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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제니친, 자유의 영웅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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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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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 N. Maltsev
유리 말체브는 현재 미국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이고 미국 위스콘신  주(州) 카르타고 대학의 경제학 교수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여러 정부의 공직과 연구직을 맡아 일한 적이 있다. 1989년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안을 진행했던 고위급 경제팀의 일원이었다. 그는 PBS 뉴스아워 ,C-SPAN, CBC 등 다양한 언론 미디어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유리 말체브는 15권의 책과 100개 넘는 기사를 쓰고 공동 집필했다. 그는 자유 시장 재단(the Free Market Foundation)의 권위 상을 수상하였다.

주제 : #인물평가

원문 : Farewell to Aleksandr Solzhenitsyn (게재일 : 2008년 8월 6일)
번역 : 전계운 대표


노벨상 작가이자 가장 유명한 반체제 인사인 알렉산드로 이사예비치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은 2008년 8월 3일 모스크바 인근 자택에서 89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길고 굴곡이 있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소망하던 대로 사망했는데 솔제니친의 아내 나탈리아가 “그이는 여름에 죽기를 원했고. 여름에 사망했다.”, “그이는 집에서 죽기를 원했고, 집에서 사망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반적으로 솔제니친이 굴곡 있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그의 인생은 대부분 역경을 극복한 승리였다. 솔제니친은 1918년 12월 11일 러시아 남부 키슬로보츠크에서 아버지가 사냥 사고로 숨진 지 반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타이시야가 러시아 남부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아버지 이사키가 차르 군대의 장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소련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솔제니친은 초년기에 적백내전(러시아 내전)과 사유재산 폐지(경제적 계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발생한 대규모 기아와 파괴로 비참한 가난 속에서 자랐다.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가족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재산은 나중에 중앙 계획가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솔제니친은 자전적 장편 소설 ‘붉은수레바퀴’에서 어머니가 생존을 위해 싸웠고, 구 러시아 제국 군대 출신인 아버지의 배경을 비밀로 해야만 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어머니 타이시야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고 아들의 문학적, 과학적 관심을 거리낌 없이 장려하면서 남몰래 기독교 신앙 속에서 아들을 키워냈다. 솔제니친은 1941년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소련군 장교가 되기 전 로스토프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바가 있다.

그는 이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입대가 거부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포병 장교로 임관했다. 출세한 포병 대위였던 그는 1945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을 험담했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그는 8년의 중노동형(스탈린의 끔찍한 수용소 체제에서 거의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형기)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근처에 수감된 과학자들을 위해 마련된 정부 연구 시설에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결국엔 솔제니친은 카자흐스탄에 있는 특수한 예키바스투즈 수용소로 옮겨졌다. 1954년 그는 타슈켄트 의료 병동에서 위에서 난 악성종양을 제거했고,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종양과 수술에서 살아남았다.

솔제니친은 1956년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중앙 러시아로 돌아와 수학 교사로 일하며 강력한 산문들을 쓰기 시작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1961년까지 모든 해 동안 나는 내 생전에 내 작품을 출판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가까운 지인들이 내가 쓴 글을 읽는 것조차 감히 허락하지 못했다.”고 했다. “마침내 42세의 나이에 이 비밀스러운 저서는 나를 지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첫 작품인 장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마뜨로냐의 집’ 이 두 편을 니키타 흐루쇼프의 명시적인 승인을 받아 1962년 문예지 ‘노비미르(신세계란 뜻)’에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1990년까지 솔제니친의 유일한 국내 저서였다.

1970년 타슈켄트 암 병동에서 솔제니친 본인의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작품인 소설 ‘암 병동’을 포함하여 서구에서 여러 작품을 발표한 그는 망명 중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솔제니친은 소련의 재입국이 허용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3년 후 ‘수용소 군도’가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직후 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한 나라에 위대한 작가가 있다는 것은 다른 정부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떤 정권도 위대한 작가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오직 소수(어용)작가들만 사랑했다.”고 비꼬았다.

그는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온 교직 제안을 수락한 뒤 버몬트주 캐번디시로 이주해 수 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솔제니친의 시민권이 회복되었고, 1994년 러시아로 돌아와 개혁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고함과 눈물의 모음집”을 가지고 이미 없어진 나라인 소련의 동서를 횡단했다.

나중에 솔제니친은  “이 모음집은 역사의 슬픔”이라며 “자신이 저주처럼 안고 가는 우리 시대의 슬픔”이라고 썼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고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대량학살자 집단의 궁극적인 악행을 폭로하기 위해 헌신한 솔제니친을 타협 없는 자유의 챔피언으로 기억할 것이다. 한때 자신이 잔혹한 노동 수용소의 포로였던 솔제니친은 소련 수용소 체제의 참상을 기록하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그는 시베리아, 에티오피아, 쿠바, 베트남, 중국, 유고슬라비아 등에 세워진 괴물 같은 공산주의 노예 수용소의 토대가 된 사회주의 이념의 비도덕성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도덕적,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솔제니친이 폭로한 비밀스럽고 잔혹한 역사를 가진 모든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서방에 망명 중이었던 솔제니친은 “러시아인인 우리에게 공산주의는 죽은 개인 반면, 서방의 많은 사람들에겐 공산주의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자다.”라고 쓰기도 했다.

서방에 있을 때 그는 스위스 모델의 지방 정부를 선호했었고, 버몬트에서 살았던 경험을 극구 칭송했었다. 1994년 러시아로 떠나기 전, 솔제니친은 캐번디시 주민 모임에서 이웃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환대하고 사생활을 존중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는 마을회의형 자치 정부가 러시아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를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전 총리이자 개혁가이며 강력한 친시장주의자이자 반(反)사회주의자였던 표트르 스톨리핀(1906-1911)를 존경했다.

솔제니친은 집단이나 당, 국가보다는 개인을 믿었다. 그는 ‘수용소 군도’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이 국가, 계층, 정당 사이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마음을 통해 나뉘어진다.”고 썼다.

솔제니친은 사회주의와 나치즘을 똑같이 악하고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길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와 소련의 만행을 비난했고 그는 동료 국민들이 난파선을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솔제니친에 따르면 평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61,000,000명의 사람들이 소련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스탈린 치하에서만 43,000,000명이 살해당했다. 레닌과 흐루시초프는 나머지 18,000,000명을 살해한 책임이 있다. 이러한 죽음의 대부분(39,000,000명)은 강제 수용소와 강제 추방 노동 때문이었다.

그의 글로 20년이 넘는 투옥, 망명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를 소련 시대의 가장 저명한 반체제 인사이자 공산주의 통치에 반대한 지적 저항 상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20세기에 가장 비방을 받고 명예 훼손을 당한 작가들 중 한 명이다. 그는 거의 매 분기마다 암살의 위협과 고의적인 중상모략의 희생자였다.

2001년 6월 솔제니친은 러시아 내 유대인들의 역사를 다룬 ‘200년을 함께: 1775-1995’ 마지막 원작을 출간했다. 솔제니친은 모스크바 인근 트로이체-리코보에 있는 시골집에서 건강 악화로 칩거하면서 30권에 달하는 수집 작품을 편집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될 것”이라며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 것을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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