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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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프리드먼은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한 사람이 아니었다

해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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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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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y North | Gary North speaking at Ron Paul's annual BBQ at… | Flickr

Gary North
게리 노스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사학자,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가, 그리고 급진적 자유주의자이다. 1970년대에 론 폴의 연구조수로 일한 바 있다. 자신의 웹사이트, 미제스 연구소, 그리고 류락웰닷컴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론 폴이 제공하는 홈스쿨링 커리큘럼의 개발 책임자이기도 하다.

주제 : #인물평가

원문 : Detours on the Road to Freedom (게재일 : 2012년 8월 1일)
번역 : 김경훈 연구원



지난 2012년 7월 31일은 밀턴 프리드먼 탄생 100주년이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역주: 월스트리트 저널 웹사이트가 유료로 전환됨에 따라 기사 내용을 복사한 다른 웹사이트로 링크를 걸었음]

2012년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대작 <화폐와 신용의 이론>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어떠한 기사도 내보내지 않았다. 미제스 연구소는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지난 2012년 3월에 열린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학술회의에서 <화폐와 신용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여러 세션을 개최했다. 이 논의를 편집한 책이 내년에 출판될 예정이지만, 학계와 경제언론 그 어디에서도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미제스가 무시당하는 지금의 상황은 이 나라가 아주 나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시 한번 중요한 교훈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온건한 조치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단지 일의 진행을 느리게 만들 뿐이다. 사실 온건한 조치는 개선을 막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밀턴 프리드먼이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1960년대에, 프리드먼은 "공짜점심은 없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정부가 1달러를 쓴다면 그 돈은 민간경제의 생산자와 노동자들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산적인 피터에게서 1달러를 빼앗아 비생산적인 폴에게 바치면서 둘 다 이득을 얻는 마술적인 복수효과(multiplier effect)는 없다. 그의 통찰력이 보여지듯이, 정부의 조치는 계속해서 시험대에 올려져야 한다.

물론 프리드먼의 발언은 케인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과 다름 없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케인스와 직접 맞선 적이 없다. 그는 결코 캐인스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그는 1965년 말 타임지에 "우리는 이제 모두 케인스주의자다"(We are all Keynesians now)라고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케인스의 방법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결정타였다.

미제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케인스와 경쟁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오스트리아학파는 수학이 아니라 개인의 결정에서 시작한다.

프리드먼은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반박하기 위한 당대 학계의 중심에서 벌어진 이론적 대결에 결코 직접 나서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프리드먼의 방법론적 스승은 어빙 피셔(Irving Fisher)였다. 미제스는 피셔의 불환화폐 경제학이 자유에 엄청난 해악을 가져올 것임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했다. 1912년, 미제스는 <화폐와 신용의 이론>을 통해 피셔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반면에, 프리드먼은 중앙은행에 기반을 둔 피셔의 화폐금융이론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되살리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피셔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피셔는 재앙이었다. 그는 대공황이 발발하기 직전인 1929년 9월에 주식시장이 영원히 고원지대 위에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경제학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은 물론 시누이의 재산도 주식시장에서 완전히 탕진하고 무일푼으로 죽었다.

그리고 기사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는 벤 버냉키 연준의장에게 달러를 더 찍어내도록 요청함으로써 번영을 창출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는 비논리적인 미신이다. 단기적으로 볼 때, 프리드먼은 과도하게 발행된 돈이 번영의 환상을 만들고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러나 시장은 그러한 거품을 금새 따라잡을 것이다.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았고, 단지 가격만 더 올랐을 뿐이 드러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프리드먼의 생각이 아니었다. 미제스의 통찰력이다. 오히려 프리드먼은 연 3%에서 5% 사이의 약간의 신용팽창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냉키는 언제나 프리드먼의 제자로서 행동했을 뿐이다. 경제학의 모든 학파가 2008년과 2009년에 버냉키가 일으킨 통화에 기초한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침묵했다. 오직 미제스의 후계자들만이 그를 비난했다.

이어서, 월스트리트 저널이 말하길:

로널드 레이건 이후, 20세기 후반의 세계에는 밀턴 프리드먼만큼 경제적 자유를 부르짖는 세계적 수준의 지식인이 없었다. 키는 작지만 거대한 지성인이었던 프리드먼은 대부분의 학계가 정부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신조에 매료되었을 때, 중앙계획의 문제를 폭로하고 자본주의를 구한 경제학자였다.

