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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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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었다

해외 칼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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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6-25 22:34
조회
1702

이미지: 사람 1명 이상, 모자, 음료, 문구: 'STAR WARS'

Adam Graham
* '리버테리언 연구소(Libertarian Institute)' 작가
* nokingbutchrist.org 운영자

주제 : #한국사

원문 : Was The Korean War A Just War? (게재일 : 2019년 6월 6일)
번역 및 편집 : 전계운 대표 및 김경훈 연구원

  • 원문에서 한국전쟁이 미국 내부에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논하는 부분은 제외하였습니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전쟁에 대해 대체로 잘못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권과의 첫 충돌이었던 한국전쟁 역시, 선과 악의 역할이 분명히 나뉘어진 정의로운 전쟁의 예로 간주되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전쟁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여전히 공산국가로 남아있는 북한과 달리, 지금의 남한은 번영하고, 민주화되었고, 부유하기 때문에 확실히 한국전쟁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전쟁들이 추악한 진실을 감추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통념들에 대해서도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한국전쟁은 정말 명백한 승리이며 정의로운 전쟁이었는가? 한국전쟁은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례중 하나로 언급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한국전쟁 역시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전쟁과 마찬가지로 잘 열리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있는가?

한국전쟁의 궁극적 원인은 미국에게 있다

역사학자 제리 스웨니(Jerry Sweeney)는 "1950년에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인들은 지도책에서 한국을 찾으려고 허둥지둥했다"는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사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이 농담은 여전히 적용된다. 그 어떤 미국인도 왜 한반도가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열되었는지, 즉, 왜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양분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분단의 기원이 제2차 세계대전 말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아마 미국인들은 놀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일본제국을 아시아 대륙에서 축출한다는 얄타회의 안건에 따라, 스탈린의 소련은 독일이 패망하고 3개월 뒤에 만주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이 개입하기 전에 선제 핵공격을 통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려고 했었고, 오히려 이 때문에 스탈린은 침공 계획을 앞당기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계획에는 한반도 진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전후처리에 대한 논의 끝에, 미국이 제안한 한반도 공동점령안에 소련이 동의했고,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국이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은 제국주의적 간섭주의의 대상이었기에 암울한 상황(분단)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은 단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한국을 여기며 그들을 침략하고 점령하였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은 일본의 아시아 점령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말은 미국이 자초한 것과 다름 없었다. 위대한 자유주의자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1900년에 유럽열강들이 중국의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는 것을 미국이 도왔던 것 처럼,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미국은 일본을 도와주었다. 1904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부추겨 러시아를 공격하도록 유도했으며, 일본은 러시아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경제적 이권을 끝장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루스벨트는 일본이 한국과 만주를 지배하는 것을 아주 손쉽게 인정했고, 미국이 한국과 만주에서 경제적 이권을 취하는데 일본이 협조적이기를 기대했다." 이렇듯 미국은 일본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도록 부추겼으며, 이는 수십년 후에 미국의 뒷통수를 때리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었던 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전쟁이 끝나고 고작 몇 년 만에 미국과 소련의 혈맹관계는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 맺은 본래의 합의를 파기하였다. 그 결과는 중국, 만주, 그리고 한국에서의 불필요한 공산주의 확산 및 소련의 점령과 그에 수반한 엄청난 고통이었다. [역주: 트루먼은 반소주의자로서 한반도 문제를 비롯한 여러 외교문제에서 소련과 주기적으로 충돌하였다.]

