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칼럼 및 번역자료 투고 요령 안내

[1편] 루트비히 폰 미제스 대(對)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 인식론과 역사철학의 문제

해외 칼럼
인물
작성자
작성일
2021-03-10 08:12
조회
1421

David Gordon
대표적인 라스바디안(Rothbardian) 철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UCLA에서 정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머레이 라스바드의 삶과 사상, 그리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제스 리뷰(Mises Review)의 편집자로서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논문과 책들을 오스트리아학파의 시각에서 면밀하게 분석해왔으며, 리버테리어니즘을 대표하는 위대한 평론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제 : #마르크스주의비판

원문 : Mises Contra Marx (게재일 : 2017년 3월 13일)
번역 : 박종식 (경희대 철학과 석사과정)

[2편/完] 사회주의 경제의 불가능성

만약 최고의 마르크스 비판가를 선정해야 한다면, 자유시장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라고 말할 것이다. 뵘-바베르크는 자신의 저서 "자본과 이자(Capital and Interest)"와 "카를 마르크스와 그 체계의 종언(Karl Marx and the Close of His System)"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축인 노동가치론을 허물어뜨렸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한 부분일 뿐이다: 체계의 나머지 부분은 어떠한가? 여기서 우리는 뵘-바베르크의 가장 위대한 제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제스의 통렬한 분석은 비상한 탁월함을 가진다. 미제스의 마르크스 비판은 주로 그의 두 책, "사회주의"와 "과학이론과 역사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1848년작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 하나를 상기해보자: "지금까지 모든 현존하는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사회체제를 상이한 계급들 사이의 투쟁으로 특징짓는다.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게속되는 갈등은 자본가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대적 관계이다. 계급들 사이의 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각 계급의 구성원 혹은 동지들은 다양한 종류의 이론을 정교화함으로써 자기 계급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한다. 그 이론들이 무엇을 주장하건간에, 그것들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탐구와는 무관하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사상과 마찬가지로, 경제학, 사회학, 그리고 경제학의 모든 이론은 계급의 이익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가진 이러한 잘못된 견해의 본질을, 미제스는 다른 마르크스 비판가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꿰뚫는다. 만약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에 관한 모든 사상이 계급적 지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 체계 자체는어떠한가? 만약 마르크스가 자랑스럽게 선언하였듯, 그의 목표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과학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가 그의 견해를 [객관적으로]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제스는 마르크스의 견해가 자기모순적이라는 점을 올바르게 파악했다. 만약 모든 사회사상이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그 경우 "모든 사회사상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라는 명제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이 명제를 믿기에 필요한 토대들은 붕괴한다. 자신의 저서 "잉여가치론(Theories of Surplus Value)"에서, 마르크스는 다양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변증법"을 비웃는다. 그는 자신의 동료 경제학자들이 계급적 편견을 가졌다며 험담을 거듭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본인의 저작 역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였고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버렸다.

미제스는 그가 "자유주의"에서 간결하게 표현한 자신의 신조를 강조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오류와 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도구, 바로 이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미제스가 말하는 "이성"이란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논리적 절차를 의미한다. 이성의 힘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성이, 계급적 이익, 해석학적 이해, 혹은 그럴듯해 보이는 어떤 비합리적 지적 유행 등에 종속되는 것이라면, 유일한 결과는 이성 자신의 주장을 무효화시키는 것 뿐이다. 논리가 없다면, 상정한 설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이유(reason)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인식론은 분명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신비의 영역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제스의 맹공은 단지 인식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미제스는 또한 마르크스의 역사 해석 역시 상세히 분석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는 생산력이다. (매우 거칠게도, 그는 사회의 생산력이 사회의 기술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생산력은 모든 역사에 걸쳐 전개되는 일정한 경향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생산력은 생산(특정한 사회에 현존하는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체계)와 관련되는 변화를 강요한다. 예를 들어, 한때는 봉건제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가장 적합했다. 봉건제가 가장 효율적인 체제가 아니게 되었을 때, 자본주의가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건체제의 장원 경제(manorial economy)가 강요한 "족쇄(fetters)"를 깨부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생산력의 영향에 따라, 자본주의도 언젠가 그것보다 엄청나게 더 생산적인 체제인 사회주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예상했다.

"과학이론과 역사학"에서, 미제스는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의 과학"에 맞서 치명적이지만 간단한 의문을 제기한다. 상술하였듯이, 생산력의 성장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모든 다른 것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생산력의 성장을 설명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미제스가 종종 우리에게 강조하듯이, 오로지 개인만이 행동한다: 계급들, "생산력", "생산 관계" 등은 그 자체로는 추상적인 관념이다. 인간의 행동을 떠난다면 그것들은 공허하고 무력하다. 헤겔의 정신(Geist)과 비슷하게도, 마르크스의 생산력은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는 자기발전적 현상이다. 마르크스는 그 자체로 인간 행동의 결과인 생산력들이 어떻게 모든 중요한 인간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골몰하지 않았다.

행동하는 것은 생산력 자체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을 파악한다면, 역사적 진화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계획의 전체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만약 생산력이 행동을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행동이 생산력을 창출하는 것이라면, 한 경제체제로부터 다른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언제나 필연적이지는 않다. 만약 그러한 변화가 도래한다면, 정확히 어떤 개인들이 행동하여 그 변화를 창출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법칙들이 있다며, 인간의 행동이 변화를 창출한다는 견해에 반론을 제기한다면, 진실은 그 반대자의 행동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행동이 법칙을 창출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행동한 결과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태그 : #미제스 #다른경제학파 #오스트리아학파의_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