세상에 그 어떤 정부가 프리드먼으로부터 중요한 실용적 충고를 받아들였다는 말인가? 프리드먼이 실제 경제정책에 기여한 바는 딱 하나 뿐이다. 바로 소득세 원천징수가 그것이다. 1943년에, 프리드먼은 소득세 원천징수를 위한 경제학적 방어논리를 제공했다. <프리맨>(The Freeman Online)에 따르면:

프리드먼은 자신이 재무부의 소득세 원천징수안을 만든 사람 중 하나였음을 인정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관여했든 안 했든 어쨌든 제도는 도입됬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천징수는 전쟁을 수행하는 정부가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요소였다. 프리드먼은 "당시에 우리는 전쟁에 기여하기 위해 전념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그 시절에는 장기적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엄청나게 크고, 대단히 침해적이고, 자유를 파괴하게 될 정부를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그런 일에 기여하고 있었다며 후회할 뿐이었다.

프리드먼은 아담 스미스가 그랬던 것 처럼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그는 이론적으로는 정부의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오스트리아학파가 권고한 규모만큼 줄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정부도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그의 충고를 무시한다. 프리드먼은 광야에서 소리치는 외로운 목소리에 불과했다. 1943년에 전쟁중인 미국정부를 위해 기여한 것을 제외하면, 프리드먼은 단 한번도 정부에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다.

중앙계획의 가장 위대한 반대자는 미제스였다. 1920년에 미제스는 중앙계획의 불가능성을 확정하는 에세이,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경제계산"을 저술했다. 프리드먼은 단 한번도 미제스에 필적할 만한 글을 쓴 적이 없다.

프리드먼은 1976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프리드먼 이전까지, 거의 모든 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돌아갔다. 프리드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1930년대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자유시장 경제학을 유린한 이후, 자유시장 경제학이 부활의 신호탄을 쏜 첫 신호였다.

안타깝게도 프리드먼에 앞서 1974년에 이미 하이에크가 수상한 바 있다. 하이에크는 매우 이른 1931년부터 미제스와 함께 중앙은행의 정책에 맞서 싸워왔다. 프리드먼이 정부가 우리의 재산을 원천징수할 수 있도록 조치한 바로 다음 해인 1944년,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을 발표했다. 그 책은 확실히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켰고, 중앙계획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

프리드먼의 1971년작 저서 <미국의 화폐사>는 (2012년 6월 21일에 사망한) 안나 슈워츠(Anna Schwartz)와 함께 쓴 작품으로, 우리가 화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

사실이다. 프리드먼 덕분에 '우리'는 화폐에 대해 완벽하게 틀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프리드먼은 1931년부터 33년까지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잘못된 통화량 억제정책을 실시해 대공황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학계가 그 쓸데없이 두꺼운 책에서 인용하는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연준은 통화량을 감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팽창했다. 프리드먼은 사실을 왜곡했을 뿐이다. <미국의 화폐사>는 중앙은행이 왜 통화량을 팽창해야 하는지, 그리고 금본위제가 왜 골칫거리인지 주장하기 위해 후대의 국가주의자들이 인용하는 책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프리드먼의 입장은 피셔나 케인스의 입장과 동일하다.

프리드먼의 여러 저술은 많은 해악을 끼쳤지만, 그 중에서 최악의 영향을 가져온 것이 바로 <미국의 화폐사>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프리드먼의 다른 저서에 대해서도 논한다:

프리드먼은 학술적 저술보다, 대중에게 자유시장의 미덕을 전달하는 점에서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는 대중강연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유했다. 그의 두 베스트셀러인 1962년작 <자본주의와 자유> 그리고 1980년작 <선택할 자유>는 여전히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자본주의의 도덕성과 같은 흥미로운 이슈에 대한 프리드먼의 강연은 여전히 유튜브에서 시대를 초월한 인기를 끌고 있다.

<선택할 자유>에 대한 평가는 동의한다. 확실히 그것은 좋은 책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는, 좋은 면도 있지만 나쁜 면도 있다. 특히 그 책은 최악의 발상인 교육 바우처를 홍보한다. 또 중앙은행의 인플레이션을 옹호한다. 무엇보다도, 프리드먼은 그 책에서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이하게도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그는 동시에 정부의 식의약품 허가제와 가격통제는 반대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대중의 입맛에 맞게 대강 쓰여진 것이다. 그 덕분에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할 수 있었다.

작은 거인 프리드먼은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당당하고 영웅적으로 서 있었다. 그는 '인민의 일반의지'를 옹호한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의 개인 탄압에 환호하던 좌파 지식인들에 맞서 싸웠다.

거짓말. 프리드먼은 주요 이슈에서 항상 침묵했다. 그는 언제나 정치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나팔수였지만 두 개의 나팔을 들고 있었다. 한손에는 자유시장을 위한 나팔을, 다른 한손에는 계획경제를 위한 나팔을 들고 수시로 바꿔가며 불었다.