남한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요새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에 대해 사람들이 종종 공유하는 가정 중 하나는,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남한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당시 남한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이승만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망명해 있었는데,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면서 남한으로 귀국하여 미군정 지배 아래에서 권력을 잡았다. 이미 한국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정부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던 중이었는데도, 미국과 이승만은 그러한 움직임을 억제하고 성장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순수 '자유주의적인(libertarian)' 관점에서 해석해보자면, 이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정부 구성과 영향력을 미국이 통제하는 것이고, 따라서 "한국을 공동의 적인 일본과 함께 맞서싸운 동료국가가 아니라 마치 일본에 협조한 패전국가처럼 다루는" 처사와 다름이 없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자유시장과 자유기업을 촉진하려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식민지 이후의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그들이 시도했던 방식은 효과적이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예컨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후, 남한 정부는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보유했던 많은 양의 자본과 자산을 매각했다. [역주: 이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전용덕 미제스 아카데미 학장의 저서 <국가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를 참조하라. 해방 직후 미군정기 때부터 박정희 집권기에 이르기까지 경제를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austro-libertarianism)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이승만의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수입대체산업화)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주의 시대의 경제와 사회 1편> 366p.참조] 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의 환경을 고려해본다면, 일본의 조선 병합에 협력하거나 그로부터 이익을 얻은 '친일파'들이 그러한 매각 자본 및 자산을 구매할 여력이 더 많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피해자인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이익을 얻은 친일파들이 더 부유해지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 소속이었던 경성대학 총장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는 "국가의 부의 절반을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부패가 빠르게 일어났다"고 기술하였다. 더 끔찍했던 점은, 미국이 친일파와 심지어 일본인들 까지도 새로운 남한 정부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왔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전형적인 냉전시기 사고방식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자로 추정되었고, 언론인 존 건터(John Gunther)가 보도하기를, "극우주의자가 아니었던 한국인들은 대체로 공산주의자였거나 잠재적인 반역자였다." 또 외교정책 평론가 윌리엄 블럼(William Blum)에 따르면, "1950년 초까지 이승만은 정직하게 선거를 치루는 것을 꺼려했으며, 제대로된 선거를 치루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미국 관료들에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그리고 1950년 5월 30일의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이승만의 정당은 국회에 대한 장악력을 잃게 되었다.[역주: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반민특위 문제등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이승만은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관리, 즉 딘 애치슨 장관이 선거를 치루지 않으면 경제적 원조를 끊겠다고 경고하자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선거를 치루었다. 이승만의 정당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전체 의석에서 겨우 14석(6.7%)만 차지하는 결과를 얻었고 야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선거 결과의 영향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있던 의원 4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반(反) 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으로 이탈하거나 무소속으로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는 다음 선거에서(1953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 이승만이 자유당을 창당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다시 국회를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이승만의 독재정치로 인해 1946년부터 대중은 분노했고 게릴라의 무력 저항까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대사관 노동담당관 스탠리 얼(Stanley Earl)은 "북한이 남침하지 않았더라도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란이 남한 내부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 주한 미국대사관 부영사였던 그레고리 핸더슨(Gregory Henderson) 역시 게릴라와의 전쟁 중에 이승만의 손에 의해 "약 10만 명 이상이 아무런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시카고 선 타임스(Chicago Sun-Times)'의 기고가 마크 게인(Mark Gayn)의 진술은 더 슬픈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게릴라를 소탕하는데 미군이 협조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하고, 대규모 집단 체포를 하고, 용의자들을 찾기 위해 산간을 샅샅이 수색하고, 대규모 급습을 위해 우익주의자들, 경비대, 경찰을 조직했다. 이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존 건터는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한국 교도소에서는 약 1만 4천 명의 정치범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오직 북한만이 전쟁 책임이 있고 남한은 무고한가?

윌리엄 블럼은 "한국전쟁은 명백하게 북한이 남한을 명분없이 침략한 사례였다. 나쁜놈(북한)이 더 착한놈(미국)의 보호를 받는 착한놈(남한)을 공격한 사건이다" 라고 말하였다. 북한이 무고한 남한을 부당하게 침략했다는 낭설은 한국전쟁을 평가할 때 흔히 저지르는 오해 혹은 가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일반화는 근거가 없다. 많은 사람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갑작스럽게 이유 없이 남한을 침공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당시 한반도는 38선 경계선을 중심으로 수개월동안 반복되는 분쟁을 겪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외교관 필립 제섭(Philip C. Jessup)이 남침 2달 전인 1950년 4월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남한군과 북한군이 서로 침입하는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로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아마 1천 명 내지 2천 명 정도가 동원되고 있다." 또한,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는 "1949년 한 해에만 남한군 혹은 남한경찰이 2,617건의 무장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사회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목적으로 살인, 납치, 약탈, 방화 행위를 저질렀다" 고 보도했다.

