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바디언 관점에서 본 미국의 역사
David Gordon
대표적인 라스바디안(Rothbardian) 철학자인 데이비드 고든은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UCLA에서 정신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머레이 라스바드의 삶과 사상, 그리고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제스 리뷰(Mises Review)의 편집자로서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논문과 책들을 오스트리아학파의 시각에서 면밀하게 분석해왔으며, 리버테리어니즘을 대표하는 위대한 평론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원문 : A Rothbardian View of American History (게재일 : 2007년 5월 11일)
번역 : 전계운 대표
라스바드는 역사 연구에서 경제학을 훨씬 뛰어넘는 범위를 다루었다. 그는 <자유에서 잉태한: 미국 건국사>(Conceived in Liberty) 4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책(1975-1979)을 통해 미국 식민지 역사를 상세히 다루었으며, 특히 미국 혁명에서 자유주의적인 선례들을 강조했다.
그의 기본적인 논지는 17세기의 발전 과정에 대한 논의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라스바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명한 역사학자 칼 베커는 미국혁명이 영국에 대항해 식민지의 ‘자치권’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었는지, 아니면 식민지 내에서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싸움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가 있다. 이제 우리는 17세기 후반의 초기 혁명과 그 영향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1670년대와 특히 1688년 이후 혁명이 거의 모든 미국 식민지에 걸쳐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버지니아의 베이컨의 반란, 뉴욕의 라이슬러의 반란, 뉴저지 두 곳의 지속적인 혁명 상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건들은 ‘자유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요컨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대중 운동이었으며, 각 정부가 전횡한 폭정, 높은 세금, 독점, 규제에 맞서 싸운 운동이었다."(본문, 1권 510쪽)
반란은 국가의 억압에 대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베커가 제시한 내부 혁명 대 외부 혁명의 접근방식은 기각되어야 한다.
"[식민지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들은 영국 그 자체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영국 정부가 지배하는 국가 권력의 억압에 대항한 것이었다. 그리고 명예혁명 기간 동안 영국의 권위가 갑자기 약화되면서 이러한 반란이 촉발되었다는 사실은 이 결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본문, 1권, 510쪽)
라스바드의 관점에서 본 식민지 시대는 전적으로 자유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라스바드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식민지 미국 사상에 영향을 미친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는 개신교와 청교도 전통에서 두 가지 상반된 전통이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하나는 광신적인 신정의 박해 전통으로, 이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와 네덜란드 오렌지당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본문, 2권, 188쪽)
라스바드의 엄격한 평가는 부분적으로 앞선 권에서 상세히 다룬 반율법주의자(antinomian) 앤 허친슨의 박해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토마스 J. 워튼베이커의 <청교도 과두정>(The Puritan Oligarchy)을 “탁월하고 깊이 있게 비판한 저서”라고 추천한다.(본문, 1권, 516쪽)
라스바드가 훨씬 더 선호했던 것은 다른 전통이었다.
“다른 [전통]은 낙관적이었고 개인주의적이며 자유주의적이었다. 심지어 이신론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레벨러 운동과 매사추세츠에서 탈출한 앤 허친슨, 로저 윌리엄스 그리고 후대에는 찰스 촌시와 조나단 메이휴와 같은 인물들에게서 나타났다” (본문, 2권, 188쪽)
그는 알제넌 시드니, 존 로크, 그리고 카토의 편지의 트렌처드와 고든의 영향을 강조한다. “각자가 미국에서 자유주의 사상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본문, 2권, 188쪽)”
라스바드는 로크를 실질적으로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로 간주한다.
“로크의 정부론(Essay)에서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했다. 하나는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이며 다수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신중함과 일관성이 부족한 면들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견해가 그의 논증의 핵심이다. 로크는 정치 문제에 관해 극도로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진 작가였다....따라서 로크의 보수적인 면은 자신의 입장이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조였다는 점을 감추기 위한 위장막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본문, 2권, 190쪽).”
트렌처드와 고든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로크를 해석했다. 그들은 "로크의 자유주의적 신념의 영향력을 크게 급진화 했다." (본문, 2권, 192쪽) 카토의 편지는 권력의 횡포에 대해 경고했다. 권력은 끊임없이 자유를 위협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혁명으로 억제되어야 한다.
