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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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라스바드의 생일을 기념하며: 왜 라스바드는 잊혀지지 않는가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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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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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Deist | Jeff Deist speaking with attendees at the 2015 … | Flickr

Jeff Deist
제프 다이스트는 2014년 이래로 미제스 연구소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이전에는 세무사로 근무하였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실제로 유죄인지 무죄인지 여부에 관계없이 국가는 그들을 기소할 도덕적, 윤리적,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세금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납세자가 옳다는 그의 리버테리언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1990년대 초 로스쿨을 다니던 다이스트는 UNLV에서 머레이 라스바드한스-헤르만 호페의 경제학 수업에 참석하면서 오스트리아학파를 학습하였다. 다이스트는 1988년부터 론 폴을 오래 보조하였으며,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론 폴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주제 : #라스바드

원문 : Why Rothbard Endures (게재일 : 2021년 3월 2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1926년 3월 2일, 화요일에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머레이 뉴턴 라스바드의 삶을 기념합니다.

1920년대의 브롱크스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훌륭한 지식인부터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갔으며, 그 중에는 데이비드 라스바드와 그의 부인 래 라스바드(David and Rae Rothbard)를 비롯한 굳건한 중산층들도 있었습니다. 라스바드 가족은 나중에 맨해튼으로 이사를 갔으며, 아파트 이웃인 아서 번즈(Arthur F. Burns)와 친해졌습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경제학자인 번즈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산하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고, 닉슨 행정부 산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발탁되는 등 훌륭한 경력을 쌓게 됩니다. 또 분명하게도, 번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머레이 라스바드의 경제학 박사 학위 취득을 무산시킬 뻔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학계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확실히 경제학자로서 정점에 도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라스바드와 비교하여 아서 번즈를 기억하거나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정답은 아무도 아서 번즈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머레이 라스바드는, 그의 스승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마찬가지로, 그가 살아있었을 때 보다 오늘날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 오묘한 점이 있는데, 비록 라스바드가 지금은 수 많은 동료와 독자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반대자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스바드와 그가 사랑하는 아내 조이(Joey Rothbard)는, 비록 생물학적 자식을 낳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자식을 엄청나게 많이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엄청나게 각광받는 그들의 책과 사상 그 자체가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진지한 사상가라면, 궁극적인 보상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상가는 자신의 작품이 5년 후, 10년 후, 25년 후, 혹은 100년 후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을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스바드는 확실히 그의 적수였던 아서 번즈보다 훨씬 더 성공적입니다. 심지어 죽고난 이후에도 라스바드는 엄청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번즈는 기껏해야 각주에서 언급될 뿐입니다. 우리는 21세기 내내 라스바드의 책이 읽힐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번즈는 그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라스바드는 엄청난 다작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확실한 점은 그가 쓴 글이 순수한 양적인 측면에서는 20세기의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많다는 것입니다.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은 7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은 20세 부터 매일 글을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쓴 글의 양이 대략 1천만 단어가 되리라 추정했습니다. 라스바드는 69세에 죽었지만 확실히 해즐릿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습니다. 라스바드는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엄청난 속도로 글을 썼습니다.

그의 저술 경력을 하나의 글에서 총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라스바드는 30권의 장편 책과 100권의 챕터를 저술했으며, 그가 발표한 학술적인 글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소실되었음에도, 보수적으로 유추해봐도 대략 1,000개로 추정됩니다. 신문 사설, 영화 평론, 정치 분석, 스포츠 해설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칼럼도 수 없이 많습니다. 그의 저술목록을 단순히 기록하기만 한 것이 62페이지에 달할 정도입니다.

경제학, 역사학, 철학, 사회학, 정치학, 법학을 넘나드는 라스바드의 놀라운 학술적 업적에 비견할 만한 인물을 상상하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가 쓴 글의 한 조각만 떼어낸다고 해도, 오늘날처럼 극단적으로 전문화된(hyperspecialized) 학계에서 활동하는 교수에게는 엄청나게 훌륭한 커리어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술경력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라스바드가 가진 불멸의 매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라스바드는 보다 심오한 무언가를 자극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실성(integrity) 혹은 비타협성(intransigence)이라고 부릅니다. 라스바드는 이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습니다. 라스바드의 놀라운 경력은 우리가 종좋 놓치곤 하는 결정적인 요점을 하나 강조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흥미롭고, 혁신적이고, 가치있는 일들은 대부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기술, 사업, 예술, 문학, 교육, 의료, 정치, 정부, 그리고 새로운 사상이 현재의 상태(status quo)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진보는 주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확실히 사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나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을 비롯한 기득권 언론에서는 재미없고 타협하는 보도만이 나오며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득권 정치 싱크탱크와 위험을 회피하려는 학계 역시 가치있는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대중이 국가의 통치를 받아들이게끔 TV에 나와서 선동하는 어용지식인들(Court Intellectuals, 머레이 라스바드가 리버테리언 포럼 1976년 2월호에서 제안한 개념)과 타락한 전문가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가장 독창적이고 설득력 있는 사상가들이 서브스택(Substack)이나 미디엄(Medium)같은 온라인 출판 플랫폼에서 글을 쓰며, 가장 위험한 사상가들이 TV 케이블이 아니라 유튜브나 작은 팟캐스트에서 발견되는 이유입니다. 라스바드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기득권 경제사상과 정치사상 모두에 거침 없이 반대했습니다. 라스바드는 정치적 아나키즘과 자유방임주의의 느슨하고 모호한 점을 바로잡아 아나코 캐피탈리즘이라는 새로운 규범체계를 홀로 창조했습니다.

