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언제나 정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Liberty is always freedom from the government.)

-루트비히 폰 미제스 (Ludwig von Mi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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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분석이론 마르크스주의 대(對) 오스트리아학파 (1편)

해외 칼럼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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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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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Hermann Hoppe
한스-헤르만 호페는 살아있는 오스트리아학파 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호페는 멩거, 뵘-바베르크, 미제스, 그리고 라스바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과 오스트로-자유주의(Austro-libertarianism)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로서, 칸트(Immanuel Kant)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하여 미제스와 라스바드의 인간행동학 이론체계를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멩거(Carl Menger)에 의해 창시된 오스트리아학파가 미제스의 인간행동학을 통해 완전한 선험적-연역적 이론체계로 탈바꿈했다면,—적어도 지금까지는—최종적으로 호페가 미제스의 방법론을 경제학을 넘어 형이상학과 윤리학에도 적용함으로써, 인식론, 윤리학, 그리고 경제학을 아우르는, 일종의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으로서의 오스트리아학파의 정체성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 #마르크스주의비판
번역 : 한창헌 연구원

이번 챕터에서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마르크스주의 역사 이론의 핵심을 구성하는 일련의 논제들을 제시할 것이다. 나는 이 논제들 모두 본질적으로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나서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비롯된 진실된 논제들이 어떤 잘못된 출발점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제스-라스바드(Mises-Rothbard) 전통의 오스트리아학파(Austrianism)가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타당성에 대해 정확하지만 완전히 다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마르크주의 신념 체계의 핵심에서부터 시작해보자.1

(1)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2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지배계급과 상대적으로 큰 피착취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이다. 착취의 주요한 형태는 경제적 방식이다. 지배계급은 피착취계급이 생산한 결과물의 일부를 빼앗거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사회적 잉여생산물을 영유하고, 이를 자신의 소비적인 목적에 사용한다."

(2) 지배계급은 착취적 지위를 유지하고 착취적으로 영유한 잉여생산물을 극대화하려는 공통의 이익에 의해 통합된다. 그들은 권력이나 착취 수입을 결코 의도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권력의 손실이나 소득의 손실은 반드시 투쟁을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피착취자들의 계급의식에 달려있다. 즉, 피착취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착취에 공통적으로 대항하는 다른 계급의 구성원들과 얼마만큼 의식적으로 결속하는지에 달려있다.

(3) 계급 규칙은 주로 재산권의 배분에 관한 특정한 합의 혹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특정한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에 나타난다. 이러한 합의나 생산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지배계급은 강제와 강압의 기구로서 국가를 형성하고 지휘한다. 국가는 "계급 정의"(class justice) 체계의 관리를 통해 기존의 계급 구조를 강제하며 재생산을 돕고, 계급 통치의 존재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념적 상부구조를 고안하고 뒷받침한다.

(4) 내부적으로는 지배계급 사이의 경쟁과정이 집결과 중앙집중화를 증가시키는 경향을 낳는다. 다극적(multipolar) 착취 체계는 점차 과두정치(oligarchic) 혹은 독점적 체계로 대체된다. 운영 중인 착취 시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며, 이러한 시설들은 계층적 질서에 따라 점점 통합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즉, 국제 체계에 대해서) 이러한 중앙집중화 과정이 (그것이 더 집중되고 더 발전될수록) 제국주의적인 국가 간 정쟁과 착취적 지배의 영토확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착취적 지배의 중앙집중화와 확장이 세계지배라는 궁극적인 한계에 점차 다가감에 따라, 계급 규칙은 "생산력"(productive forces)의 추가적인 발전 및 개선과 점점 더 양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경기침체(economic stagnation)와 경제 위기는 점점 더 두드러지고, 피착취자들의 혁명적 계급의식이 나타나기 위한 "객관적 조건"(objective conditions)을 만들어 낸다. 계급 없는 사회의 설립, "국가의 사멸"(withering away of the state), 사람에 대한 사람의 정부를 대체하는 물질의 관리(administration of things)3,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이 나타나기 위한 상황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보이게 될 것처럼, 이 모든 논제는 완벽하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모든 논제에 동의하는 마르크스주의야말로 명백하게 터무니 없는 착취이론으로부터 이 논제들을 이끌어냄으로써 그 타당성을 다른 어떠한 이념적 체계보다도 더 많이 손상시켰다.

