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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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오스트리아학파를 향한 호페의 여정: 사회주의와 경험주의의 문제를 깨달은 어린 시절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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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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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Hermann Hoppe
한스-헤르만 호페는 살아있는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호페는 멩거, 뵘-바베르크, 미제스, 그리고 라스바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로-자유주의(Austro-libertarianism)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서,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인간행동학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적어도 지금까지는—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개요

원문 : My Path to the Austrian School of Economics (게재일 : 2019년 12월 6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2편]  미제스 "인간행동"의 반박불가능한 필연성
[3편/完] 반자유주의의 원인과 자유의 미래

오늘날, 20대 혹은 30대의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세상과 공유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고령이지만 제 인생에서 개인적인 일이나 경험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사적인 대화를 위해 그것들을 남겨놓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행사를 계기로 나는 나의 지적인 발달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처음 접한 어린 시절부터, 종종 위험한 미치광이로 불리곤 하는 지적인 별종으로 성장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약간의 인생사적인 배경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나는 1949년 전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걸작 "인간행동"이 출판된 해였습니다. 제가 비록 그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은 거의 30년 후였지만 말이죠. "인간행동"은 나의 지적인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이 시기에야 처음으로 독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 작센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동독 출신의 난민이었습니다. 전쟁 포로가 된 후 소련이 점령한 고향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은 나의 아버지는 양복점 자영업자로 일했습니다. (나와 롤란트 바더(Roland Baader)는 많은 점을 공유하지만, 특히 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재단사라는 공통점입니다. [역주: 호페의 이 연설은 롤란트 바더 기념상의 수상연설임]) 추후에 초등학교 교사가 된 나의 어머니의 가족은, 보수주의 우파 성향을 가진 소위 "엘베강 동쪽의 융커 집단(east-Elbian Junkers)"에 속하였는데, 가방에 넣을 수 있는 약간의 짐을 제외하고는 소련에 의해 집과 농장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1946년에 압류당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7살이 될 쯤에 우리 가족은 가까운 마을로 이사했는데, 그 전까지 우리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고, 아주 작은 공동숙소 밖에 딸린 별채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는 시골 소년으로서의 생애의 첫 부분을 매우 행복하게 지냈다고 기억합니다. 1950년대 초반부터, 부모님의 엄청난 노력과 평생을 단련해온 근면함 덕분에 해마다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을 경험하였습니다.

나의 집은 "하노버 알게마이네(Hannoversche Allgemeine)"의 지역판을 정기적으로 구독했고, 매주 월요일마다 "슈피겔(Der Spiegel)"을 받아 읽었습니다. 또한,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쉴러(Friedrich von Schiller),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그리고 폰타네(Theodor Fontane)와 같은 고전 작가들의 작품, 만 형제(Thomas and Heinrich Mann), 프리쉬(Max Frisch), 뵐(Heinrich Böll), 그리고 그라스(Günter Wilhelm Grass)와 같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집에 많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역사, 유럽의 역사, 그리고 고대의 역사에 관한 여러 작품과 다양한 문헌이 있었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독서에 열심이었고 나에게도 항상 독서를 장려하였는데, 나는 문학보다는 역사가 더 매혹적이었습니다. 내가 16살인가 17살이 될 때 까지 나의 집에는 TV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나의 독서를 지도하거나, 훈육하거나, 판단력을 날카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지식인은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전간기를 경험한 세대인 나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학교에서의 역사 수업은 역사 공부에 대한 나의 흥미를 강화시켰고, 생물학 수업을 통해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와 동물행동학(ethology)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개신교 신학자들의 종교적 가르침은 처음으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심을 일깨웠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물음에 대한 급증하는 관심은, 또한 나의 지적인 불만과 방향의 상실을 증가시켰습니다. 저는 여러 물음을 가졌지만, 그에 대한 많은 답변과 설명은 상당히 자의적이고, 지식보다는 의견에 가까웠고, 모순적이거나 일관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분쟁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며, 또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해결하고 결정지을 수 있는지, 혹은 어떤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계속 머릿속에서 멤돌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지적인 체계화, 즉, 모든 것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모든 관련된 것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적인 관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고자 나름의 탐구를 하면서,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2년과, 내가 막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1960년 후반은 학생반란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정신적 산물은 추후에 68세대라고 불리게 되었죠.