“카토는 독자들에게 대중이 폭압적인 정부에게 너무 자주 혹은 경솔하게 혁명권을 행사할 위험은 없다고 확신시켰다. 오히려 정착된 관습뿐만 아니라 정부의 선전과 권력 때문에 위험은 정반대 방향에 있다고 보았다.”(본문, 2권, 195쪽)
라스바드의 이러한 논평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즉 로크나 트렌처드, 고든과 같은 지식인들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으며,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에서 그의 역사 연구 전체에 걸친 근본적인 특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두 부류 지식인을 대조시킨다. 하나는 권력자를 섬기는 “어용 지식인”으로 주로 자신의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활동한다. 반면에 국가에 반대하는 혁명적인 지식인은 진정한 신념에서 행동한다.
라스바드는 첫번째 부류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한다.
“군벌, 귀족, 관료, 봉건 지주, 독점 상인, 혹은 이들 여러 집단의 연합이든 지배 계급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통치가 유익하고, 필연적이고, 필요하고 심지어는 신성하다고까지 하다고 설득하기 위해 지식인을 고용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어용 지식인들이 맡아온 주된 역할은 지배계급이 주는 권력과 부의 일부, 즉 수하 관계를 댓가로 무지한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국가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변론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본문, 3권, 352쪽)"
라스바드는 정부는 대중의 지지에 의존한다는 에티엔느 드 라보에시(Etienne de la Boétie)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주장에 동의했다. "심지어 수동적으로라도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는 한, 어떤 국가도 (소수자도 아닌)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인이 대중을 이끌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헉명적인 지식인의 경우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급진적인 지식인들이 "변절" 하여 국가 권력 기구에 포섭되는 것은 대개 그들의 경제적 이익에 직접적으로 부합한다. 급진적인 반대 노선을 택한 지식인들은... 경제적 동기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오직 정의에 대한 열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이념만이 지식인들을 엄격한 진리의 길로 이끌 수 있다.... 따라서, 국가주의자들은 주로 경제적 동기에 의해 움직이며, 이념은 그러한 동기들을 가리기 위한 연막 역할을 한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이나 반국가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념에 의해 동기 부여되며, 경제적인 논리는 부차적인 역할을 한다." (본문, 3권, 353-354쪽)
라스바드는 미국 혁명 자체로 눈을 돌릴 때, 언제나처럼 주류의 견해에 맞선다. 조지 워싱턴의 미덕과 군사적인 리더십은 그에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워싱턴은 자유주의 혁명(Libertarian Revolution)에 적합했던 민중의 군대를 기존의 유럽식 모델을 따라 전통적이고 독재적으로 지배하는 국가주의적인 군대로 바꾸려 했다. 워싱턴의 주요 목표는 미국군의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정신을 짓밟는 것이었다.” (본문 4권, 43쪽)
라스바드에게 있어서 연합 규약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의 견해와 다르게, 지나치게 약해서 중앙집권적인 헌법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었던 체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규약 자체가 지나치게 많은 중앙 통제를 허용하고 있었었다.
“급진주의자들이 중앙집권적인 요소를 상당 부분 없애는 데는 성공했지만, 연합 규약은 여전히 느슨하지만 효과적이었던 초기 대륙회의의 연합에서 강력한 새로운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대한 단계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는 보수주의와 중앙집권주의의 중요한 승리였고, 헌법으로 가는 과정에서 중단 단계의 역할을 하게 되었음이 드러났다." (본문, 4권, 254쪽)
라스바드에게 있어서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길이었다.
그는 혁명의 급진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 전쟁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최초의 성공한 국가 해방전쟁이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이 ‘정당한’ 정부로 구성된 권력에 맞서 일어설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수행한 민중의 전쟁이었으며,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주권자’를 몰아냈다.” (본문, 4권, 443쪽)
이에 대해 외부 혁명이 반드시 내부적으로도 급진적인 상태일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라스바드는 이에 대한 답을 준비해놓았다.
