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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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역설 (2편)

해외 칼럼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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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6-0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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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Hermann Hoppe
한스-헤르만 호페는 살아있는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호페는 멩거, 뵘-바베르크, 미제스, 그리고 라스바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로-자유주의(Austro-libertarianism)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서,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인간행동학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적어도 지금까지는—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 #전쟁과_외교정책

원문 : The Paradox of Imperialism (게재일 : 2013년 6월 4일)
번역 : 한창헌 연구원


제국주의의 역설 (1편) 

군주제와 군대의 전쟁에서 민주주의와 전면전으로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국가는 절대 군주나 입헌 군주의 통치를 받는 군주제 국가였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흥미로운 문제지만 여기서는 잠시 제쳐두도록 하자. 대신 여기서는 (소위 의원내각제 입헌군주국을 포함하여) 대통령이나 총리가 통치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매우 드물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국가가 공격적인 성향을 지닐 것이라고 예상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전통적 군주와 현대 대통령이 마주하는 인센티브 구조는 각 정치체제에서 벌어지는 전쟁 양상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상이하다. 군주는 스스로를 영토의 사적 소유자라고 생각하지만, 대통령은 스스로를 임시 관리자라고 여긴다. 자원의 소유자는 자원으로부터 파생되는 현재 수입과 자원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가치(기대되는 미래 수입을 반영한다)에 관심을 기울인다. 군주는 '자신의' 나라에 내재된 자본가치를 보존하고 향상시키기를 바라면서 장기적 이익을 기대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원(사유재산이 아닌 공공재산으로서의 자원)의 관리자는 본질적으로 단순한 현재 수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자본가치에는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이러한 서로 다른 인센티브 구조의 실증적인 결과는 군주제 시대의 전쟁이 민주주의 시대의 전쟁에 비해 '절제적'이고 '온건한'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군주제 시대의 전쟁은 보통 유산 상속권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왕들은 왕조 간의 정략결혼으로 아주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그로 인해 상속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전쟁은 영토라는 유형의 목표로 특징지어진다. 이 전쟁은 이념적인 동기로 촉발된 분쟁이 아니었다. 대중은 전쟁을 왕의 사적 문제라고 간주했고, 왕이 스스로 마련한 재정과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전쟁은 지배 가문 간의 분쟁이었기 때문에 왕들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명확히 구별해야 하고 분쟁에 연루된 왕족과 그들의 재산만을 전쟁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군사학자(military historian) 하워드(Michael Howard)는 18세기 군주제 시대의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상업, 여행, 문화 및 학문 교류는 전쟁 중에도 거의 방해 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전쟁은 왕의 전쟁이었다. 좋은 시민의 역할은 세금을 내는 것이었고, 건전한 정치 경제는 시민들이 돈을 벌어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한다고 지시했다. 시민들은 젊은 혈기에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전쟁 문제를 결정하는 데 참여할 필요가 없었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참전할 필요도 없었다. 이 문제들은 알카나 레니(arcane regni), 즉 군주 혼자만의 문제였다. [War in European History, 73] 

