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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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굴복하지 않는 자유의 수호자

해외 칼럼
인물
작성일
2021-09-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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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

Lew Rockwell - Wikiwand

Llewellyn H. Rockwell Jr.
가장 영향력있는 자유주의자 중 한 명인 류 락웰은 미제스 연구소의 창립자 겸 회장이며, 류락웰닷컴의 운영자이다. 일찍이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졌던 락웰은 대학을 졸업하고 자유주의 출판사인 '알링턴 하우스(Arlington House)'에서 근무했는데, 그곳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저술을 편집하는 업무를 맡으면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접하게 되었다. 1975년에는 머레이 라스바드를 만나 완전한 아나코-캐피탈리스트가 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자유의 수호자 론 폴의 비서실장으로 재직했다. 1982년에는 마침내 미제스 연구소를 창립하면서 오스트로-리버테리어니즘 운동을 주도하는 활동가로 자리잡았다.

주제 : #미제스

원문 : Mises: An Audacious Champion of Freedom (게재일 : 2015년 12월 29일)
번역 그리고 편집 : 김경훈 연구원

  • 9월 29일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생일입니다.
  • 미제스의 삶에 대해서는 <미제스 핵심정리(Essential von Mises)>에서 더 자세하게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사상이 가장 중요하다(Ideas are all-important). 빅토르 위고는 사상이 군대보다 더 강력하다고 지적했다. 사상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고, 받아들여지고, 또 역사적으로 볼 때는 특정한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마르크스와 같은 범죄자나 케인즈와 같은 괴물이 아니라, 천재이자 영웅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받은 일이다.

미제스는 최고의 경제학자이자 자유의 옹호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나치, 중앙은행가의 압력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1871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렘베르크(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비엔나로 이주했다. 미제스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철도국의 고위 간부였다.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김나지움(오늘날의 중·고등학교와 비슷한 교육기관)은 여전히 미제스의 성적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는 아주 어릴 때 부터 자신의 비범함을 인정받았다.

미제스는 비엔나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수한 학생이었다. 그는 멩거의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접하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가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주택정책에 관한 연구를 했다.

미제스는 주택협회의 전문 경제학자로 취업하기 전에는 판사의 보조로 일하며 법을 학습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높은 부동산 세금이 비엔나의 주택부족문제를 초래하고 새로운 주택 건축을 방해한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정신력을 발휘해 논문을 쓰고 강연을 하며 부동산 세금의 인하를 이끌어냈고, 그가 예측했던 대로 비엔나의 더 많은 주택공급을 달성할 수 있었다.

미제스는 놀라운 <화폐와 신용의 이론>을 발표했음에도 대학에서 유급 직책을 거절당했다. 미국에서 연방준비제도가 설립되기도 이전에, 그는 중앙은행이 정부와 그 추종자들을 돕기 위해 기업과 민간인들을 해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인위적인 호황과 파국의 경기변동을 야기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제스는 육군 장교로 근무했는데, 오늘날 미제스 연구소는 그가 장교로서 수요받은 훈장을 소장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여하튼 미제스는 세계대전 초기에는 작전참모를 위한 경제고문으로 근무했지만, 나중에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최전방으로 발령을 받았고 거의 죽을 뻔했다. 훌륭한 미제스 전기를 쓴 귀도 휠스만(Guido Hülsmann)이 말하길, 미제스의 자유시장 분석이 가진 힘을 반대하는 부패한 국가주의자들이 그를 최전방으로 보내 죽이기를 원했다. 미제스가 자신들의 이권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제스는 적의 포병 때문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용감하게 싸운 훌륭한 장교였고, 그 공헌으로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제스는 비엔나 상공회의소에서 정부의 경제고문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대학에서의 지위를 얻을 수 없었고, 시간강사로 일하다가 명망있는 조교수로 승진했는데, 둘 다 월급을 받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어쨌든 미제스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유럽 전역의 최고 지식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유명한 사설세미나(privatseminar)를 개설하였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미제스의 세미나가 그들의 학문적 삶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엄밀하고, 즐거운 경험이라고 회고한다.

사실상 두 개의 전일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도, 미제스는 경제고문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했고, 100% 지급준비율에 기초한 금본위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당연히 중앙은행은 분노했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중앙은행 제도는, 관료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에게 우호적인 추종자들을 위한 비밀스러운 비자금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라는 것이 드러났다. 중앙은행의 부총재는 미제스가 타협하고 그들에게 조금만 협조해준다면 뇌물을 주겠다는 암시를 보냈지만, 물론 미제스는 평생 그러한 타협을 거부했다.

경제고문으로서의 미제스의 영향력은, 두 가지의 더 중요한 업적으로부터 확인가능하다.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독일처럼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수렁으로 빠질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미제스는 거의 단독으로 정치인들을 설득했고, 모든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독일과 비슷한 수준의 재앙을 겪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부분적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당수이자 외무장관인 오토 바우어(Otto Bauer)는 오스트리아에 볼셰비즘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그의 옛 학우인 미제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충고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했지만 말이다.

매일 저녁마다, 미제스는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자인 바우어의 아내를 만나 볼셰비즘이 오스트리아를 심각한 기아상태로 빠지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경고했고, 바우어는 설득당했다.