더군다나, 북한은 6.25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과 24일 양일간 이루어진 남한군의 포격과 25일에 행해진 해주에 대한 기습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남침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주: 해주공격설은 현재 학계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한의 6월 26일 현지 보도와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UN이 추후에 한국전쟁의 책임으로 북한의 단독 침략을 주장했음에도, 그 당시에는 "현장에 있는 UN군사감시단 혹은 서울 소재 UN 한국 위원회 등 어떤 UN 단체도 적대행위의 발발을 목격하지 못했다" 고 주장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북한의 남침을 완전히 새롭고 전례 없는 전쟁의 개시보다는 "현재 진행 중이었던 내전의 본격적 확대" 그 이상이 아님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주: 이러한 부류의 수정주의적 주장은 한국전쟁이 평화롭다가 갑자기 1950년 6월 25일에 불현듯 일어난 사건이라는 기존의 통설에 이견을 제시하면서, 1945년 해방 이후 수많은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통설처럼 북한만이 전면전의 원인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고, 남한과 미국도 전면전까지 일어난 데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지, 북한은 평화롭게 조용히 살았는데 갑자기 남한 군대가 북침을 했거나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1950년 1월, 미 국무부는 미국의 방어경계(애치슨 라인)에 일본과 필리핀은 포함되지만 남한은 제외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물론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로 남한 대통령 이승만의 반대를 들어볼 수 있다. 이승만은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거듭 요구해왔고,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기 일보 직전인 1950년 6월 까지만 해도 여전히 북진을 주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다면 남한군이 북한을 침공할 것임을 여러 차례 시사했다"면서 "기이하게도 전쟁에 관한 이야기들은 거의 모두 남한의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보도했다. 존 로버츠(John Roberts) 장군 역시 남한군이 강력해질 경우 북한을 침공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남한이 방어용으로 무장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라스바드에 따르면, "하원의원 하워드 버핏(Howard Buffett)은 한국전쟁의 발발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확신했다. 그는 평생동안 상원 군사위원회가 한국전쟁 당시 CIA 국장이었던 힐렌쾨터(Roscoe H. Hillenkoeter)의 증언을 기밀 해제하도록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버핏은 나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너무 확실하다고 말하였다."

한국이 미국 방위권 밖에 놓여 있다는 애치슨 선언과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가 동북아시아의 공산주의 반발을 초래하고 확대시켰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북한의 남침은 스탈린에 의해 승인받았지만, 처음에 스탈린은 북한의 요구를 계속 반대했었는데, 추후에 그의 두려움과 우려는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런던정경대의 역사학자 블라디미르 주복(Vladislav Zubok)은 "스탈린은 미국이 재건된 일본과 동맹을 맺고 남한을 아시아 대륙의 진입을 위한 전초기지로 변모시킬 것으로 예상했다"고 진술하는데, 결국 북한의 남침 자체가 남한을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

중공의 참전과 전쟁의 비극적인 확대

단순히 공군을 투입해 폭격하는 것만으로는 북한의 진격을 막지 못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미 육군의 참전을 명령하였다. 남한군과 미군은 연합하며 북한군을 다시 38선 이북의 원래 영역으로 효과적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트루먼은 그 지점에서 멈추는 대신에, 북한 전역을 점령하려고 시도하며 한국전쟁이 왜 냉전의 첫 중요 사건인지 몸소 보여주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이 과민반응은 장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말았다.

유엔군이 북진을 감행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공 국경에도 더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했고, 중공은 자기들 국경으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해왔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가 중공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심각해지자, 그들은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의 참전으로 인한 확전은 한국전쟁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한때 맥아더 장군도 "크리스마스까지 미군을 집으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을 가졌었지만, 오스트리아학파 역사학자 랄프 라이코(Ralph Raico)에 따르면, 중공의 참전으로 인해 "전쟁에 의한 미군의 피해가 3년이나 더 연장되고 말았다." 또 국경 인근에는 생물학전 또는 세균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윌리어 블럼 박사는 "특히 1952년 1월부터 3월까지, 미국은 남한과 중국 동북부 지역에 박테리아와 세균을 많이 투하했으며, 중공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과학자들의 국제적 연구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는 점을 밝혀내었다: "한국과 중공의 국민들 모두 세균전의 피해자였다." 북한의 남침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의 경찰'이 되어야만 했던 미국이 그 관리 대상에 (이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중공까지 포함했다는 것은, 중공에 대한 미국의 군사력 사용이 비열하고 부당할 뿐만 아니라, 본래 설정된 전쟁의 목표로부터도 상당한 이탈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한국이나 세계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한국전쟁의 긍정적인 면으로, 종종 이 전쟁을 통해 남한이 공산주의의 폭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전해졌으며, 번영하게 되었다는 점이 언급된다. 다시 말해,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방어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이 억압적인 지배구조(공산주의)로부터 남한을 효과적으로 보호했으며,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가 정착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남한 보호가 민주주의를 배양했다는 순진한 믿음은 근거가 없으며 역사적 사실과 충돌한다.