미제스(Ludwig von Mises)도 군대의 전쟁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군대의 전쟁에서는 군대가 싸우는 동안 군대의 일원이 아닌 시민은 평범한 생활을 누렸다. 시민은 군대의 무장과 유지 비용 등 전쟁 비용을 지불했지만 그 외에는 전쟁 바깥에 남아있었다. 전쟁으로 집이 무너지고 토지가 황폐화되며 각종 재산이 파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이것 역시 전쟁 비용의 일부로서 시민이 부담해야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자기편'의 군대에게 약탈당하고 의도치 않게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전쟁의 본질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지휘관의 군사작전을 돕기보다는 방해했고 지휘관이 군대를 완전히 통솔하고 있다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군대를 형성하고 무장시키고 유지해온 교전국은 군인의 약탈을 범죄로 간주했다. 군인은 싸우기 위해 고용된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약탈하라고 고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시민의 세금 납부 능력을 보존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시민의 삶을 평상시와 같이 유지하기를 원했고, 정복한 영토도 자신의 영토로 간주했다. 시장경제 체제는 전시에도 유지되면서 전쟁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Nationalökonomie, 725–26]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의 절제된 전쟁과 달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시작하여 19세기 미국 남부 독립전쟁을 거쳐 20세기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정점에 달했던 민주정 전쟁은 전면전의 시대였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통치한다") 민주주의 국가는 특정 국가와 국민이 동일하다는 인식을 강조한다. 정복과 점령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왕조 간의 재산 분쟁과는 달리 민주주의 시대의 전쟁은 이념 전쟁이 되었다. 이 문명의 충돌은 문화 언어, 종교적 지배와 복종, 혹은 소멸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대중이 전쟁에 동원되지 않도록 피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고, 전쟁을 위한 무거운 세금 징수에 저항하는 행위는 반역행위로 여겨진다. 군주제 국가와 달리 민주주의 국가는 모두가 국가를 '소유'하기 때문에 강제징집은 예외가 아닌 보편적 규범이 되었다. 국가의 목표와 이상을 위해서 값싸고 대규모로 쉽게 징집병을 동원할 수 있고, 전쟁 자금은 국가 전체의 경제자원으로 지탱되며, 전투원과 비전투원 간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제 부수적 피해는 의도치 않은 전쟁의 부작용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가 되었다. 하워드는 이러한 경향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국가는 왕가 군주들의 '재산'으로 간주되던 시대가 저물자 그 대신 자유, 민족, 혁명과 같이 추상적 개념에 헌신하도록 만드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다수의 국민이 이러한 가치를 어떤 절대선의 구현으로 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희생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자 로코코 시대의 '온건하고 결판이 나지 않는 전투'는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ibid. 75–76] 

군사학자이자 2성장군인 풀러(J.F.C. Fuller)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국가 정신, 즉 민주주의가 전쟁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그것은) 전쟁을 감성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전쟁을 잔인하게 만들었다....국가의 군대는 국가 전체와 대적하고 왕실의 군대는 다른 왕실의 군대와 대적한다. 전자는 민중—언제나 제정신이 아닌 민중—에게 복종하고 후자는 왕—보통 제정신인 왕—에게 복종한다.... 이 모든 것이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또한 세계적으로 징집 사태를 야기하였다. 전쟁이 민중의 전쟁이 되자 재정과 상업에 결부된 민중은 새로운 범주의 전쟁을 낳게 되었다. 국가 전체가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국가의 모든 자원을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War and Western Civilization, 26–27] 

오턴(William A. Orton)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9세기의 전쟁은 국제법에서 명확하게 인정하는 것처럼 시민의 재산과 비지니스는 전쟁 바깥에 놓여있다는 전통에 의해 선을 지켰다. 시민의 자산은 임의적 압류나 영구적 몰수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거나 배상금을 내놓으라는 강제 규정도 없었다. 교전국 주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생활도 일반적으로 전쟁 이전과 같이 지속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관행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동안 일방적인 해양법 선언과 더불어 끝이 없는 무역금지 품목 지정으로 모든 형태의 교역이 위태로워졌고 모든 협정문이 휴지조각이 되었다. 제1차 대전이 종식되자 승전국들은 주요 패전국들의 경제회복에 난관을 조성하고 특정 시민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확대되어 어떠한 전시 국제법도 통용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일 정부는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수 년간 민법, 국제법, 기독교 윤리에도 없었던 급진적 이론에 기반하여 힘이 미치는 데까지 몰수정책을 시행했다. 이윽고 전쟁이 시작되자 국제 친선 관계를 깨려는 경향이 국가 사이에 전염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 지도자들은 언행을 가리지 않고 성전을 선포했으며, 강압적인 방안들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모든 법적, 영토적 제약을 무시했다. 중립이라는 개념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모두 비난받았다. 적국의 자산과 이익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당사국의 자산과 이익이라도, 심지어 중립국의 자산과 이익조차도 교전국이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강제력의 대상이 되었다. 교전국의 영토 내에 있거나 교전국의 통제 하에 있는 중립국과 시민들의 자산과 이익은 적국에게 행하는 강압과 사실상 동일한 강제동원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 결과 '전면전'은 어떤 시민 공동체도 벗어날 수 없는 형태의 전쟁이 되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는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명백한 메시지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The Liberal Tradition: A Study of the Social and Spiritual Conditions of Freedom, 2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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