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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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리버테리언이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 (전쟁의 사회·문화적 결과에 대한 라스바드의 분석)

해외 칼럼
정치·외교
작성일
2020-01-15 18:14
조회
1487

Llewellyn H. Rockwell Jr.
(미제스 연구소 설립자 및 회장)

주제 : #전쟁과_외교정책

원문 : Rothbard and War
번역 : 김경훈 연구원


[1편] 라스바드의 전쟁관
[3편/完] 전쟁을 막을 수 있는 4가지 방법


머레이 라스바드는 왜 전쟁을 반대했는가? 그의 생각의 요점을 한 번 살펴보자.

무엇보다도, 전쟁은 우리의 도덕을 왜곡한다. 국가 자체가 우리의 도덕적 감성을 비틀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에 의해 수행되었다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범죄일지라도, 정부라면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만약 내가 타인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심지어 그것이 정당하다고 한들, 내가 그 사람과 그의 이웃 전체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경우 아무도 나를 변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을 내가 단지 '부가적인 피해'일 뿐이라 치부한다면, 나는 정신이 나갔다고 여겨질 것이다.

혹은 애플 컴퓨터, 스테이플러 제작사, 사교단체가 일련의 미사일 공격을 감행해 천 명 이상을 살해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분노는 그칠 줄 모를 것이고, 그러한 공격은 민간 기업이 가진 구제불가능한 사악함의 징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맞선 전쟁을 선포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터전을 파괴하고, 혼란을 선사한 현실을 한번 살펴보자. 분명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고 분노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 대부분 역시, 국가의 본성에 대한 진실된 결론을 도출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국가를 위대하고 진보적인 조직으로 여기는 고등학교 수업내용에 사로잡혀 있다. 전쟁의 공포조차도 그들이 이 결함있는 전제를 다시금 고찰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추후에 비행기를 탈 때, 그들은 바로 그 침략 전쟁에서 싸운 병사들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월마트가 시작한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라 볼 수 있을까?)

한편 우리가 국가를 그저 생산적인 시민사회의 자원을 빼돌려 연명하는, 기생적이고 이기적인 조직으로 이해하고, 국가가 우리 삶의 필수요소라는 익숙한 속임수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미신적 애국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적으로 전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불행하게도, 국가의 본질과 그것의 동기를 잔혹할 정도로 사실에 입각해 묘사하는 라스바드보다, 공교육이 제공하는 순진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불합리한 전쟁에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여전히 우리의 교실을 장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실수가 무엇이든 간에, 여전히 국가는 품위있는 기관이며, 대통령은 그 기관의 지도자로서 아이들이 존경해야만 한다는 메세지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전쟁과 전쟁 준비는 경제를 왜곡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두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어서 딱히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전쟁이 경제의 일부를 성장시킨다는 점은 지극히 타당하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지적했듯, 전쟁은 장례산업을 촉진한다.

그러나 전쟁이 경제 전반의 성장을 자극할 수는 없다. 경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경제는 소비자 요구의 충족이다. 전쟁 중에는 소비자의 요구보다 군부의 요구가 우선시된다. 국민소득 통계는 전쟁이 번영을 가져온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러나, 돈을 탈취해서 순항 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대중을 부유하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은 천하의 바보도 이해하는 점이다. 그러한 소비는 그저 민간영역에서 소비할 자원을 빼앗을 뿐이다.

경제를 왜곡시키기 위해 격렬한 전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정 기업의 연구 및 개발 능력의 절반 이상이 군사적 목적에 투자된다면, 그 만큼 민간 소비자의 요구는 훨씬 덜 충족된다. 특정 기업의 주요 고객이 국방부가 된다면, 그 기업은 시장에서의 경쟁 우위, 즉 가격경쟁력에서 뒤쳐진다. 국방부의 주요 관심사는 비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쟁상황 혹은 군사국가에서, 비용을 최소화하는 기업은 비용 혹은 보조금을 최대화하는 기업으로 변모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쟁과 프로파간다는 다른 민족에 대한 우리 관점을 왜곡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전형적인 예시이다. 독일은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르는 야만족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묘사는 연합국 시민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4년간의 전쟁을 지지하거나 묵인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이미 가난하고 병든 독일 민간인을 상대로 한 장기간의 아사 작전과 불평등한 조약을 맺도록 정부를 강요했다.