우리는 이미 미군정의 정치적 통제가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질서를 명백하게 억압했음을 목도하였다. 이러한 통제는 1961년 이후에야 마침내 중단되었는데, 그럼에도 남한 사람들은 미국을 따라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대신에 다시 독재자의 통제받는 것을 선택하였다. 이승만의 뒤를 이은 것은 민주 정부가 아니라 박정희 소장이 통치하는 군사독재정권이었고, 1979년에 김재규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그 독재가 지속되었다. 이후 두 번의 쿠데타가 잇따라 발생하며 전두환의 새로운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는데, 이에 저항하며 광주에서는 무장봉기가 있었고, 다른 길거리 시위에서도 유혈이 낭자했었다. 1985년 이후에는 상황이 조금 안정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남한의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남한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미국은 남한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16년 동안이나 교육했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미국이 남한 내정에 구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중단하고 25년이 지난 뒤에야 스스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사안은, 애당초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한국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뿐이라는 불편한 진실이다. 에밋 오도넬(Emmett O’Donnell) 장군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증언한 바 처럼,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재산과 인명을 비참하고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국 해군이 발간하는 <브래시 연감(Brassey’s Annual)>은 1951년에 한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한국은 더 이상 국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들은 파괴가 되었으며 수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 한국인들은 원조에 의존하는 집단으로 몰락했으며 파괴적인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우리는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 사람들로부터 감사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 파괴하는 것이 유해무익하다는 교훈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또 한국전쟁은 이후 베트남전에서 악명높아진 네이팜탄이 사상 최초로 사용된 본격적 전장으로서 그 효력이 입증된 장소였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비용 역시 엄청난 수준이었다.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 리처드 에벨링(Richard Ebeling)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54,250명의 미군이 목숨을 잃었고 103,3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으며, 미 공군의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은 "우리는 북한과 남한의 거의 모든 도시를 불태웠고,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을 죽였으며, 수백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북한의 후방으로 침투한 CIA의 작전 역시 적지 않은 숫자인 1500명 가량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역주: 대한민국의 경우, 약 15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71만명이 부상당했으며, 13만명이 실종되었다. 민간인은 약 37만명이 사망하고, 23만명이 부상당했으며, 30만명이 실종되었다. 미국의 집중 폭격을 당한 북한과 중공의 경우 피해가 보다 큰 편이다.]

어떻게 보면 즉각적인 물리적 비용보다 더 심각했던 것이 외교적 비용이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적대관계를 공고히 했으며, 냉전의 격화를 야기하였다. 랄프 라이코는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정복 계획의 일환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 냉전은 급격하게 군사화되어 본격적인 재래식 무기 및 핵군비 경쟁이 시작되었으며, 더 많은 동맹국을 확보하려는 광란의 경쟁, 그리고 해외 군사 기지의 건설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결론지었다. 전쟁이 끝나기 거의 직전에는 맥아더 장군조차도 "한국과 독일에서의 선거를 통한 재통일을 받아들이고, 한국, 독일, 일본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는 방안을 소련에 제안함으로써 냉전 자체를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대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만약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 충고를 받아들였더라면, 냉전의 모든 당사자들이 그후 수십년간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결론

19세기의 미국 역시 남북전쟁을 치룬 적이 있었다. 한국, 중국, 혹은 어떤 다른 외세가 미국인을 학살하기 위해 우리 땅에 군대를 보낸 적이 있었는가? 여전히 많은 미국인이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 제시된 사실들을 제대로 인지함으로써, 한국전쟁의 가짜 명예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글을 계기로 미국 역사 전체의 모든 전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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