프리드먼은 규제가 종종 득보다 실이 많다는 주장을 하면서 진보 좌파들을 지적인 막다른 곳에 내몰곤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예시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규제는 대개 생명을 구하는 약의 도입을 지연시킨다. 그는 "FDA가 신약을 더 빨리 출시하면 매년 1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지난해 신약이 시판되지 않은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겠느냐"고 좌파들에게 반문하곤 했다.

안타깝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청을 둘러싼 논쟁에서 프리드먼이 기여한 바는 전무하다.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프리드먼의 충고에 따라 행동했다면서 그를 선구자라고 칭송하는 것은 중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프리드먼이 틀린 소리를 했을 때, 정부는 그의 충고를 듣고 실천했다. 그리고 그것은 프리드먼의 조언이 사람들을 설득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그들의 힘을 키우는 정책을 추구하면서 프리드먼의 주장을 취사선택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이 옳은 소리를 했을 때, 예컨대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완전히 폐지한 이후의 변동환율제도 등의 사건에서는,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이 프리드먼에게 감화되어 그의 올바른 주장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자유시장 세력이 정치인들을 압박해서 옳은 일을 하도록 강요했고, 프리드먼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변동환율제와 관련한 조치를 취했던 당일에도, 닉슨 대통령은 가격과 임금 통제(프리드먼이 반대함)를 부과하는 동시에 금본위제(프리드먼이 원함)를 끝장냈다. 닉슨은 프리드먼의 경제학을 받아들여 정책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장을 방해하려고 했을 뿐이다.

프리드먼은 마약 합법화를 지지했고(그의 우파 지지자들은 이 점에 엄청나게 실망했다), 특히 1970년대의 징병제 폐지운동에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낸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의 비판자들은 그가 용병제도의 부활을 선호한다고 비난했지만, 프리드먼은 "만약 당신이 모병제 군인들을 '용병'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면, 나는 당신이 원하는 징병대상자들을 비자발적인 '노예'라고 부르고 싶다"며 반박하곤 했다.

징병제 폐지운동에서 주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프리드먼이 아니라 그의 시카고 대학교 동료 교수이고, 징병제 폐지운동의 첫 회의를 추진한 솔 택스(Sol Tax)였다. 또 징병제 폐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는 닉슨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마틴 앤더슨(Martin Anderson)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쓴 다른 글을 참고하라.

"프리드먼은 말년의 대부분을 교육에 투신했다. 그는 모든 부모가 원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대의에 헌신하기 위해 '교육선택을 위한 프리드먼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우리는 시장, 소비자 선택, 그리고 경쟁이 거의 모든 산업에서 작동하도록 허용하지만, 결코 가장 중요한 산업인 교육은 제외시켰다"며 한탄했다."

안타깝지만 프리드먼은 결코 교육문제를 위한 자유시장 해결책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를 장려했다. 그는 바우처제도를 주장했다. 그리고 바우처제도는 정부가 사립학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교육 커리큘럼이 정부에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바우처 혜택도 없다."(No curriculum conformity — no eligibility for vouchers.) 나는 바우처가 그냥 이중세금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나는  프리드먼과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한 바 있다.

보수 정치인들은 프리드먼의 또 다른 격언을 기억해야 한다. "세금이 많으면 절대 적자를 줄일 수 없다. 정부는 그들이 가져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소비하고, 그들이 먹어치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렇게 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주요 정치인들도 프리드먼의 격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론 폴은 확실히 저런 격언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프리드먼을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제스의 추종자이다.

필자는 프리드먼이 죽기 1년 전쯤에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반년마다 열리는 행사에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미국을 더욱 번영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할 수 있을까dy?" 그가 즉각 대답했다. "세 가지. 자유무역의 촉진, 모든 아동을 위한 학교의 선택, 그리고 정부지출의 삭감."

한번 따져보자. 자유무역, 1752년에 데이비드 흄이 이론적으로 옹호한 것이다. 프리드먼은 자유무역을 옹호하는데 어떠한 새로운 기여도 내놓지 못했다. 바우처제도, 미국의 그 어떤 도시도 자발적으로 채택하지 않았고 오직 정부강제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제도이다. 그리고 정부지출의 감소, 역설적이게도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세금 인상, 즉 소득세 원천징수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경제학자가 바로 프리드먼이었다. 그 어떤 정부도 프리드먼의 충고를 받아들여 지출을 삭감한 적은 없다. 프리드먼의 지적인 리더십을 인정한 정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만약 프리드먼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가 이것뿐이라면, 나는 그냥 유튜브에서 프리드먼 명연설 하이라이트만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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