학생반란의 주역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나는 먼저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소위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들 혹은 신좌파 이론가들, 즉,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프롬(Erich Fromm),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아도르노(Theodor Adorno), 그리고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등을 공부하였습니다. 나는 그들로부터 내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가정했고, (일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독에서 행해진 "현실사회주의(real existing socialism)"를 지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동독에 사는 친척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그들의 가난과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경제적 부족을 목격했으며, 동독의 "프롤레타리아" 지도자들로부터 큰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대신에 나는 엘리트 철학자들이 이끌던 소위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humane democratic socialism)"를 추종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좌파의 떠오르는 젊은 스타였고, 오늘날에는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의 교주로 자리잡은 위르겐 하버마스는 나의 중요한 첫 번째 철학 스승이었고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1974년에, 나의 사회주의 시절은 물론 이미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은 인식론을 주제로 하였고 경험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이것은 사회주의나 "좌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나는 짧은 좌파적 국면을 마무리하고 똑같이 짧은 "중도주의"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포기한 이후, 나의 지적인 호기심은 이제 비엔나학파에 점점 더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비엔나 서클,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논리실증주의 서클의 가장자리에 있는 칼 포퍼(Karl Popper)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칼 포퍼의 철학은 오늘날까지도 비학문 분야에서는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력 있는 세계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칼 포퍼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논제를 가집니다: 현실에 대한 모든 진술은 가설적인 성질을 가진다. 즉, 그것들은 경험에 의해 반박되거나 반증될 수 있다. 반대로, 모든 비가설적 진술, 즉, 원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진술들은 현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이 논제의 보편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칼 포퍼의 논제는 가설적인 진술일까요, 아니면 필연적인 진술일까요?)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에 파울 로렌첸(Paul Lorenzen)과 소위 에를랑겐학파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이 학파는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포퍼 철학의 타당성을 매우 의심스럽게 보이게 했습니다. 인과관계에 대한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는, 먼저 데이터를 수집하고, 측정하고, 통제된 상황에서 테스트를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측정 도구와 통제된 실험의 퍼포먼스에 대한 지식은 가설을 검증하기 이전에 방법론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가설의 반증가능성은 측정 도구의 구성과 실험 방법론의 반증불가능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요?

나는 이러한 물음의 중요성이 그 당시보다도 오늘날에 더 커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은 이 주제를 위한(혹은 다른 고등 철학을 위한) 장소나 기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여하튼, (지금과 마찬가지로) 나의 주된 관심사는 사회과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과학에 관해서는 일단 포퍼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포퍼와 마찬가지로, 나는 사회과학 진술은 일반적으로 가설적이고, 원칙적으로 반증가능한 "만약 그렇다면(if then)" 진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포퍼의 표현에 따라 실질적인 사회연구는 반드시 "단편적이고 점진적인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engineering)"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가설이 잠정적으로 증명되기 전에는(물론 영구적으로 그럴 수는 없음) 그것을 반증하거나 수정하기 위해서 테스트를 해야 하며, 현실에 대한 무언가를 주장하면서 반증불가능한 진술은 사회과학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포퍼의 이러한 논제가 매우 관대하고, 경험에 개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포퍼의 철학은 틀린 것이며, 처참할 정도로 형편없으며 엄청나게 위험한 무언가라고 평가합니다.

무엇보다도, 일상의 경험에서 기인하는 작은 예시는 포퍼의 오류를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한 사람은 동시에 다른 두 장소에 있을 수 없다"는 진술을 반증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그러한 진술이 "필연적인" 혹은 "선험적인" 진리 진술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범죄 스릴러 팬이 알고 있듯이, 상기한 진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현실에 대한 무언가를 진술합니다. 2019년 1월 1일, 마이어 씨가 비엔나에서 칼에 찔려 사망했고, 뮐러 씨가 그 당시에 뉴욕에 있었다면, 뮐러 씨는 살인자로 간주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설적으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러합니다. 이 진술은 소위 "알리바이 원칙"의 기초를 형성하며, 우리에게 일상 생활에서 결코 틀릴 수 없는 도움을 반복적으로 제공합니다.

포퍼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은, 사회학과 경제학의 기초에 대한 나의 하발리타치온(habilitation, 독일어권 국가의 교수자격시험) 논문을 쓰는 동안 일어났습니다. 한편으로, 윈칙적으로 우리는 선택, 목적 혹은 목표, 수단, 성공 혹은 실패와 같은 범주가 없다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자연적 사건과 자연적 과정은 "있는 그대로(are as they are)"이며, 선택, 목표, 수단, 성공 혹은 실패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인과적으로만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습니다.

반면에, 자연과학보다 비교적 덜 명백하고,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지는 인간행동의 과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역사학 혹은 사회학과 대조적으로) 경제학은, 필연적인 진술과 판단이 아주 잘 구성될 수 있는 학문이다. 그러한 진술과 판단은 어떤 결과를 가지는지 알기 위해 실험이 필요없는 방법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의 결과를 "선험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확실성을 가지고 예상할 수 있다.




태그 : #오스트리아학파의_역사 #철학과_방법론 #인간행동학 #인식론 #주관주의 #호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