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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버 대통령의 경제정책 재평가

국내 칼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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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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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덕
* 미제스 연구소 아카데미 학장
* 경제학 박사 (대구대학교 무역학과 명예교수)

주제 : #미국사

이 글은 2009년 10월 20일에 한국경제연구원에 기고된 글입니다.


대공황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작지 않은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과 관련하여 많은 미신이 있고 그런 미신은 대공황과 관련하여 잘못된 교훈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전문가마저도 그런 미신을 근거로 잘못된 정책을 제안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Paul Robin Krugman)

노벨상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Robin Krugman, 1953. 2~)의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재임기간 1929. 3~1933. 3) 대통령의 재정정책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정책 제안이 바로 그런 사례 중의 대표적인 것이다. 그는 뉴욕 타임즈 2008년 12월 29일자 칼럼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현대의 미국 대통령은 1932년[후버 대통령 재임 시점]의 재정 정책적인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실수란 심각한 경기 후퇴에 직면하여 연방정부가 균형재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경제위기와 싸우는 동안에는 [재정]적자에 대한 염려를 붙잡아 매야 할 것이다. (중략)경제는 지금 위축되고 있는 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간지출이 부진한 결과이다. 공공지출도 줄임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후버는 과연 자유방임정책을 취했던 것인가

크루그먼의 후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공황 시에 후버가 ‘아무런 조치’(do-nothing)도 취하지 않았다는 미신, 즉 자유방임 정책을 취했다는 미신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후버 대통령에 대한 미신과 관련하여 두 가지 쟁점이 있다. 첫째, 후버가 과연 자유방임 정책을 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 정부의 재정지출 증가, 즉 확대 재정정책이 과연 위기를 해결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 쟁점을 주로 다루고 두 번째 쟁점은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는 경제 원리는 이미 많은 곳에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1

결론부터 말하면 후버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믿지 않았고 각종 간섭주의적인 정책이 그것이 없었을 때와 비교하여 당시의 침체를 크게 만들었고,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재임기간 1933. 3∼1945. 4)가 시행했다고 알려진 많은 ‘뉴딜’ 정책이 이미 후버 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후버는 큰 정부를 지향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크루그먼을 포함한 상당수 역사학자의 후버에 대한 평가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2

후버는 대공황을 맞아 많은 정책을 새롭게 시행하거나 바꾸었기 때문에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는 ‘정부의 크기’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만 간추려서 언급하고자 한다.3 첫째, 크루그먼의 지적과 달리 후버는 균형재정을 유지하기는커녕 큰 폭의 재정적자를 만들었다. 후버가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재임기간 1923. 8~1929. 3)로부터 대통령직을 인계받았을 때 재정은 약 7억 달러의 흑자였다. 이 금액은 당시 연간 세출액이 약 33억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표>는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추이를 보여준다. 세입이 극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출을 크게 늘린 결과 1932 회계연도(이하 재정과 관련한 연도 표시는 모두 회계연도를 말함)부터 재정적자는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4 특히 1930년과 비교하여 1932년에 재정지출은 42%나 증가했다. 하지만 재정지출의 구매력은 그것보다 더 크게 증가했다. 임금을 제외하고 재화들의 가격이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과 비교하여 1933년의 재정은 큰 변화가 없다. 세입을 약간 늘리고 세출을 약간 줄인 결과 재정적자는 전년에 비해 약간 감소했다. 1934년에는 세입보다 세출이 더 크게 증가하여 재정적자는 다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표>는 후버가 한 번도 균형재정을 실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약하면 후버는 불황으로 총수요가 감소하면 재정지출을 확대하라는 케인지언(Keynesian) 처방을 충실히 따랐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표> 연도별 연방정부의 재정

여기에서 세입 측면을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국회는 1932년에 세입법(Revenue Act)을 통과시켰다. 그 법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크게 세금을 신설하거나 인상한 사례 중의 하나였다.

“세금 인상의 범위는 엄청났다. 많은 전시 소비세가 재개되었고, 휘발유ㆍ타이어ㆍ자동차ㆍ전기ㆍ엿기름ㆍ세면용 화장품ㆍ모피ㆍ보석ㆍ다른 물품 등에 상품세가 부과되었다. 입장세와 증권 양도세가 인상되었다. 은행 수표ㆍ채권 양도ㆍ전화ㆍ전보ㆍ라디오 메시지에 신규로 세금이 부괴되었다. 개인소득세도 상당 수준 인상되었는데, 최저세율이 1.5~5%에서 4~8%로 인상되었고 개인소득공제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25%의 소득공제를 삭제했다. 또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부가세가 최고 25%에서 63%로 크게 인상되었다. 더구나 법인세는 12%에서 13.75%로 인상되었고 소기업에 대한 면세가 폐지되었다. 재산세는 두 배가 되었고 면세점이 예전에 비해 절반으로 낮아졌으며 폐지되었던 증여세가 부활되었고 33과 1/3%까지 누진되었다.”5