이러는 와주에도 미제스는 여전히 학문적인 연구를 계속하고자 노력하였다. 낮 시간에 하는 일에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서 말이다. 예컨대, 그는 보통 여가시간에 연구를 했는데, 처음에는 세계사에 대한 글을 쓰다가 나중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집필하였다. 러시아에서 볼셰비즘이 성립될 직후, 그는 생산수단의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주의는 혼란과 빈곤을 초래하는 재앙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였다. 어떠한 중앙계획도 재산과 시장을 대체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사회주의자들이 "미제스가 옳았다"고 인정하기 까지는, 미제스가 죽은 뒤에도 수십 년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악한 국가주의는 다른 방향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미제스는 오스트리아가 민족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어떤 파국으로 향하는지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미제스는 동료들에게 오스트리아를 빨리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제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제스가 자신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점에 감사했다. 1934년, 미제스는 제네바에 있는 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생애 최초이자 유일한 유급 교수직을 확보하였다. 억양의 문제가 전혀 없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강의하면서 독일어로 글을 쓰며 연구를 한 당시는 미제스에게 매우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1940년에 이르게 되자, 스위스는 매우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미 1938년에 나치는 미제스의 비엔나 아파트를 점거하여 그의 도서와 연구성과를 탈취하였다. 미제스, 그리고 나중에 미제스 연구소의 초대 회장으로 부임하는 그의 부인 마르기트(Margit von Mises)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미제스 부부는 진군하는 독일군을 피해 간신히 프랑스를 건너 중립국인 포르투갈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에 탈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의 학계는 유럽 출신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와 케인스주의자들에게 교수직을 제공했지만, 미제스는 '원시인', '반동주의자'. 그리고 '야만인'이라는 오명을 쓰고 매우 적대적인 대우를 받았다. 뉴딜정책의 지적 정당화를 제공한 미국 학계는, 심지어 리버테리언 단체인 볼커재단이 미제스를 위한 급여 전액을 지불한다고 제안했을 때에도 자유와 자본주의를 옹호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마침내, 나중에 미제스 연구소의 중요한 후원자가 된 사업가 로렌스 퍼티그(Lawrence Fertig)는 미제스가 뉴욕대학의 종신 방문교수로 취임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급여는 전혀 받을 수 없는 직책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자 학과장들은 계속하여 미제스에게 최악의 근무환경과 수업시간을 배정하였고,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듣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거의 60세에 가까운 나이에 새로운 나라로 이민왔고, 영어는 기껏해야 읽고 쓰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미제스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 아인 랜드(Ayn Rand), 그리고 머레이 라스바드(Murray Rothbard)와 같은 사람들은 새로운 세미나의 참석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중요한 기업가들, 언론인들, 그리고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그의 수업을 청강했다.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미제스의 수업이 다른 교수들의 질투를 받을 정도였다고 인정했다.

주변의 시기에도 미제스는 결코 자신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았다. 비타협적이고 겁내지 않으면서 그는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1940년대에 이르러, 미제스는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인 <인간행동>을 완성해내었다. <인간행동>은 건전한 개인주의적 토대 위에서 경제학의 모든 분석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미제스의 책, 그리고 차마 언급하지 못한 다른 책들 역시, 하나 하나가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단 하나도 이룩하기 어려운 훌륭한 업적이다. 미제스 책의 편집자로 근무하면서 미제스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먹은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당시에 그는 86세였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머레이 라스바드는 미제스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숭고한 비엔나 문화를 계승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위대한 유럽문명의 최후의 계승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한 의견에 동의한다. 미제스는 외모, 말투, 옷차림, 그리고 매너 등 모든 면에서 신사였다.

원칙의 문제에서 미제스는 언제나 비타협적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비판자들 중 일부는 미제스가 '몹시 불쾌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런 비난이 어떤 면에서는 납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라스바드, 해즐릿, 하이에크, 퍼티그, 레너드 리드(Leonard Read)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을 통해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미제스는 친절하고, 유쾌하고, 관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어떤 상황을 마주했을 때에도 항상 그러한 태도를 잃지 않았디. 특히 그는 학생들을 매우 잘 대해주었다. 그의 책들을 재판하고 새로운 논문을 출판하는 것을 돕던, 23세 꼬맹이에 불과했던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제스가 1973년에 사망한 이후, 몇 년 동안 나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도덕적 위상이 무시되고 있고, 오스트리아학파가 죽어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우리 모두는 영웅이 필요하고 미제스가 바로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래서 1982년에, 나는 마르기트 부인에게 미제스 연구소의 설립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며, 그녀에게 초대 회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라스바드는 그녀를 "걸어다니는 미제스 연구소"(one-woman Mises industry)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그녀는 기뻐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제스 연구소의 기부자들, 학자들, 학생들, 지지자들, 그리고 독자들 덕분에, 미제스가 무시당하고 오스트리아학파가 죽어버린 미래를 상상한 나의 불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늘날, 오스트리아학파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미제스가 창조자이자 영웅이라는 점 역시 점점 더 인정받고 있다.

미제스 연구소가 미제스와 오스트리아학파를 널리 선전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다. 케인스주의는 여전히 기득권체제의 공식 이념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미제스 연구소는 세계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큰 진보를 이룩하고 있다.

젊은 청년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달콤한 거짓말의 진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정부의 어용지식인에 불과한 교수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학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지배하는 정치적 올바름(PC)은 독특한 취향, 탁월한 지성, 그리고 판단력을 가진 모든 사람을 혐오한다. 미제스를 따르는 젊은 청년과 학자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도움 덕분에, 미제스 연구소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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