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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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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자유주의는 왜 함께 가는가?

해외 칼럼
자유주의
작성자
작성일
2020-03-2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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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Calton

Chris Calton
* 미제스 연구소 2018년 연구원
* 경제사학자

주제 : #오스트리아학파개요

원문 : Austro-Libertarianism as a Meaningful Phrase (게재일 : 2019년 5월 14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오스트리아학파-자유주의(Austro-Libertarian, 이하 오스트로-리버테리언)'라는 용어는 개념상 전혀 관련이 없는 두 가지 범주를 동시에 내포한다. 한편으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결과에 대한 가치판단 없이 경제현상의 인과적 규칙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주어진 수단과 목적에 대하여 특정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윤리철학이다. 그렇다면, '오스트로-리버테리언'이라는 순서의 배열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가 가지는 정치적 가치판단은 이 개념에서 우선시되지 않는다. 오스트로-리버테리언들이 자유주의 철학에서 유도되는 정치적 함의를 분명히 따름에도 말이다.

이미 여러 사상가들이 지적한 바 처럼,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유주의자이지만, 모든 자유주의자가 오스트리아학파를 따르지는 않는다는 개념적 불일치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인 많은 학자가 '오스트로-리버테리언'이라는 상표를 비판한다. 그들은 오스트리아학파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도 개별적으로 반대하진 않으면서도, 그 둘이 하나의 개념으로 결합하는 것은 거부한다. 이는 미제스의 추론, 즉,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가치중립적 과학(value-free science)'이며, 반대로 자유주의는 여타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가치지향적(value-oriented)'이라는 차이점에 근거한 비판이다.

물론 그러한 지적은 옳다. 심지어 도덕적 자유주의의 귀감을 보여준 머레이 라스바드 조차도,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가치중립적 과학임을 인정했다. <권력과 시장>에서, 라스바드는 "인간행동학(경제학)은 궁극적인 윤리적 판단을 제공해줄 수 없다: 인간행동학은 윤리적 판단에 필요한 필수적인 자료를 제공해줄 뿐이다." 라고 주장하며, 윤리학에 대한 인간행동학적 비판을 설명하기 위해 한 장을 할애하기도 했다.

이는 미제스가 <인간 행동>에서 강조한 효용주의(공리주의)적 접근법과 일치한다:

윤리적 교리의 목적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며, 또 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한 가치 척도를 정립하는 것이다. 모든 윤리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가리는데 있어 자신이 최고선으로서, 인간이 무엇을 목표로 해야하는지 충고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윤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ought to be)'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하는 '규범적 학문(ormative disciplines)'이다. 윤리는 사실에 대하여 중립적이지 않으며, 자유로이 자신이 선택한 관점을 표준으로 삼아 사실을 판단한다.

이것은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의 태도가 아니다.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은, 인간 행동의 '궁극적 목적(ultimate ends)'이 어떤 절대적 기준으로부터 판단될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궁극적인 목적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것(ultimately given)'이다. 그것은 순전히 주관적이며, 사람마다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그의 삶의 다양한 순간에서 서로 다르다.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이 다루는 것은 행위자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다.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은 사치와 금욕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와 같은 가치판단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의견도 표명하지 않는다. 인간행동학과 경제학은 행위자가 지향하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수단이 적합한지 아닌지에 대한 하나의 척도만을 제공한다.

미제스는 모든 도덕적 판단과 별개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the laws of cause and effect)'은 언제나 보편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주어진 목적(given ends)'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수단을 활용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경제학자의 역할이다. 그러한 목적 자체가 어떠하다는 가치판단은 윤리학자들의 몫이다.

요약하자면, 경제학자들 역시 개인적으로 원하는 윤리적 가치를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의 도덕적 판단과 현실 세계의 인과관계 사이에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윤리가 경제학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인 많은 사람이 '오스트로-리버테리언'이라는 용어 결합에 왜 반대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머레이 라스바드는 '오스트로-리버테리언'이라는 상표를 채택했는가? 그는 훈련된 전문 경제학자로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가치중립성을 누구보다도 충분히 인식하지 않았는가?