후버의 확장적 재정정책

세금을 엄청나게 신설하거나 인상한 것은 불경기로 인하여 세입이 감소하는 것을 막고 조금만 경기가 회복되면 세입을 증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세금 인상 효과는 1934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엄청난 세금 신설 또는 인상이 없었다면 그 이후 재정적자의 규모는 <표>에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컸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 점은 후버에 대한 크루그먼의 비난이 틀렸다는 점을 한층 강화한다. 요컨대 후버는 정부 지출을 엄청나게 늘렸고 그 결과로 발생한 큰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하여 전대미문의 세금 신설 또는 인상을 단행했다. 이것이 크루그먼이 말하는 후버 행정부의 재정에 대한 실상이다.

둘째, 후버는 재정지출의 엄청난 확대를 통해 각종 공공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다.6 그리고 그런 규제들은 과잉ㆍ과소 생산과 그로 인한 자원 낭비와 부족, 불필요한 대형 토목 공사, 각종 위원회의 부정부패, 무능, 관료주의 등을 초래했다. 먼저 그는 농민의 고통을 염려하여 농산물 가격 지지, 저리융자 등을 실시했다.

그는 1929년 6월에 연방농가위원회(Federal Farm Board)를 설립하여 약 5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했고 1930년 초에 약 1억 달러의 예산을 추가로 확보했다. 가격지지 정책은 해당 농산물의 과잉생산과 다른 부문에서의 과소생산을 초래했다.7 그리고 과잉생산이 누적되면 그 관리 비용 때문만이라도 생산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목화 생산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크게 일어났다.8

다음으로 후버는 많은 공공사업을 시작하거나 공공사업비를 추가했다. 1929년에 그는 연방정부 건물 공사비에 약 4억 달러 이상, 해운위원회를 위한 공공사업으로 약 1억7,500만 달러의 정부지출을 결의했다. 1930년에 국회는 약 9억1,500만 달러의 공공사업비를 의결했다. 후버는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후버(Boulder) 댐, 로스앤젤레스 수도교 등과 같은 대형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후버는 주 정부 차원에서 공공 지출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요컨대 후버 재임 4년간의 공공사업을 위한 지출은 후버 이전 30년간의 공공지출보다 많다는 것이다.9

후버는 또 1932년 초에 부흥금융공사(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를 설립하여 부실금융기관과 철도를 구제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설립 초기에 공사는 약 23억 달러의 신용을 대출했고 약 15억 달러 이상의 현금을 융자했다. 부흥금융공사는 후버 재건계획의 중요한 버팀목이었지만 저리 융자인 만큼 대출 과정에서 많은 부패 스캔들이 발생했다.

셋째, 경제가 침체국면에 진입하자 후버는 기업가들에게 임금과 일자리 등을 유지해 줄 것을 요구했고 기업가들은 대통령의 요구에 동의했을 뿐 아니라 정부와 재계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협력하도록 했다.10 후버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의 소비를 유지 또는 증가시킴으로써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유지 또는 증가시킬 뿐 아니라 침체로 인한 재화에 대한 수요 감소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것 같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을 고정하거나 재화의 가격하락보다 임금의 하락을 더 적게 하고자 한 것이다. 어느 경우에나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되는 임금보다 기업이 실제로 지불하는 임금이 높은 것을 의미한다. 현대 경제학 용어로는 최저임금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최저임금을 법 등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각 기업, 특히 대기업은 각자의 형편에 맞추어 최저임금을 실시토록 한 것이다. 최저임금은 노동수요의 감소와 노동 공급의 증가를 초래하여 실업을 증가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11

그러면 실제로 임금과 실업은 어떻게 되었는가? Vedder and Gallaway에 따르면 임금은 1931년에 3% 이내로 하락했다. 재화의 가격은 같은 해에 8.8% 하락했다.12 그 결과 같은 해에 실질임금은 크게 올랐고 1929년 실질임금보다 많았다. 침체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임금이 상승한 것은 후버의 최저임금 정책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임금의 상승은 1930년대 전반, 특히 1931년 이후의 실업을 사상최악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실업률은 1931년 15.9%, 1932년 23.6%, 1933년 24.9%, 1934년 21.7%였다. 반면에 대공황 초기의 실업률은 주로 노동자들의 낮은 생산성 때문이다.

