향한 끝없는 발전에 중요하지만 작은 기여를 조금씩 했다는 관점을 암묵적으로 가진다면, 그 결과는 확실하다. 만약 그런 관점을 취한다면, 경제사상 학파 전체를 무효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결함 등의 중대한 시스템적 오류는 있을 수 없으며, 경제학의 세계가 영구히 길을 잃고 방황할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쿤은 이것이 과학이 발전해온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철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단 중심 패러다임이 선택된다면, 여기에는 어떤 시험이나 조사가 없고, 지배 패러다임이 일련의 실패를 범하고 변칙을 허용하여 "위기 상황"이 발생한 이후에야 기본 가정들에 대한 시험이 이루어진다. 어떤 패러다임이라도 다른 것보다 훌륭하거나 좋을 수 없다는 쿤의 암시가, 과학에 있어서는 비교적 덜 타당성있지만, 역사와 사회학에 대해선 진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그의 허무주의적인 철학적 전망까지 우리가 채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표준적인 낭만적 또는 낙천적 견해가 이과 과학에서조차 통용될 수 없다면, 하물며 경제학을 비롯한 '연성과학(soft science)'에서는 완전히 틀렸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실험실에서 시험할 수 없으며, 심지어 '훨씬 더 부드러운(even softer)', 정치, 종교, 윤리와 같은 수 많은 학문은 경제학자의 전망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경제학에서 나중에 등장한 사상이 이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잘 알려진 경제학자들이 발전과정에 견고하지만 조금씩 기여했다고 가정할 수 없다. 모든 경제학자가 끊임없이 발전하는 조직체계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경제학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방식으로, 심지어 지그재그 방식으로 발전해왔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중에 등장한 시스템적 오류가 보다 일찍 등자했지만 더 건전한 패러다임을 밀어냈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경제사상을 완전히 되게 전락시키거나, 심지어 비극적인 경로로 이탈시켰을지도 모른다. 경제학의 전반적인 행로는 특정 기간에는 상승했다가, 다른 기간에는 하강할 수 있다. (An Austrian Perspective, vol. 1, pp. ix–x)

1986년의 명강의 "마르크스에서 하이에크까지의 경제사상사(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From Marx to Hayek)"의 제1강 "이데올로기와 역사이론(Ideology and Theories of History)"에서, 라스바드는 그가 쿤으로부터 받아들인 것과 거부한 것에 대해 특유의 언변으로 상세히 설명한다:

토마스 쿤은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과학철학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나는 그가 철학자로서는 그렇게 흥미로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과학의 사회학자로서 흥미롭다. 그는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정말 발달해왔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과학의 발달이 어떤 직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발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과학의 기본적 공리를 시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다. 일단 공리 (혹은 그가 말하길 "패러다임", 즉 기본적 믿음들의 집함) 가 채택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응용하기만 하면 된다. 이제, 쿤의 용어를 빌리자면 여러 지엽적인 문제나 "퍼즐"이 문제시 되지만, 일단 기본적인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이론은 여러가지 변칙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까지, 즉 많은 것을 설명하는데 분명하게 실패하기 시작할 때까지 잠시 동안 계속된다. 쿤이 말하길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 있고, 이 때 혼란과 경쟁적인 패러다임들이 나타난다. 만약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러한 퍼즐들을 더 잘 해결할 수 있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되기 시작하고, 과학자들은 이전의 다른 것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쿤은 어떤 패러다임도 다른 패러다임보다 더 낫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쿤에게 있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지식을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비록 지금의 패러다임이 이전의 것보다 낫다고 해도, 지식은 종종 사라진다. 한 예는 고대 그리스의 전투병기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다. 우리는 아주 최근까지 그리스의 불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화염방사기와 유사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우리가 화염방사기를 발명했을 때야 비로소 이 점을 알게 되었다.

1900년에는 아무도 그리스의 불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또 다른 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제작법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복재할 수 없는데, 모든 것을 시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성요소, 즉 비법이 분실된 후에는 알 수가 없다.

이것들은 명백하고 분명한 예들이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나의 친구는 18세기의 광학이 밝혀낸 어떤 법칙들을 우리가 지금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광학의 특정 분야에 대해 18세기에 알았던 것보다 덜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사회과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이것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실이다.

그런데, 또 내가 한 가지 강조해야하는 점은, 노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대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늙은이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할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즉 지적으로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지 않은 대학원생과 학부생들이다.

유명한 예시는 18세기의 자유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의 산소 발견이다. 그는 산소를 발견했음에도 그것이 진짜로 산소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플로지스톤설(Phlogiston theory)에 너무 갇혀있었고, 산소가 단지 '탈플로지스톤화된 공기(dephlogisticated air)'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발명, 자신의 발견이 가지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지만, 어쨌든 그의 예시는 정말 전형적인 사례이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오스트리아학파 지지자라면, 전략적으로 당신은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이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같은 거장을 전향시키려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패러다임에 갇힌 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막 등장하는 사람들, 새로운 사람들, 애매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 대학원생들을 전향시켜야 한다. 이 사람들이 당신이 전향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새뮤얼슨이나 프리드먼, 그외 패러다임을 지배하는 사람들을 바꾸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그래서, 말하자면, 우리의 전쟁은 새로운 사람들의 영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쿤의 철학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고자 한다. 그의 상대주의적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철학적 입장에 의존한다. 그는 강력한 '의미론적 전체론(meaning holism)'을 지지했는데, 이는 과학의 이론적 용어들이 특정한 이론 밖에서는 정의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뉴턴 물리학에서 '질량(mass)'은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질량'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측은 너무 이론에 기초하기 때문에 다른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서로 세상을 다르게 본다. 새로운 이론이 이전의 이론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세계에 대한 중립적인 묘사도 없다.

하지만 쿤이 옳은가?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우주와 시간에 대해 다른 이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서로 다른 세계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은 것 같다. 쿤의 과장된 주장을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 쿤의 견해에 대한 두 가지 좋은 비판을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스토브(D.C. Stove)의 <포퍼 그 이후: 네 명의 현대 비합리주의자들(Popper and After: Four Modern Irrationalists)>이며, 다른 하나는 쉐플러(Israel Scheffler)의 <과학과 주관성(Science and Subjectivity)>이다.

어떤 독자들은 라스바드의 견해에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과학이 라스바드가 말하는 방식대로 발전한다면, 즉 어떤 사상가 집단이 다른 사상가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그저 대체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결국 과학을 상대적인 진리로 만들어버리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진리와 보편적 합의는 같은 것이 아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을 거부한다면, 아마 당신의 추리를 재검토해보는 것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추리가 옳다면 당신은 입장을 바꾸어선 안된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이 테스트를 매우 잘 견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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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주: 휘그주의 역사관은 과거로부터 미래의 발전이, 언제나 더 많은 자유와 계몽을 향한 필연적인 전진으로 해석한다. 이는 진보적 전진을 강조하는 것으로, 같은 관점이 과학사에 적용된다면, 인류는 언제나 과거보다 미래에 더 나은 과학적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고 바라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