미제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회과학자와는 달리, 라스바드는 윤리학을 과학적 연구 분야의 정당한 일원으로 취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학자, 특히 사회과학자들은 '객관성(objectivity)'을 추구하기 위해 윤리를 내던졌지만, 라스바드는 윤리를 소홀하게 여긴다면 진정으로 객관적인 과학적 연구는 훼손된다고 믿었다. <과학의 기초, The Mantle of Science>에서, 라스바드는 이렇게 말했다:

합리적(rational, 즉 넓은 의미에서 '과학적') 윤리가 가능하다는 고전철학의 견해는 대부분 폐기되었다. '가치중립(Wertfrei, 과학이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라는 명목으로 합리적 윤리가 과학과 별개의 학문이라고 일축해온 비판자들이 만연해진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임의적이고 특별한 윤리적 판단을 여러 인간과학에 몰래 주입하게 되었다. 최근의 유행은, '가치중립성(Wertfreiheit)'의 '겉모습(façade)'을 보존하면서, 과학자 자신의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특정한 가치판단을 무심코 채택하는 것이다. 즉 그런 과학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진 않지만, 사회 대다수가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채택하면서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대략 추측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 과학자가 자신의 가치를 제시하는 것은 편견에 사로잡혔으며 객관적이지 않다고 간주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구호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것은 '객관성'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의 과학적 객관성은 더 이상 그것이 가능한 모든 영역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별로 유식하지도 못한 다른 사람들의 주관으로 가득찬 여론조사 결과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 분야에서 암묵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치 판단의 예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쓰이는 '긍정적(positive)' 그리고 '부정적(negative)' 이라는 개념이 그러하다. 이는 좋음과 나쁨에 대한 어떤 가치 판단을 가정하기 않고선 사용될 수 없는 용어이다. 특정한 '외부효과(externality)'를 '긍정적' 혹은 '부정적' 으로 구분하는 것은 가치 판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의 논문 "공공재 이론과 치안 생산이론의 실패(Fallacies of the Public Goods Theory and the Production of Security)" 에서, 한스-헤르만 호페는 유사한 논지로 공공재를 비판했다:

시장에 맡겨두면 생산되지 않을 공공재를 국가간섭을 통해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추론 과정에 특정한 규범을 은밀히 끼워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떤 상품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시장에서 생산되지 않을 것이라는 진술로부터, 이러한 상품들이 무조건 생산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규범을 요구하는 동시에, 공공재 이론가들은 실증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의 한계를 분명히 벗어났다. 대신에 그들은 도덕 혹은 윤리의 영역으로 옮겨간 것이다. 따라서 공공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정당하게 행하고 또 원하는 결론을 정당하게 도출하기 위해서는, '인지적 학문(cognitive discipline)'으로서의 윤리학 이론을 제공받기를 기대해야만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많은 사회과학자가 (완전히 그렇지는 않지만) 객관성에 대해 그들 스스로 선언한 가치중립성을 위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수단(means)'과 '사실(is)'에 대한 학문으로서 인간행동학이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이라는 미제스의 개념을 부인하지 않는다. 라스바드는 <과학의 기초>에서 윤리학과 양심에 대한 연구를 요구한다. 외부효과와 공공재 등 부패한 이론들이 의도치 않게 가치 판단을 내리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상기한 통찰은, 윤리에 적합한 체계적인 연구가 없을 경우, 경제학 분석을 오염시킬 수 있는 가치 판단이 의도하지 않게 채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건전하게 성립된 윤리학이 경제학 분석을 강화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에 있어서, 관건은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어떻게 자유주의 윤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라스바드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이라는 개념이 의미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권력과 시장>에서 라스바드가 쓰기를:

인간행동학은 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서 윤리적 목적을 비판하는 분야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행동과학의 가치중립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상기한 주장은 단지 윤리적 목표 조차도 인간행동학의 유효한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인간행동학은 (1) 윤리적 명제의 공식화에 있어 내포된 오류의 존재를 지적하고 (2) 윤리적 명제가 설정한 목표 자체의 가능한 무의미성과 내면적 불일치를 비판할 수 있다. 이 두 기준을 통과하지 못해 자기모순적이고 또 개념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고 판명된 윤리적 목표는, 분명히 불합리한 것이며 모두에게 버림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윤리적 평가의 무한한 타당성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1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윤리학자로 기능하면서도 인간행동학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윤리 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하지 않고, 심지어 그러한 체계가 달성될 수 있다고 증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인간행동학이 개념적 가능성 혹은 내적인 일관성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없는 윤리적 명제들을 폐기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라스바드는 자본주의가 초래했다는 결과를 근거로 자유시장을 거부하는 많은 윤리적 반대 명제들을 계속하여 나열한다. 라스바드는 '가치로 가득찬(value-laden)' 도덕적 반대들이 인간행동학의 가치중립적 응용을 통해 즉각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행동의 가치중립적 과학으로서 경제학이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윤리 체계의 확립"에 사용될 수는 없지만, 우리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2

라스바드의 지적은 자유주의 윤리의 '비-침해성(non-aggression)' 체계 밖에서도 여전히 사실이다. 예컨대, 경제적 번영과 평등주의 모두를 도덕적 선으로 간주하는 제안은,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가 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평등주의 원칙이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들을 남겨두어야 할 '단서(proviso)'를 제공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행동학은 그러한 철학에 내재된 모순을 폭로하는데 기여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오스트리아학파의 가치중립적 분석을 통해, 평등주의와 번영은 서로 충돌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행동학이 개념적 가능성 혹은 내적인 일관성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없는 윤리적 명제들을 폐기할 수 있는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는 라스바드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롤스주의 윤리는 인간행동학이 가치중립적 과학이라는 미제스의 단언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거부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학파 방법론에 따라 적절하게 연구된 경제학은, 우리의 윤리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자유주의자라서 오스트리아학파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오스트리아학파를 공부하고 따르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우리의 자유주의는 분명 윤리적 가치판단으로 가득찬 명제의 집합이지만, 인간행동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기초하며 옹호된다.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에 대한 비판가들은, '학제간 영향력(interdisciplinary influence)'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를 수 있다는 암묵적인 믿음, 즉 자유주의가 경제학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이다.

비판가들과 대조적으로, 라스바드는 두 가지 극히 중요한 사안을 인식했다. 첫째, 윤리학 연구를 게을리하는 사회과학자들은, 그들이 분석함에 있어 도덕적 명제를 은밀히 적용할 때 그 실수를 인지할 방법이 없다. 두째,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은 역사학, 경제학,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학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라스바드는 마찬가지로 윤리학의 필수적 연구에도 오스트리아학파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스트로-리버테리언들의 신념이다.




태그 : #인간행동학 #정치철학과_윤리학 #자유주의일반 #아나코캐피탈리즘

  1. 역주: 대체로 윤리적 주장은 '취향 존중'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즉,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또 (부정적 의미에서) 이상적인지와 별개로, 윤리적 주장들 사이의 평가 기준이 없으므로 모두 공평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스바드는 경제학, 혹은 인간행동학의 도구를 통해서 윤리적 목표의 내적인 논리정합성과 목표의 이론적 성립가능성 및 실현가능성 따위를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테스트를 통과한 윤리적 주장만이 타당하다고 여겨져야 한다고 말한다.
  2. 역주: 윤리 체계는 당위에 대한 것이다. 경제학은 사실에 대한 것이다 .사실에서 당위를 추론해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경제학적 사실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이는 윤리 체계를 확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특정한 윤리 체계를 구성함에 있어 경제학적 사실을 고려하는 것은 정말로 필요하다. 그러한 사실과 충돌하는 당위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거나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