전쟁 후, 국제적 관점에서의 이해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거짓말과 모욕이 드러나자 사소한 반발이 있었다. 사실 우리의 현대적인 교환학생 제도 역시 1차 대전 이후 전시 프로파간다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동포들이 열광하는 광신적 애국주의를 목도하였고, 사람들이 더 많은 상호작용을 가질 수 있다면, 추후에는 그런 부류의 악마화가 덜 효과적으로 기능하리라 기대하였다.

이란에서의 평범한 삶을 다루는, 서구에서 제작된 비디오를 보고 대부분의 미국인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미국정부가 적대국을 상대로 행한 다양한 증오 캠페인 때문이다. 이란과 이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악마화가 오래 지속된 덕분에, 미국인들은 이란인이 피에 굶주린 야만인이자, 낙타에 올라타 집단 학살을 모의하는 집단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란인 역시 현대적 도시에서 북적거리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들은 대체로 미국인을 좋아한다. 그러나 단지 미국 정부에 대해서 좋지 못한 감정을 가졌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와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듯 전쟁은 우리가 다른 민족을 불필요하거나 열등하다고 여기도록 장려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결혼식이 산산조각이 날 때 미국인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연방정부가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의 결혼식 행사를 취소시킨다면, 우리는 확실히 엄청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더 나아가 만약 미국정부가 테러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 런던에 있는 한 아파트를 폭파시킨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다른 예시를 한 번 살펴보자. B국의 지배계층이 A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그래서 A국이 B국을 폭격하여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몇 년 후 A국 시민들이 그 사건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보복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했을 때, 성급한 동료들이 나타나 "그건 그저 전쟁에 불과했다"고 소리치며 모든 중대한 도덕적 질문을 일소한다. 그렇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순진한 인간으로 치부되며, 그 의심스러운 충성심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다.

전쟁은 문화를 타락시킨다. 평론가 폴 퍼셀(Paul Fussell)은 "전쟁문화는 표현의 자유, 호기심의 자유, 지식의 자유 등 문명사회에서 필수적이고 없어선 안되는 요소를 죽여버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미군의 공격이 이라크 군인을 토막내는 장면의 TV 방영을 미국정부가 왜 검열했는지를 설명하는데, 그저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런 종류의 영상을 보게끔 한다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타인에 대한 봉사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한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오직 군인에게만 사용되는 표현이다. 반면 우리의 삶을 연장시키고 더 많은 성취를 안겨주는 위대한 기업가들에 대해, 우리는 부러움과 열등감만을 학습받았다. 확실히 우리는 기업가의 서비스에 감사한 적이 없다.

국가는 언어적 조작을 통해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라크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는 "조국을 위해 봉사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라크 전쟁은 미국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고, 그렇게 할 능력도 없는 지도자에 대한 터무니 없는 트집잡기로 개전되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지배계층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반영한 결과이다. 민간으로부터 막대한 자원을 빼돌려 행해진 그런 임무는 결코 "나라를 지키는"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은 현실 자체를 왜곡한다. 학생들은 군인의 희생 덕분에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배웠다. 불경스러운 범퍼 스티커는 미국의 군인을 예수 그리스도에 비유한다. 그러나 미국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이라크, 파나마, 소말리아에 의해 위협받았을까? 독일조차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위협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이 북아메리카를 침공할 수 있었겠는가?

신중하게 다듬어져온 이 신화는 지금의 상황을 계속 유지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한다. 전쟁의 신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군인에 대한 미신적인 존경심을 가지게 만들며,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수세에 몰아넣는다. 전쟁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과 간섭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전쟁은 프로파간다, 거짓말, 증오, 궁핍, 문화적 퇴보, 도덕적 부패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국민들이 교육에서 국가를 옹호하도록 주입받은 여러 도덕적, 정치적 정당화 중 가장 끔찍한 결과가 바로 전쟁이다. 애국심, 조국, 군가, 국기라는 표장에 쌓여있는 국가는 국민들이 거의 들어보지도 못한 국가와 그 지도자를 멸시하게끔 기만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살해하게 만들기 위해 교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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