만약 최저임금정책을 쓰지 않고 임금도 재화와 같이 자유로운 하락이 허용되었다면 후버 통치의 후반기에 실업률이 그렇게 높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점은 최저임금정책이 없었던 1920~1921년 침체기에 확인된다. 1921년 실업률은 11.7%였지만 1922년에는 6.7%로 하락했고 1923년에는 2.4%까지 크게 낮아졌다. 1920~1921년 침체기에 비해 대공황 시기에 실업률이 매우 높았던 것은 주로 후버의 잘못된 임금 정책 때문이다.

넷째, 후버는 농가소득의 하락이 경제위기를 악화시킨다는 염려를 바탕으로 농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1930년에 스무트-홀리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통과시켰다.13 이 법으로 미국 소비자들과 기업들은 수많은 수입 재화에 대해 예전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 무역장벽에 의한 수입 감소는 수입국의 달러 부족으로 미국 제품의 수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든 것은 그 법이 다른 나라의 보복 조치를 불러와 미국 수출품에 대한 수요도 감소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특히 그런 무역장벽은 다른 생산자들에 비해 후버가 돕고자 하는 미국 농가에게 더 나쁜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농산물 수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의 수출 총액은 1929년 약 70억 달러에서 1932년 약 25억 달러로 크게 감소했다.14 물론 이런 감소에는 당시 세계적인 불경기와 디플레이션도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공황 이전까지 미국 정부의 경기 침체에 대응하는 정책은 대략적으로 자유방임 정책이었다.15 그러므로 후버는 경기침체에 대해 간섭주의적인 정책을 최초로 실시한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평화로운 시기만을 기준으로 할 때 후버는 정부를 가장 크게 확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실업률이 사상 최고였다. 즉 엄청난 공공지출과 각종 간섭주의적 정책이 경제위기를 구제하기보다는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현대의 후버 비판자들과 크루그먼과 같은 케인지언은 후버를 자유방임주의자로 규정할 뿐 아니라 미국의 많은 역사수업에서 후버는 교조적인 우파로 규정되어 비판받고 있다.

대통령으로서 후버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가 금태환본위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긍정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세간의 비판과 달리 그의 재정정책이 케인지언이 무색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정부를 지향했을 뿐 아니라 그런 정책이 실업을 악화시켰음을 논증한 것이다. 후버가 역사적 진실과 달리 경제위기를 맞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평판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은 다음으로 미룬다.




태그 : #경제사 #세계사 #간섭주의

  1. 케인지언은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는 원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틀린 것이다. 이 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Bastiat, Frederic, The Law, William Volker Fund, 1964, 김정호 역, 법, 자유기업원, 1997과 Rothbard, Murray N., Man, Economy, and State, Auburn, Ludwig von Mises Institute, 1993[1962], 전용덕, 김이석 공역, 『인간, 경제, 국가』, 자유기업원, 2006을 참조.
  2. 후버는 그의 공직 기간 동안 ‘구속받지 않는’ 자본주의 또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Murphy, Robert P. The Politically Incorrect Guide to the Great Depression and the New Deal, Regnery Publishing, Inc., Washington, 2009, 31-32쪽 참조.
  3. 후버의 업적에 대한 자세하고 방대한 평가는 Rothbard, Murray N., America‘s Great Depression, Kansas City: Sheed and Ward, Inc., 1975 참조. 매우 축약된 것으로는 Murphy(2009), 제2장 참조.
  4. 세입이 감소한 것은 불황과 가격하락(디플레이션) 때문이다. 가격하락 효과는 세출에도 비슷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5. Rothbard(1975), 253-254쪽 인용.
  6. 공공지출에 대한 아래의 내용은 후버 시절 공공지출의 일부분일 뿐이다.
  7. 물론 과소생산은 직접 목격할 수 없다.
  8. Rothbard(1975), 207쪽 참조.
  9. Rothbard(1975), 261쪽 참조.
  10. 헨리 포드는 심지어 임금을 인상할 것을 약속했다. Murphy(2009), 39쪽 참조.
  11. 참고로 후버는 실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국내로 이주하는 이민도 제한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Murphy(2009), 44쪽 참조.
  12. 이 부분과 다음 문단은 Vedder, Richard K. and Lowell E. Gallaway, Out of Work: Unemployment and Government in Twentieth-Century America,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7, 81쪽 참조.
  13. 사실 수많은 경제학자가 후버에게 스무트-홀리 관세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 Murphy(2009), 45쪽에서 재인용.
  15. Rothbard(1975), 16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