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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 와이어 2021년 2월호] 세종시, 표퓰리즘의 끝

국내 칼럼
정치·외교
작성자
작성일
2021-02-01 19:54
조회
1119

전용덕
* 미제스 연구소 아카데미 학장
* 경제학 박사 (대구대학교 무역학과 명예교수)

주제 : #정치비판

미제스 와이어 2021년 정기칼럼 목차 <펼치기>

2021년 1월 6일 트럼프를 지지하는 시위대가 미국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시위대는 의사당 기물을 파괴하고 점거 장면을 생중계했다. 시위대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 대선의 마지막 절차를 힘으로 방해하는 것이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저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네 명,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논평가는 미 의회 습격사건을 포퓰리즘의 끝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포퓰리즘의 끝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가?

작년 7월 하순 무렵 김태년 더불어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를 세종시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김대표의 제안은 수도권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음으로써 악화일로에 있는 국민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속임수로 보였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종시는 미 의회 습격사건만큼이나 대한민국 포퓰리즘의 끝임이 분명해 보인다.

주지하듯이,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충청도민의 표를 얻기 위하여 수도를 충정도로 옮길 것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했다. 그는 대선 후 그 공약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고 말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은 충청도 민심 이반을 우려하여 세종시를 만드는데 필요한 인력과 예산을 지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종시를 기업이 중심이 된 자족형 행정수도로 만들 것을 권고한 이명박 대통령을 무시하고 지금처럼 세종시를 순수한 행정수도로 만들 것을 주장하고 관철했다.

생각해보면, 충청도는 그 때까지 한 번도 대통령 후보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 결과 충청도는 대선이 끝났을 때 어떤 ‘특혜’도 챙길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충청도민에게 표를 얻기 위하여 행정수도라는 미끼(?)를 던진 최초의 대통령 후보였다. 문제는 행정수도가 세종시에 만들어지면서 대한민국에는 두 개의 수도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에서 수도가 두 개인 경우는 없었다. 수도를 이전할 때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세종시 이후 대한민국은 수도가 두 개인 나라가 되어 있다. 대한민국만 동서고금의 예외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시는 한국 표퓰리즘의 끝임이 분명하다. 세종시는 길이 세계사에 남을 표퓰리즘의 본보기이다. 대한민국은 미국보다 10년을 더 빨리 표퓰리즘의 끝을 보여주었다. 다만, 미국 의사당 습격사건과 달리, 그런 표퓰리즘이 전 세계 사람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세종시와 관련한 몇 가지 점을 지적한다. 첫째, 수도를 두 개로 함으로써 행정상의 낭비가 적지 않다. 그리고 그 낭비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크기를 알 수 없을 뿐이다.

둘째, 일단 한 번 만들어진 정책이나 수도는 폐지하거나 해체하기 어렵다. 표퓰리즘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대표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 번 재미를 본 기존의 표퓰리즘을 이용하려는 시도도 계속될 것이다.

셋째, 한국인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세계사에서 몇 안 되는 국가 중의 하나라는 칭찬을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종시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표퓰리즘의 끝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치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넷째, 세종시 근무 공무원에게 세종시 아파트를 특별 분양하여 많은 이득을 얻도록 했다. 이번에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그 이득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제 공무원은 그런 특혜 때문에라도 세종시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외부에 대고 말할 수 없다.

다섯째, 세종시 아파트 특별 분양에 따른 이득은 원래의 토지 소유자인 토착 농민의 희생에서 온 것이다. 다만 충청도에 세종시를 건설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워낙 크기 때문에 불만을 말해서 안 된다는 사람들에 의해 토착 농민의 희생은 재갈 물림을 당했다. 그리고 토착 농민이 이런 이해관계를 잘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여섯째,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에서 보듯이 오늘날 한국에는 표퓰리즘에 관한 한 좌·우의 구분이 없다.

일곱째, 세종시가 표퓰리즘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언론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여덟째, 표퓰리즘에 관한 한 한국이 미국을 앞질렀다.

도둑도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이 훔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타인의 재산을 훔친 사람을 처벌할 것을 법으로 제정한다면 도둑까지도 동의하기 때문에 그 법은 표퓰리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의 어떤 정책에 대해 ‘50:50’으로 찬반이 갈라진 상태에서 단순 다수결 민주주의의 결과는 표퓰리즘의 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순 다수결 민주주의보다 더 많은 의결정족수를 요구하는 민주주의에서도 표퓰리즘이 되지 않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입법부에 의한 법제정(legislative law) 또는 정부의 정책 결정은 그 점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표퓰리즘에 휘둘리는 나라는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태그 : #정치현안 #한국정치 #큰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