마르크스주의 착취 이론이란 대체 무엇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예제와 봉건제 같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체계는 착취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결국, 노예는 자유 노동자(free laborer)가 아니며, 노예가 되어 이득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예 주인의 영유로 인해 부의 증가가 희생됨으로써, 노예가 되는 데 있어서 그의 효용이 감소한다. 노예의 이익과 노예 주인의 이익은 매우 적대적이다. 자기 스스로(즉, 농민 스스로) 홈스테딩(homestead)한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 임대료를 받아내는 봉건 영주의 이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주의 이득은 농민의 손실이다. 노예제 뿐만 아니라 봉건제 역시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데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노예와 농노 모두 노예제와 농노제가 없을 경우만큼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만약 노예가 자유 노동자가 된다고 해도) 착취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아래서도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또 농민이 다른 사람이 홈스테딩한 토지를 경작하고 그 대가로 임대료를 지불하는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그의 저명한 <자본론> 제1권 제24장 "이른바 시초축적"(The So-called Original Accumulation)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한 역사적 설명으로 초기 자본주의 재산의 상당 부분 혹은 대부분이 약탈, 인클로저(enclosure, 공유지의 사유지화) 및 정복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제25장에서는 "근대적 식민이론"(Modern Theory of Colonialism)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제3세계라고 부르는 지역으로 자본주의를 수출하는 데 있어서 무력과 폭력의 역할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인정하건데, 이 모든 것은 일반적으로 정확하며,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꼬리표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역사적 조사에 착수하고, 자본주의 운명의 형성에 바탕을 둔 잔혹행위에 대해 독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면서, 그는 실질적으로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논제가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설령 누군가 노동과 저축을 통해 이른바 "완벽한" 자본주의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자본의 최초의 전용(original appropriation)이 오로지 홈스테딩만의 결과물인 경우),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 자본으로 노동력을 고용한 자본가는 착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이 논제의 증명을 경제 분석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완벽한 자본주의의 착취적 성격에 대한 그의 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소가격(factor price), 특히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이 생산물 가격(output price)보다 낮다는 관찰에 기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3일동안 생산할 수 있는 소비재 가격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5일을 일하고 임금으로 받는 것보다 더 많은 소비재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잉여가치인 이틀 간의 생산량은 자본가에 의해 영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따르면 착취가 존재한다.4

이러한 분석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5노동자가 왜 그런 거래에 동의하는지를 질문한다면, 그 답은 분명해진다! 그의 임금은 현재재에 상응하는 반면 노동 서비스는 오직 미래재에 상응하며, 그는 미래재보다 현재재를 더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거래에 동의한 것이다. 결국, 노동자 역시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 서비스를 팔지 않기로 결정하고, 생산물의 전체 가치를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소비재라도 그가 이용가능하게 될 때까지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 서비스를 판매한다는 것은 그가 미래 어느 시점의 아마도 더 많은 양의 소비재보다 지금 현재 시점의 더 적은 양의 소비재를 선호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편으로, 자본가는 왜 그 노동자와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가? 그는 왜 나중에야 결실을 맺는 서비스의 대가로 노동자에게 현재재(돈)를 선불로 지급하는가? 예컨대 지금 당장 100달러를 지불하고 1년 뒤에 같은 금액을 돌려받는다고 하면 돈을 지불하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 경우에는 그냥 1년 동안 100달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기간동안 100달러에 대한 실질적 지휘권을 들고 있는 추가적 혜택을 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따라서 노동자에게 임금의 형태로 지불하는 100달러를 지금 당장 포기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100달러 이상의 금액을 받을 것으로 예상해야만 한다. 그는 이윤을 벌어들일 수 있거나, 더 정확히는 이자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해야만 한다. 또한 그는 시간선호(time preference), 즉 행위자는 언제나 먼 미래의 재화보다 가까운 미래의 재화를 선호한다는 사실에 의해 또 다른 방향으로 제약을 받는다. 만약 현재에 작은 것을 희생함으로써 미래에 더 큰 금액을 얻을 수 있다면, 자본가는 왜 지금 실제로 저축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저축하지 않는가? 고용한 노동자들 각각이 추가적인 이자수익을 보장한다면, 그는 왜 지금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가? 그 대답은 다시금 분명해진다. 자본가 또한 소비자이며, 소비자 중 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저축과 투자의 양은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생산기간을 더 연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보다 그 기간동안 더욱 절박하다고 생각하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은 " 현재재의 공급을 요구하는 필요성에 의해 제한된다.6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의 잘못된 점은 인간행동의 보편적인 범주로서 시간선호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7노동자가 자신의 "완전한 가치(full worth)"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착취와 무관하며, 할인 외에는 미래재를 현재재와 교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노예를 희생하여 노예 주인이 이익을 얻는 노예와 노예 주인의 경우와는 반대로, 자유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는 상호이익적 관계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시간선호에 따라 더 적은 양의 현재재를 더 많은 미래재보다 선호하기 때문에 합의가 이루어지고, 자본가는 지신의 시간선호에 따라 반대 순서의 선호에 따라 더 많은 양의 미래재를 더 적은 현재재보다 보다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들의 이익은 적대적이지 않고 조화롭다. 이자 수익에 대한 자본가의 기대가 없다면, 노동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현재재에 대한 노동자의 선호가 없다면, 자본가는 자신이 채택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비효율적인 생산수단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형편이 더 나빠질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자본주의 임금체계가 추가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는 간주될 수 없다. 만약 노동자가 노동 서비스를 판매하도록 허락 받지 못하고, 자본가가 그것을 구입하도록 허락 받지 못한다면, 상대적으로 감소한 자본축적 수준에서 생산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생산력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아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선언과는 반대로, 사회화된 생산 체계 아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새로운 고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극적으로 내려앉을 것이다.8분명하게도, 자본 축적은 홈스테딩, 생산 그리고/혹은 저축을 통해 명확한 시간과 공간에서 명확한 개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각각의 경우 그것은 미래재의 생산량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이루어진다. 행위자가 자본에 부여하는 가치는 위와 같은 협력과 자신의 시간선호율에 의한 할인을 고려하여 기대되는 모든 미래 소득에 행위자가 부여하는 가치를 반영한다. 생산요소를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경우와 같이, 행위자가 자신의 축적된 자본과 그 사용에서 비롯되는 미래 소득에 대해 배타적 통제를 허락 받지 못하고, 대신에 비홈스테더(nonhomesteaders), 비생산자 및 비저축자에게 부분적인 통제가 할당된다면, 기대 소득과 그에 따른 자본재(capital goods)의 가치는 감소하게 된다. 그의 유효 시간선호율은 상승할 것이고, 희소한 자원에 대한 홈스테딩은 줄어들 것이며, 기존 자원의 유지와 새로운 자본재 생산을 위한 저축은 줄어들 것이다. 생산 기간, 즉 생산 구조의 우회성은 단축되고, 상대적인 빈곤화가 초래될 것이다.


