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지출은 투자가 아니다
Murray N. Rothbard
머레이 뉴턴 라스바드는 매우 지적이고 박학다식한 학자였으며, 주로 경제학, 정치철학, 경제사, 그리고 법학에 중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개발하고 확장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라스바드는 오스트리아학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고, 1929년의 대공황과 미국의 은행사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론을 응용하기도 했다. 라스바드는 경제를 통제하는 강제적인 정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의 독점적인 힘이야말로, 대중의 자유와 장기적인 복지에 대한 가장 거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으며, 모든 종류의 국가를 가장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집결된 ‘거대한 도적 패거리’로 정의했다.
원문 : Are Americans Undertaxed? (게재일 : 2017년 4월 13일)
번역 : 전계운 대표
- 역자주: 본 글은 머레이 라스바드의 『경제적 감각 만들기』(Making Economic Sense)에서 발췌한 것이다.
날이 갈수록 카우프만(Bill Kauffman)이 『연대기(Chronicles)』에서 사용한 흘륭한 문구처럼 “미국에 사는 사람과 미국을 운영하는 사람 사이에서 거대한 격차”가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미국인들은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내고 있고, 정부 지출과 세금이 우리의 재산을 갉아 먹으며 점점 더 많은 기생적인 사기꾼 집단과 부랑자들을 부양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지난 20년 간 정부의 부담이 가속화 되면서 경제가 정체되었다고 믿고 있다.
미국을 지배하는 통치 엘리트들과 이들의 통치에 “과학”이라는 외피를 씌우는 고도로 기술화 된 경제학자들은 당연하지만, 미국의 문제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다. 이 경제학자 엘리트들은 리바이어던 통치를 정당화하고, 그 통치를 실질적으로 이끌기 위해 고위직을 차지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 나름 논제에 차분하고 냉정하다. 바로 “미국의 문제는 세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향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분노의 외침에 엘리트는 세련되고 “과학적인” 태도로 응수한다. 우리 같이 아둔한 사람들은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세금 징수원의 수탈로부터 자신의 돈을 조금이라도 지키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신들, 엘리트들은 현명한데다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존재들이고, 우리처럼 편협하고 이기적인 저항자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오직 공동선, 일반복지, 공공의 이익만을 가슴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공동선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술경제 엘리트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이권들과 겹친다는 점을 지적하면, 우리는 오늘날의 언어에서 가장 심한 욕설 중 하나를 듣게 될 것이다. 바로 “역사 음모론자(conspiracy theorist of history)”라는 딱지를 말이다.
이 나라의 수많은 어용 경제학자들이 흔히 써먹는 수법은, 유럽이나 기타 국가들에서 세금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미국보다 높다는 점을 들어, 미국도 더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 논리대로라면, 정부 지출이 국민 자원을 몽땅 흡수하고 지배했던 소련의 영광스러운 경제적 성공을 왜 언급하지 않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주장은 결국 갈브레이스(Galbraith)가 자신의 베스트셀러『풍요로운 사회』(1958)에서 펼쳤던 오래된 논지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갈브레이스는 미국 사회를 살펴보며 민간 부문은 번영하고 활기찬 반면, 공공 부문, 즉 ‘사회화된’ 부문은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어떤 부문의 번영과 효율성이 오직 그 부문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되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가정하고, 민간 부문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이 쓰이고 있으며 공공 부문에는 “너무 적게” 쓰이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자원을 민간 부문에서 공공 부문으로 대규모로 이전할 것을 촉구했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에는 중대한 오류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정부 지출이 실제로는 저축과 투자이며, 심지어는 민간 부문보다 더 우월한 형태의 저축과 투자라는 생각이다.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들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처럼 생활 수준 향상은 오직 저축과 투자의 증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저축은 집단주의적인 개념이고 오로지 정부 지출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뉴욕타임즈의 요약에 따르면, 솔로우(Robert Solow) 교수는 “미국인들이 자녀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덜 소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곧 덜 누리고, 더 저축하고, 더 많이 투자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짓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높은 세금 때문에 미국인들은 이미 덜 누리고 있는 중이며 이 희생은 그들의 미래나 자녀들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솔로우의 생각은 소비자들을 착취하고, 세금을 걷고, 생활 수준의 향상을 억누르며, 결코 실현되지 않는 장밋빛 미래가 있는 스탈린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이에 반해, 자유시장 경제에서의 사적 저축과 투자는 아무도 강제로 희생시키지 않는다. 저축하고 투자할 여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원하는 만큼 소비하면 되는 것이다.
이 경제엘리트들의 핵심적인 오류는 사실상 모든 정부 지출에 “투자”라는 명예로운 딱지를 붙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부 지출은 “투자”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부내 생산적이지 않은 통치 엘리트의 교화나 권력 강화에 사용되는 돈일 뿐이다. 모든 정부의 지출은 “투자”라는 용어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으며, 실제로도 정부지출은 정치인과 관료들의 소비 지출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부 예산의 증가는 곧 저축과 투자 감소, 소비 증가를 의미하며, 반대로 예산이 삭감되면 소비는 줄고 저축과 투자는 늘어나게 된다.
솔로우와 그 밖의 기득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더 큰 정부와 더 많은 세금이란, 고귀한 것도 아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이타적”인 것도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그렇다면 갈브레이스의 원래 주장, 즉 사적 부문의 번영과 공적 부문의 빈곤함 사이의 간극에 대해선 어떻게 봐야할까? 이 격차는 1950년대보다 지금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결론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공공 부문이 큰 문제라면, 그 해답은 두 부문의 본질적인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실패한 공공 부문을 없애거나 적어도 극적으로 축소하는 것이 해답이 되지 않을까?
한 마디로, 공공 부문을 민영화하면 눈에 띄는 빈곤이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혹시 누군가 이 말에 회의적이라면, 한 번 실험을 해보자. 예를 들어 10년 동안 정부를 민영화해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자. 이를 “가치중립적인 과학”의 최대 이익을 위한 실천으로 “위대한 사회 실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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