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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끊임 없이 자행되고 있는 튜더 시대의 간섭주의

해외 칼럼
역사
작성자
작성일
2024-11-23 10:54
조회
135

Phil Duffy
* <네 도시 이야기> 작가

주제 : #간섭주의

원문 : Repeating the Interventionist Excesses of the Tudor Period (게재일 : 2024년 10월 3일 )
번역 : 전계운 대표


기본적으로 경제와 정치조직에는 중앙집권형과 분권형이라는 두 가지 형태만 존재한다. 분권형 모델은 “문제를 가장 작거나 가장 낮고 중앙집권적이지 않은 유능한 당국이 다루어야 한다는 조직 원칙”인 보완성의 원칙에 기반해 있다. 오늘날의 정부는 중앙집권형에 속한다. 이와 달리,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에 어느 정도 허용되었던 자유 시장은 권력 분산의 한 모델이었다. 

기록된 역사에서 가장 지배적인 정부의 형태는 군주정이었다. 이는 18세기 후반 북미의 옛 영국의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3년 후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 이후로 중앙집권형 정부는 진보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군사독재등 다양한 형태로 번성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군주정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배울 것이 없다고 주장하며 책을 덮어버려야 할까? 아니면 오늘날 군주정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교훈이 권력 분산과 개인 자유의 회복으로 우리를 인도할까?

튜더 시대

영국의 튜더 왕조시대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실수가 있기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매우 다른 시대에 살고 있지만 권력을 축적하는 방식은 대체로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해야 한다. 

튜더시대는 아마도 영국 역사상 권력이 가장 집중되었던 시기일 것이다. 이 시기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군주정의 궁중내에 있었던 감투 추구(place-seeking)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자리를 얻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왕에게] 접근(access)하는 것이 필요했다. 모든 중앙집권형 정부가 그러하듯이 튜더 시대의 성공의 열쇠는 [왕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G.J 마이어의 <튜더스>에서 우리는 헨리 8세(1509-1547)의 통치 기간 동안 접근이라는 미명하에서 칭송을 받기도 했던 부조리함을 이해할 수 있다. 


접근의 힘(The power of access)은 헨리 8세의 통치 후반기에  용변 담당관(Groom of the Stool)이라는 직위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직책의 핵심 업무는 현대인의 눈에 터무니없어 보일 수도 있다. 왕의 매일 배변을 위해 항상 “청결하고 쾌적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뿐 아니라, 왕이 배출한 것을 수거해 궁정 의사에게 전달하여 검사를 받게 하는 일, 그리고 왕의 뒤를 닦아주는 것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극단적인 접근 추구의 사례일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이 집중된 모든 체제의 핵심은 최고 권력자에 대한 접근이다. 이는 “민주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정부를 포함하여 오늘날 권력을 중앙 집중화하고 있는 모든 정부에도 해당된다. 예를 들어 미국 민주당이 2024년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을 허겁지겁 교체하려고 하던 때에 누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었다. 

권력이 분산되어 있으면 권력이 집중되어있을 때보다 권력에 접근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수 이익 단체를 대변하는 로비스트들은 워싱턴 D.C에 있는 K 스트리트에 사무실을 집중적으로 두고 있다. 만약 미국이 1789년의 연합 규약 정부를 계속 유지했더라면 로비스트들은 모든 주 수도의 정치인과 접촉하는 것이 수지타산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연방 정부의 경제 간섭도 제한되었을 것이다. 

중앙집권형 정부에게는 두 번째 과제가 있는데 지역, 역할, 인구 등 점점 더 넓어지는 통치범위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느냐이다. 헨리 8세의 경우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 보상을 해야했기 때문에 자신의 귀족계층을 만들었다. 그에게 유리한 점은 귀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정할 수 있고 계층도 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왕이나 왕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특성은 오늘날에도 대통령 선거 후 연방기관에 공직을 임명할 때 반복되고 있다. 이는 현대판 감투 추구다. 그리고 누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잘 접근하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헨리 8세는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신격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교를 지명하는 권력에 만족하지 않았고 교황과 왕의 권력을 합치려고 했었다. G.J 마이어가 <튜더스>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헨리 8세는 신하들이 자신의 교리에 따라살도록 하기 위해 교회의 교리를 훈령하려고 했었다. 이 교리를 강요하기 위해서 헨리 8세는 그 시대의 사상 경찰을 동원하여 투옥, 고문, 처형을 일삼았다. 

오늘날에도 사상 경찰과 혐오 범죄가 있다. 또한 경제를 성공적으로 견인했다고 (현직 대통령이) 주장하거나 이를 (대선 도전자가 )성공적으로 이끌겠다고 주장하는 대통령 후보를 신격화 하려는 시도도 있다. 경제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주장은 유치한 주장이다. 경제는 굉장히 복잡하고 시장은 굉장히 빠르게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일 수가 없다.

엘리자베스 튜더스

튜더 왕조로 되돌아가보면,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기간에도 자유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었다. 엘리자베스는 신하들에게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었고 아버지의 신권통치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를 뛰어넘어 해적질을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노골적인 해적 행위에 가담하는 국가는 거의 없지만 국가들을 해상에서의 약탈 대신 관세라는 대안을 찾아냈다. 관세는 독립전쟁 당시 북미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는 관세와 관련된 조치에 반발해서 일어난 것이다. 이후 워싱턴 행정부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이 재무장관으로 있으면서 관세를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관세는 남북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버 행정부에서는 미국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관세를 도입했다. (스무트-홀리 관세법) 오늘날 대통령 후보들은 미국이 수입 장벽을 높여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와 간섭주의

이 역사의 요점은 정부가 경제에 간섭을 하는 것은 단지 역사 속에서 엘리트 집단이 국민의 부를 향한 탐욕스러운 욕구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 형태가 군주정이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상관이 없다. 경제, 정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한 권력의 지배층이 만들어질 것이고 이 지배층은 먹잇감을 기다릴 것이다. 이 지배층은 항상 창의적인 방법으로 국민의 부를 강탈한 방법을 찾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지배층은 통치와 행정에 요구되는 “손을 더럽히는”일을 직접하고 싶지 않아 한다. 따라서 관료제가 형성된다. 이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배 엘리트는 실무적인 일을 떠넘길 수 있고 관료들은 안정적인 직장을 얻으며 느릿느릿하게 일할 기회도 얻는다. 오늘날 관료들은 연방정부의 권력 집중을 추구하는 한 정당과 압도적으로 밀접하게 엮여있다. 

요약하자면 경제, 정치 권력 조직에는 두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 중앙집권형과 분권형 말이다. 대부분의 역사 속에서는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정치 권력의 분산과 자유 시장이라는 대안이 역사 속에서 잠시 동안 시도된 적이 있었지만 이는 매우 성공적이여서 우리 대부분은 18세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수준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미국을 포함한 국가들이 경제에 정치적 간섭을 허용하면 잘못된 길을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정부가 “용변 담당관” 군단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놀라선 안될 것이다. 


태그 : #경찰국가 #보호주의와_자유무역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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