태그 : #다른경제학파 #노동과_임금 #자본주의

  1. Karl Marx and Frederic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1848); Karl Marx, Das Kapital, 3 vols. (1867; 1885; 1894); as contemporary Marxists, Ernest Mandel, Marx’s Economic Theory (London: Merlin, 1962); idem, Late Capitalism (London: New Left Books, 1975); Paul Baran and Paul Sweezy, Monopoly Capital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6); from a non-Marxist perspective, Leszek Kolakowski, Main Currents of Marxism (Oxford: Clarendon Press, 1995); G. Wetter, Sovietideologie heute (Frankfurt/M.: Fischer, 1962), vol. 1; W. Leonhard, Sovietideologie heute (Frankfurt/M.: Fischer, 1962), vol. 2 를 참조하라.
  2. Marx and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section 1).
  3. The Communist Manifesto (section 2, last 2 paragraphs); Frederic Engels, Von tier Autorität, in Karl Marx and Frederic Engels, Ausgewählte Schriften, 2 vols. (East Berlin: Dietz, 1953), vol. I, p. 606; idem, Die Entwicklung des Sozialismus von der Utopie zur Wissenschaft, ibid., vol. 2, p. 139.
  4. Marx, Das Kapital, vol. I; the shortest presentation is his Lohn, Preis, Profit (1865) 를 보라. 사실, (다른 본원전 생산요소인 토지의 소유자를 포함하지 않고) 전적으로 노동 서비스의 소유자만이 착취를 당한다는 더 구체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요소가격과 생산물 가격의 차이가 착취적인 관계를 구성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노동 소유자에게는 노동 서비스를 빌리고 토지 소유자에게는 토지 서비스를 빌리는 자본가는 노동과 토지 둘 중 하나만을 착취하거나, 노동과 토지를 동시에 착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가치론(labor theory of value)이야말로 여기서 노동을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잘못된 연결고리(missing link)를 제공하고 있다. 나는 이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도 노동가치론의 결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예를 들어 자칭 "분석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존 로머(John Roemer)가 제안한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다.(John Roemer, A General Theory of Exploitation and Clas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2]; idem, Value, Exploitation and Class [London: Harwood Academic Publishers, 1985]) 그는 착취이론이 노동가치이론과 분석적으로 분리될 수 있고, "일반화된 상품 착취 이론"(generalized commodity exploitation theory)은 노동가치이론의 참거짓 여부와 상관없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설령 그 지지자들에게 노동가치론을 증명해야할 의무를 면제해주더라도, 그리고 실제로 노동가치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마르크스주의 착취이론은 터무니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일반화된 상품 착취 이론조차도 마르크스주의 착취 이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결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5. Eugen von Böhm-Bawerk, The Exploitation Theory of Socialism-Communism (South Holland, Ill.: Libertarian Press, 1975); idem, Shorter Classics of Böhm-Bawerk (South Holland, Ill.: Libertarian Press, 1962) 를 참조하라.
  6. Ludwig von Mises, Human Action (Chicago: Regnery, 1966), p. 407; 또한 Murray N. Rothbard, Man, Economy, and State (Los Angeles: Nash, 1970), pp. 300–01 를 보라.
  7. 이자의 시간선호 이론에 관하여, 각주 5, 6번에 인용된 작품들에 더해; Frank Fetter, Capital, Interest and Rent (Kansas City: Sheed Andrews and McMeel, 1977)를 보라.
  8. Hans-Hermann Hoppe, A Theory of Socialism and Capitalism (Boston: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89); idem, “Why Socialism Must Fail,” Free Market (July 1988); idem, “The Economics and Sociology of Taxation,” Journal des Economistes et des Etudes Humaines (1990); supra chap. 2 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