“[영국] 통치가 갑작스럽게 무너지면서 불가피하게 정부는 파편적이고, 지역적이고, 준무정부주의적인 형태로 되돌아갔다. 또한 이 혁명이 의식적이고 급진적으로 세금과 중앙 정부 권력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혁명이 자유를 향한 급진적인 변혁을 지향했다는 것은 명백해진다.” (본문, 4권, 445쪽)
토마스 제퍼슨과 토마스 페인은 자유를 향한 급진적인 운동을 한 영웅들 중에서 높은 순위에 속한다. 페인은 <상식>(Common Sense)에서
“페인은 군주제의 뿌리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그는 국가의 기원에 관한 사회계약론을 넘어서 자유주의 이론에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로크를 따라서 국가는 인간의 자연권 보호에만 역할이 국한되어야 한다고 보면서도, 실제로는 국가가 이런 방식으로 또는 이런 목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대신 [국가는] 노골적인 정복과 약탈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본문, 4권, 137쪽)
반면, 라스바드는 리처드 헨리 리(Richard Henry Lee)의 의견에 동의하며 벤자민 프랭클린을 "사악한 노인"이라고 평가한다.
라스바드는 식민지 시기만큼 19세기 미국 역사를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의 통찰력있는 글인 “<미국 복지국가의 기원>(Origins of the Welfare State in America)”은 이 시기에 대한 그의 해석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라스바드는 복지국가의 기원을 노동운동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복지국가는 북부(Yankee)계열의 후천년주의적 경건주의자들이 주도한 국가주의적 사회 개혁의 산물이었다.
이들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가 주도한 제2차 신앙부흥운동(Second Great Awakening)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지상으로 재림하기 전까지 세상이 되어야한다고 믿었으며 국가의 강제력을 통해 사회 질서를 재건하려고 했다.
“불과 몇 년간의 소요 끝에, 이 새로운 프로테스탄트들은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부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죄의 유혹을 제거함으로써 개인의 구원을 강화해야 했다.”
없애야 할 주요 죄악 중에서는 "음주(악마의 술)"와 "기도와 성경 읽기를 제외한 안식일에 하는 모든 활동"이 있었다. 후천년설 경건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공립학교 운동은 대부분의 가톨릭 이민자들의 자녀를 "개신교화"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주로 뉴잉글랜드 지역에 집중되어있었다. "북부 지역에 새로운 국가주의자들이 집중되어있었던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들은 곧 경제 분야에도 큰 정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완벽한 경제를 창조하기 위해 큰 정부를 받아들이는 것은 죄악을 근절하고 완벽한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것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았다.” 그리고 PMP(후천년설 경건주의자)들은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후천년설 경건주의자들의 신정 체제에 복종하고 싶지 않은 모든 종교 단체는... 자연스럽게 자유방임주의 정당인 민주당으로 기울어졌다. 라스바드는 19세기 대부분의 정치 캠페인의 핵심에는 후천년설 경건주의자와 반대파인 민주당 간의 투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종교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희미하고 모호해졌고, 정부가 사회를 교정하고 조직하며 결국 완벽한 사회를 계획하는 사회복음으로 점점 더 기울어졌다.”
리처드 T. 엘리와 그의 제자 존 R. 커먼스는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다른 한 명은
"무신론자이고, 열렬한 민주정의 옹호자이며, 철학자인 존 듀이(John Dewey)였다. 듀이가 초창기에 후천년설과 하나님 왕국의 재림을 열렬히 설파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라스바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실: 권력과 지식인들>(World War I as Fulfillment: Power and the Intellectuals)”이라는 에세이에서 진보주의자들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는 진보주의 지식인들, 즉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상가"라고 여긴 이들이 자신들의 광기 어린 계획을 진전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강요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철저히 문서화했다. 라스바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쟁은 집단주의적 사회 통제를 실현하여 사회 정의를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다시 한번 존 듀이는 핵심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힘이란 단순히 ‘결과를 얻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칭찬할 수도, 비난할 수도 없다." (John V. Denson, “전쟁의 대가,” Transaction, 1997,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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