머레이 라스바드는 언제나 현상유지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기득권이 아니라 주변부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라스바드의 원동력입니다.

가끔은 우연히, 그리고 대개는 필연적으로, 라스바드는 그의 경력 대부분을 사상과 학계의 비주류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라스바드가 비주류였다는 점은, 그의 총명한 지능 그리고 엄청난 지식수준과 결합되어 오히려 라스바드만의 독특한 비교우위로 작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미제스의 삶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만약 라스바드가 더 쉬운 길을 선택했다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아서 번즈가 라스바드의 박사 학위 취득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역주: 머레이 라스바드는 1945년에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제학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무려 11년이 지난 1956년에야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볼커 재단에서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라스바드가 박사 학위를 빨리 취득했다면, 그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연구를 했을 것이며,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심도깊게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고, 특유의 작문방식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볼커 펀드를 위해 라스바드는 학계가 아니라 교양있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글을 썼으며, 이것이 라스바드가 그 어떤 교수보다도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궁극적 이유입니다. 보다 중요한 점은, 만약 그가 평범하게 학위를 받고 어려움 없이 교수가 되었다면, 라스바드의 삶을 변화시킨 일생 일대의 대작이자, 오스트리아학파를 부활시킨 "인간, 경제, 국가"를 저술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역주: 볼커 펀드는 미제스의 "인간 행동"을 대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개론적인 입문서를 써달라고 라스바드에게 부탁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인간, 경제, 국가"이다.] 라스바드가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의 길을 선택한 덕분에, 그는 자유와 시간을 얻을 수 있었으며, 용감하고 급진적인 지식인들에게 정말 가치있는 탄약을 제공해 줄 수 있었습니다.

정 반대로, 종신 재직권을 갈망하는 평범한 교수들은, 이미 존재하는 연구성과에 자신의 아주 작은 부분을 약간 보태는 것에 만족하는 소심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또한 대출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모험을 꺼리게 만듭니다. 만약 라스바드가 전통적인 학문적 지위를 추구했었다면,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그가 학계의 인정이 보장되는 연구만 진행하였다면, "완전한 라스바드"가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만약 라스바드가 타협하기로 결정한 케이토 연구소에 저항하지 않고, 좋은게 좋은 것이라며 남기로 결정했다면, 과연 그는 자신의 아나키즘과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난을 전개할 수 있었을까요?

만약 라스바드가 타협하고 안락한 삶을 선택했다면, 총체적 민영화를 완전하게 논증했던 "권력과 시장"을 저술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 최소국가주의를 완전히 붕괴시킨 "국가의 해부"도 저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스바드가 타협했다면, 정당방위와 비례적 정의와 같이 가장 어려운 철학적 문제를 다루는 "자유의 윤리"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스바드가 국가를 포식자로 규명하고 그 존재 자체가 자유의 가장 거대한 위협임을 철저하게 밝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구속받지 않는 자립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디지털 시대입니다. 전체를 읽지 않고 요약만 살펴보며, 인내가 아니라 도파민 자극을 추구하며, 진지한 사상가가 아니라 얄팍한 지식인이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제2의 라스바드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미제스가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그는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적인 상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전쟁 전 옛 비엔나에서 살았던 그가 볼 때, 1960년대의 미국은 문화의 황무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는 머레이 라스바드가 앞서 언급한 "인간, 경제, 국가"를 저술하고 미제스주의 사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점성술에서 말하는 보병궁의 시대(the Age of Aquarius, 점성술의 시대 구분으로, 1960년대부터 향후 2,150년 동안 자유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미신)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미제스가 멩거와 뵘바베르크를 부활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수를 북아메리카에서 부활시켰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신호를 발견했고, 인간행동학을 미국에 뿌리내렸습니다. 미제스는 라스바드의 책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에도 라스바드 덕분에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읽는 르네상스가 도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사치스럽게 비관주의를 채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상가들이 계속 등장할 것입니다. "제2의 라스바드"는 지금쯤 기저귀를 차고 자신의 브롱크스에서 기어다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를 보좌하기 위해 100명의 라스바디안이 희생해야 할지라도, 우리는 단념해서는 안됩니다.

라스바드의 책이 오늘날 계속 읽히는 이유는 단지 그의 천재성과 통찰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라스바드가 지식인을 위한 휘황찬란한 어구를 구사하기 보다는 사상 그 자체에 몹시 집중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읽는 점도 있습니다.

라스바드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스바드는 어려운 문제와 답변을 제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스바드의 엄청난 저술, 광범위한 연구주제, 그리고 모든 지적인 영역에서 발휘한 놀라운 총명함에 비견할 만한 그 어떤 사상가도 오늘날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스바드는 시대정신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변화시켰습니다. 라스바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직접 라스바드를 읽으십시오. 당신은 견고한 정신을 가진 훌륭한 투사를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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